123화
잠든 황녀를 내려다보다가 그만 방을 나서려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쥐죽은 듯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던 어둠 속, 벽 너머 복도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녀인가?’
헌데 하녀라기엔 발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밤인 만큼 한 손에 등유나 양초를 들었을 하녀의 발걸음 소리는 차분하고 일정해야 했다.
또각 또각 또각, 이렇게.
허나 들려온 발소리는 한 번 쿵 소리가 난 이후로 소식이 없다가, 마치 순간이동 한 것처럼 황녀의 방문 앞에서 다시 작게 소식을 알려왔다.
이 시간에 잠든 황녀의 방을 찾아올 사람이면 나같이 음흉한 꿍꿍이가 있는 사람 말고 또 있을까, 그럼 설마 저 자도?
누가 됐든 간에 들키면 안 되었기에, 나는 급하게 황녀의 침대 옆에 서 있는 커다란 옷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옷장 문이 닫혔다.
‘누구?’
어둠 속 실루엣으로 보아 방에 들어온 이는 홀쭉하고 키가 큰 체형을 가진 자였다.
나는 환기가 잘 되라고 만들어진 옷장의 빗살무늬 틈 사이로 눈을 가져다 댔다.
에이, 그래봤자 얼굴이 잘 보이진 않네.
누구든 빨리 방에 들어온 목적을 이루고 나가길 바라며 옷장 속에서 숨을 죽였다.
정체 모를 자는 침대 옆에 놓인 보조 의자에 앉아 침대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자는 황녀의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옷장 속에서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은 마치 정지 화면 같았다.
누구길래 저리 황녀가 깰까 조심하며 숨죽이는 걸까.
‘어 그런데….’
차차 어둠에 눈이 익어갔다.
그럴수록 시야 속 사람의 정체로 떠오르는 자가 있었다.
‘2황자?’
날카로운 턱선 옆으로 그의 긴 머리가 흘러내리자,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보랏빛 눈동자가 열린 창에서 들어오는 미약한 빛을 흡수하며 반짝 빛났다.
‘2황자잖아? 2황자가 왜 여기에?’
놀란 마음에 소리 나지 않게 꾹꾹 눌러 쉬던 호흡이 순간 거칠어졌을 때였다.
옷장 속 낯선 이의 숨소리가 들린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2황자, 테오 세리에가 기민하게 옷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젠장, 들킨 건가.
어둠 속에서 마주친 고양이의 눈처럼 남자의 안광이 보랏빛으로 번뜩였다.
너무 고요해서 점점 높아만 가는 내 심장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오라버니?”
그러나 그는 곧 침대에서 들려온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2황녀의 목소리였다.
“오라버니야?”
“응, 테나야. 나야, 놀라지 마.”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황녀가 2황자를 와락 끌어 안았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눈물겨운 남매 상봉 장면이 아닌 괴물이 의자에 앉은 남자를 잡아먹는 장면으로 봤겠지만.
‘막내 황녀와 2황자라니.’
하긴, 이상할 것 없는 조합이었다.
둘 다 서제국 황제의 자식, 더군다나 황후가 모친인 친남매니 여러 남매들 중에서도 둘만이 진짜 남매가 아닌가.
아픈 동생을 오빠가 찾아온 건 전혀 문제될 게 없지.
그가 수배중이라는 사실과 이 야심한 시각만 제외 한다면.
“오라버니 정말… 흑, 괜찮아? 다치지는 않은 거야?”
“응, 난 괜찮아 테나야.”
그가 살가운 손길로 울음을 터트린 동생의 등을 다독였다.
2황자를 내 방문 앞에서 맞닥뜨린 소름끼친 일이나 동제국 수도에서 그가 벌인 테러에 당한 일이나,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저런 따듯한 친오빠의 모습을 코앞에서 보다니.
영 적응이 힘들었다. 하기도 싫고.
알렉스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잡아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을 테니까.
“동제국 사절단이 오라버니를 요구할거란 말을 들었어. 체포돼서 동제국으로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괜찮아, 안 잡히고 여기 이렇게 건강히 있잖아.”
“그러니까 왜!!”
우는 황녀를 2황자가 계속 다독였다.
하, 로건이 기다릴 텐데….
“테나야, 치료가 가능한 마법사가 나타났다고 들었어. 그리고 네가 치료 받는 걸 계속 피하고 있다는 것까지.”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해, 왜 치료를 거부하는 거야.”
“….”
그래, 바로 그게 내가 묻고 싶었던 거야.
절대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2황자의 그 질문만은 반가웠다.
“이 모습이 된 이후론 폐하가 날 찾지 않으니까.”
“….”
“난 그래서 이 모습이 좋아. 아름다운 모습이면 뭐해, 사람답게 살 수가 없는데. 언제 또 폐하가 들이닥칠지 몰라 밤새 두려움에 잠들지 못 하는 삶? 아름다운 외모가 내게 가져다 준 건 끔찍한 불행뿐이야 오라버니. 괴물이면 어때? 걱정 없이 편히 잘 수 있는데. 오라버니, 난 치료 받지 않을 거야.”
“미안하다.”
“….”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듣지 말아야 할 사실을 들었다는 기분에 속이 다 울렁거렸다.
그래서 계속 날 만나기를 거부했던 거였어?
서제국의 황제가 자기 딸한테….
“미안하면 이제부터라도 날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 오라버니. 차기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거, 테러까지 일으켜 가며 발악했던 거 다 날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제 그만 해줘. 내가 정말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서 붙잡히지 말고 잘 지내줘. 언젠가 다시 만나자.”
“아니.”
“…오라버니.”
