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별궁에 온 지 넷째 날이었다.
“오늘도요?”
“…송구하오나 그렇습니다.”
“….”
첫째 날 황녀가 몸이 아프다며 치료를 미루겠다는 전갈을 받았을 땐, 그러려니 했다.
약속했지만 예기치 못하게 아파서 약속을 미루거나 취소할 수도 있지. 아무렴 그렇지 않은가?
둘째 날에도 아프다며 약속을 또 뒤로 미루었을 때도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다음 날이면 아팠던 게 싹 날아가서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킬 수 있길 바랐겠지만, 사람 몸이란 게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인가.
여전히 병명이 무엇인지 알려주진 않았지만 좀 많이 아픈가 보다, 하고 참고 넘어갔다.
그러나 셋째 날 점심에 찾아온 시종이 또 똑같은 말을 반복했을 땐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 죽을병이라도 걸린 거냐, 사경을 헤매는 중이신가?
그럼 적어도 무슨 이유로 그렇다고 설명이라도 해주고 기다리게 하든가.
아무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무작정 기다려달라는 말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은 것이었다.
하여 황녀님께서 의식이 있는 상태라면 직접 만나 얘길 하고 싶다고 토로했지만, 보기 좋게 까일 뿐이었다.
아 그럼 우연히 마주쳐 볼까? 황녀도 밥은 먹고 생활을 할 거 아냐.
식당이라든가 그녀의 방 앞이라든가 어슬렁거려 보았지만 황녀의 머리카락조차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와 로건은 또 참고 기다렸다.
만나기를 거절했는데 무뢰배처럼 찾아가 방으로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저흰 이곳에 온 첫날 황녀님을 치료하기로 했었고, 오늘이 나흘 째입니다. 원래라면 치료를 끝내고 벌써 여길 떠났겠죠.”
“그렇죠.”
만나지 않겠다는 황녀와 당장이라도 쳐들어갈 기세의 나 사이에 낀 시종은 중간에 껴서 퍽 난감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시종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오늘도 한결같았다.
“죄송합니다.”
“허.”
사과를 끝으로 시종이 방을 나갔고, 방엔 뒷목을 잡은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로건만이 남겨져 있었다.
“후, 답답하네.”
“….”
“로건, 어떻게 생각해요.”
“뭘.”
“다섯 째 날이 되는 내일은 황녀를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도 못 만났는데?”
“…아픈 게 아닐 거야.”
벽에 등을 비딱하게 기대선 그가 팔짱을 끼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체면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황족이니만큼 감춰야 할 무언가가 생긴 거라고 봐.”
“우리와 약속을 잡을 때만 해도 없었던 무언가가 약속 당일에 생겼다? 그게 뭔데요.”
“모르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라는 무책임한 표정으로 로건은 어깨를 들썩였다.
“맞아요. 당신도 모르죠, 그리고 나도 모르고. 그래서 더 짜증나요.”
“….”
별궁에 놀러 온 거였다면 바다나 실컷 구경하지 뭐, 하고 늘어져 있었겠지만, 나는 급한걸.
가능하다면 사절단이 황궁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합류하고 싶었으니까.
“칼빈 부인은?”
셋째 날 황녀를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대차게 까인 나는, 벨라야더러 황태자를 만나 일을 서둘러 달라 말하기를 부탁했지만.
“말한 게 그거예요. 어제저녁에 황태자가 양해해 달라고 직접 말하러 왔었잖아요.”
“곤란하네.”
“로건, 나….”
“…?”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은근한 몸짓으로 슬금슬금 다가가자.
“왜, 왜 이래. 왜 오는데.”
“그러고 보니까 로건은 참 멋진 능력자였죠?”
남자가 두려운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든 말든 다가가 덥석 손을 쥐자, 로건이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왜, 왜 이러는데. 너 배고파?”
“배는 늘 고팠고요.”
“나 말고 다른 거 잡아다 줄게, 응?”
“아니, 뭔 소리야. 그게 아니라….”
“….”
키가 훌쩍 큰 그에게 고개를 숙여 달라 손짓하자, 로건이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얼굴을 가까이 내렸다.
나는 방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몰래 듣고 있지는 않겠지?
코앞까지 내려온 그의 귀에다가 꿍꿍이를 속삭였다.
“날 황녀의 방에다가 좀 집어넣어 줘요.”
*
“진심이야? 진심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어두운 여름밤, 깎아지른 절벽 위의 회색 성.
가까이서 봐도 아마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불 꺼진 대부분의 창들처럼 우리 방도 불을 끈 상태였으니까.
어두운 방 열린 창으로 금발 머리가 하나, 그 옆에 은발 머리가 하나 창문 너머로 고개를 쏙 빼고 있었다.
“저기 보여요? 한 층 위에, 저기.”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우리 방이 있는 3층보다 한 층 위인 4층의 불 꺼진 방이었다.
4층 방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자, 매서운 바닷바람이 불어와 눈이 금방 메말랐다.
아우, 눈 시려.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건 덤이었다.
“퉤.”
뒤에서 들려온 침 뱉는 소리에 돌아보자, 로건이 쩝쩝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뭐해요.”
“너 머리부터 묶어.”
“아.”
나는 긴 머리가 로건의 입에 들어가거나, 불어온 바람에 그의 뺨을 때리지 않도록 하나로 모아 얌전히 묶어 주었다.
“다 묶었어요. 내 말 이해했죠? 난 황녀의 상태를 봐야겠어요.”
황녀가 아프다는데,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
아니면 계속 치료를 거부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생긴 거라면 그게 무엇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하루 이틀 내로 나아서 치료를 받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수단을 취해야 하니까.
언제까지 여기 죽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난 좋은 생각 아니라고 봐.”
“그럼 좋은 생각은 있고?”
“….”
“사실 우리가 황녀를 꼭 치료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알잖아요. 성물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약속이 계속 미뤄질 무언가가 있다면, 기다리지 않고 성물만 훔쳐서 달아나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했다.
“걸리면.”
“안 걸리면 되죠.”
“걸리면.”
로건의 반복된 질문에 나는 생각해 두었던 간단명료한 차선책을 꺼냈다.
마침 운이 좋게도 별궁의 위치는 대륙의 맨 아래. 동제국의 바로 옆이었다.
수틀리면 성물만 챙겨서 도주할 것이다.
내가 나흘 동안 방에 처박혀서 바다만 본 줄 알아? 황태자가 운반해 왔다는 성물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다 알아냈다고.
“내가 걸리면 당신은 재빨리 황태자의 방에 가서 성물 챙겨 들고, 다시 와서 날 챙겨 튄다. 이게 내 계획이에요. 아, 그리고 벨라야도 챙겨서.”
“….”
“가만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괜찮지 않아요? 로건. 몸 근질근질하지 않아요? 당신 잔인한 사람이잖아. 사람 안 죽인 지 너무 오래되지 않았나?”
내 계획에 어서 동참하도록 사실들을 줄줄이 나열하자, 로건은 음. 화낼 줄 알았는데 반응이 싱겁네.
“너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도대체.”
“비밀.”
“이미 다 말해놓고 무슨 비밀이야.”
“아 그럼 안 비밀로 하든가.”
머리도 질끈 묶었겠다, 준비 운동도 끝냈겠다, 나는 로건을 끌고 창가에 섰다.
황녀의 방은 4층, 그녀의 방은 바로 옆옆 라인으로, 이쪽에서 보면 벽이 약간 더 튀어나와 있었다.
“자, 난 준비 끝. 얼음 능력자 출동!”
“너 얼마 전까지 나한테 사고 치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았냐.”
“출동!”
“….”
로건이 한숨을 내쉬고서 팔을 들어 올렸다.
*
- 휘오오오.
아래를 내려다보니 높이가 아찔했다.
낮에는 그렇게나 아름답던 바다는, 이제는 그 시커먼 입천장을 나를 향해 벌리고 있었다.
‘그래도 여름 바다라 춥진 않겠다.’
“….”
와 나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
살아서 나일 만나기로 다짐했잖아.
물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고 싶어진다더니만.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몸을 벽에 바싹 더 밀착시켰다.
“너 뭐해, 왜 가만히 있어. 빨리 움직여.”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로건이 뒤에서 속삭이듯 외쳤다.
그래, 가야지. 내가 가겠다고 했잖아.
벽에 가슴팍을 최대한 붙이고,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벽을 짚어 가며, 나는 로건이 공중에 만들어준 얼음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나갔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 또 조심….’
그는 이 계단이 단단하게 유지되도록 3층 창문에 서서 계단에 손을 붙인 상태였다.
미끄럽긴 했지만 그가 계단을 크고 넓게 만들어준 덕에 발을 놓을 공간은 충분했다.
‘좋아, 앞으로 8, 9계단만 더 가면 돼.’
얼마 안 남았어. 후딱 가자. 어?
사람이 일을 그르치는 것은 초반이 아니라 일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라고들 하나.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발로 얼음 계단을 꾹 박찼을 때였다.
‘으어어.’
내디딘 발이 미끄러지며 몸이 뒤로 기울었다.
사람 가는 거 참 한순간이지? 생각하며 눈을 꽉 감았는데.
“후….”
“….”
“너 이씨. xxxx….”
길게 이어진 한숨 뒤로, 로건의 애교 있고 앙증맞은 욕설이 더 길게 이어졌다.
눈을 떠보니 내 손과 발이 언 채로 벽과 계단에 붙어 있었다.
와 이렇게 미세 컨트롤도 가능한 거였구나 저 사람.
고맙다는 눈빛과 함께 난 괜찮다는 손짓을 해 보이자, 로건이 눈으로 욕을 날렸다.
“다시 올라설 수 있겠어?”
“있어요.”
다시 자유로워진 손과 발을 천천히 놀리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조금 뒤, 나는 마지막 계단을 밟고 외벽 쪽으로 튀어나온 창틀 선반에 안착할 수 있었다.
누가 이 벽을 타고 창문으로 침입할 거라 예상이나 했을까.
그렇듯, 여름밤 황녀의 방 창문은 시원한 공기가 드나들기 좋도록 활짝 열린 상태였다.
“….”
후… 동제국도 빌론도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마법 전구를 밤에 무드등처럼 켜놓기도 하는데.
무슨 보유한 마법사가 몇 트럭이라더니 켜놓은 전구 하나가 없냐.
막내 황녀의 방은 작은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하기만 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금살금, 창틀 위에서 방에 깔린 카펫 위로 맨발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동안 창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공중 얼음 계단을 건너오는데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몸이 저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디 그 비싼 얼굴 좀 봅시다, 황녀님.’
하얀 실크 커튼이 쳐진 커다란 침대로 다가가자,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누워있는 자의 실루엣이 보이는 듯했다.
‘황녀는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었지.’
도대체 어떤 상태일까 궁금해하며 손으로 커튼을 걷자, 아….
새근새근 들려오는 연약한 숨소리에 비해 얼굴의 반 이상이 괴수였다.
마치 눈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잠든 것처럼, 입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이미 마물의 모습이었다.
손과 발도 살펴보니 인간의 모습은,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과 왼팔, 목과 입 주변이 다인 것 같았다.
사람의 부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마치 괴물이 프릴이 달린 원피스 잠옷을 입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심각한데 빨리 사람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단 말인가?’
나 같으면 치료 방법을 안 바로 그날 치료 해 달라 졸랐을 것 같은데.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