“아니, 넌 내일 당장 치료 받을 거야.”
“뭐?”
어둠 속에서 흉측하게 변해버린 황녀의 손을 잡는 2황자의 모습이 보였다.
“내일 치료 받아, 테나. 어차피 사절단이 돌아가면 폐하가 별궁으로 올 거야. 그땐 치료를 안 받겠다고 버팅겨 봤자야. 강제로 받게 하겠지. 받아, 그리고 모래 바로 떠나자. 네가 그런 상태면 사람들 눈에 더 띄고 말거야. 떠날 준비를 거의 끝마쳤어. 함께 가자. 영영 숨어 살자.”
“….”
“폐하가 없는 곳에서 산다면 네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없어. 치료 받아, 치료 받자 테나야. 오라버니랑 이름도 잘 들어보지 못한 작은 나라에 가는 거야. 가서 황족의 성도 버리고, 괴로움도 다 잊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그렇게 살자. 할 수 있어.”
“으흑, 흑….”
“응, 그러자.”
서제국의 황제가 자식들을 소중히 한다더라, 그 중에서도 막내 황녀를 특히나 애지중지 한다더라.
그게 이런 의미였다니.
뜻하지 않게 서제국 황실의 추악한 집안 사정을 듣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둘의 대화 내용대로 황녀가 내일 치료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내겐 좋은 일이었다.
울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황녀를 보니 치료 받는 쪽으로 마음을 돌린 것 같았다.
이제 로건이 기다리고 있을 내 방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언제 가냐 쟤.
“갈게.”
“오라버니 지금 어디에서 숨어 지내는 거야?”
“여기야.”
“어?”
“이곳 별궁 지하, 그럼 그렇게 알고 이틀 후 올게.”
휴, 드디어 가는 구나.
2황자가 나가도 바로 나갈 순 없겠지.
황녀가 다시 빠른 속도로 잠들어주길 속으로 빌 때였다.
옷장 속의 나, 그리고 황녀와 2황자.
모두의 시선이 방문 너머로 향했다.
쿵쿵쿵쿵, 2황자의 발소리가 은밀했다면 지금 다가오는 자는 제 존재를 숨길 필요가 없는 자가 분명했다.
시원시원하고 세찬 걸음걸이로 누군가가 황녀의 방으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옷장 너머로 당황한 모습의 2황자가 방을 두리번대는 모습이 보였다.
‘어?’
두리번대던 2황자와 눈빛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어… 잠깐만, 왜… 에이 설마, 아니지?’
부정해봤자 그는 자신의 몸을 숨길 장소로 옷장 속을 택한 것 같았다.
옷장 속에서 몸을 뒤로 빼봤자, 등에 닿는 것은 나무 판자였다.
그리고 벌컥 열어재낀 옷장 속에 내가 들어있자, 2황자 역시 몹시 당황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구겼지만.
“….”
찰칵, 황녀의 방으로 들어오기 전 중간 방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망설임을 끝내고 옷장 속으로 들어왔다.
2황자 이 망할 놈은, 세상의 많고 많은 가해자들이 죄다 치매에 걸린 것마냥 기억을 잃는 것처럼 이 놈 역시 나를 기억하지 못 하는 듯했다.
어두운 옷장 속에서 그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살폈다.
소리만 낼 수 있다면 당장 “너 누군데 내 동생 방에 침입해 있던 거냐.” 라고 물었을 텐데, 그러지 못 해 답답한 눈치였다.
이 자식이 나를 기억 못 해?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너….”
그러다 나와의 아찔한 추억을 깨닫고 말았는지 희미하게 입술 사이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재빨리 놈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들키기 싫은 건 너 뿐만이 아니라고.
앞에 봐, 이 방에 누가 들어왔는지.
옷장 문 너머로 눈짓하자 그가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안 잤나 보네.”
들어온 이는 황태자였다.
어느새 침대 가까이 다가온 그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이불 덮고 누워 있는 황녀를 살폈다.
“베갯머리가 축축해, 테나. 방금까지 울던 게 이렇게 티가 나는데 계속 자는 척 할 거야?”
“자는 척 하는 거 아냐, 네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옷장 안에서 변태의 입을 틀어막은 상황 속에서.
지금 이 문을 박차고 나가야 할까, 소리 내지 않고 2황자하고 얌전히 숨어있어야 할까를 열심히 고민했다.
첫째로, 변태 x끼랑 한 옷장 안이 웬 말이냐, 옷장 문을 박차고 나간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1안을 선택하게 되면 황태자가 2황자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 수배중인 2황자가 잡혀 가겠지. 2황자가 끌려간다? 그럼 황녀가 내일 치료받는 상황도 오지 않겠지.
게다가 내가 왜 황녀의 방에 몰래 침입했는지 변명거리도 마땅치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황족의 방에 몰래 들어온 건 큰 죄에 해당했으니, 순탄하게 지나가긴 힘들 거였다. 일단 감옥에 처넣으려 하겠지?
나는 팔꿈치로 2황자를 푹 찌른 후에, 입 위로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너나 나나 조용히 해야 할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그는 어째서 빌론에서 보았던 내가 제 동생 방 옷장 속에서 함께 닥치자고 하는지,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였지만.
함께 조용히 하자는 의미만은 알아들은 것으로 보였다.
“마법사가 계속 항의하고 있다고. 치료 좀 받지 그래? 폐하가 오시기 전에 예쁜 얼굴로 돌아와 있으면 좋잖아?”
“나가.”
“그래야 형님을 구제해 달라고 애원해도 좀 더 먹히지 않을까?”
가볍게 나불거리는 말투로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