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예, 저는 이미 아셨겠지만 폐하께 일을 부탁받은 마법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네, 압니다. 마차에 내려서부터 마법사님이란 걸 알 수 있었으니까요.”
어떻게 알아봤지? 라는 의문을 갖기엔 나는 누가 봐도 마법사다운 후드를 걸치고 있었다.
“어떻게 바로 알아봤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얼굴 바로 위에서 남청색 눈동자를 품은 눈이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휘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눌러쓴 후드를 나는 더 방어적인 태도로 여몄다.
황태자라는 사람의 관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마법사들이 즐겨 입는 후드를 쓰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그것 때문도 있지만….”
“….”
“폐하께 전해 들은 대로 녹색 눈망울이 정말 신비로웠기 때문입니다. 마치 마법의 모든 신비함이 담긴 듯한 눈빛이라고 극찬을 하셔서 궁금했는데, 이곳에 그런 눈빛을 가진 분은 아무리 둘러봐도 마법사님밖에 없었거든요.”
“하, 하하….”
초면에 느끼하게 왜 이래.
굳어지는 입꼬리를 올리려 하니까 입술이 파들거렸다.
느끼해도 황태자라는데 그래도 웃어야지 별수 있나.
어색하게 미소 짓는데, 비어있던 좌측에 누군가 다가와 서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죠? 저도 이 눈망울에 반해서요.”
왼쪽에 선 로건이 황태자 보란 듯이 내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좌측엔 바다 빛을 닮은 푸른 눈의 사내가, 우측엔 밤하늘 빛을 닮은 남색 눈의 사내가 나를 끼고 마주 서서 서로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 묘하게 불편한 상황이 빨리 끝났으면 싶었다.
계단을 오르다 말고 이게 뭐 하는 거지.
“아, 마법사님의 연인분도 함께시라 전해 듣긴 했습니다만….”
“네, 접니다. 초면에 제 연인의 눈빛을 칭찬해 주시다니, 산간오지를 떠도는 자나 제국의 황태자나 보는 눈은 같은가 봅니다. 안 그래?”
“뭐가요.”
“….”
아, 나도 모르게 너무 퉁명스럽게 대답해 버렸다.
당황해 목을 가다듬자, 로건이 어깨 위 두른 손에 힘을 꽉 줬다.
“뭐긴,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말야, 내가 첫눈에 반해서 당신 눈을 칭찬했잖아. 기억 안 나?”
아…. 그 녹색 눈알을 파버리고 싶다고 했던 거?
너는 그게 칭찬이냐 싶었지만,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웃어 보였다.
“그랬었지. 그때 참, 서, 설렜었는데.”
“어, 나도 느꼈어, 당신이 내 칭찬에 설렜다는 걸.”
설레긴 설렜었지. 너한테 진짜 죽을까 봐.
“그래. 오죽 설렜으면 당신이 내 눈을 칭찬하니까 눈알을 파서 가슴에 안겨주고 싶을 정도였다니까.”
“….”
아프지 않을 정도로 쥔 어깨를 로건이 자기 쪽으로 슬며시 끌어당겼다.
귀를 가린 후드를 살짝 들어 올리고서 그가 제 입술을 내 귓가로 들이밀었다.
“외간 남자한테 그렇게 웃어주면 나중에 나일한테 이른다, 너.”
“하.”
아주 시아버지 납셨네.
이제까지 분위기를 주도하던 황태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보다 내게서 조금 거리를 벌렸다.
그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이가 좋은 연인은 보기 좋은 법이죠.”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공사는 구분 할 줄 알아야죠. 죄송합니다, 전하. 사적인 추억은 둘이 있을 때 얘길 나누겠습니다. 이제 농담은 그만하고 해야 될 이야길 할까요.”
슬쩍 손으로 로건을 밀어내자, 그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떨어져 나갔다.
“전하께서 오기 전, 제 마법 용품을 문제로 조금의 언쟁이 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랬군요.”
마법 용품의 용도가 무엇인지 설명을 들은 그가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마법사님의 소중한 물건이니 그럼 제가 직접 보관하겠습니다. 그래도 안 될까요?”
“전하께서 직접이요?”
“네.”
“….”
황태자가 직접 나서서, 정중한 말투로 자기가 보관하겠다고 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고집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동제국에서부터 내내 몸에 지녔던 목걸이를 떼어내려니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럼.”
웃으며 내민 황태자의 손바닥 위에 목걸이를 올리자, 나는 정말 오랜만에 남들 앞에서 피비 셀린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모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재빨리 후드를 깊이 내리는데.
“금발이셨군요.”
후드 속 나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허리까지 숙인 황태자가, 한 손에 목걸이를 쥐고서 씩 웃어왔다.
“녹색 눈망울은 그대로네요.”
“….”
“너무 오래 밖에서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다들 들어가시죠.”
그의 말에 계단에 서 있던 모두가 하나둘 입구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서제국 놈들은 하나같이 속을 알 수가 없단 말이지.
2황자도 어땠는가, 처음엔 잘생기고 매너 좋은 놈인 줄로만 알았잖는가.
속은 완전 징그러운 놈이었는데.
꿍꿍이를 알 수 없는 황태자의 친근한 태도를 곱씹으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툭.
로건이 노크하듯 가볍게 이마를 두드렸다.
“너 아까 저 자식 보고 헬렐레 웃더라. 누가 그렇게 헬렐레 웃으래?”
“아 그럼 헬렐레 웃지 헬렐레 화를 낼까요 그럼?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한테? 그리구 내가 언제 헬렐레 웃었다고, 헬렐레는 무슨 헬렐레야. 나참.”
“왜 화를 내.”
“아 됐어요. 빨리 계단이나 올라가요. 더워 죽겠네.”
“….”
벙찐 로건을 지나쳐 계단을 오르자, 등 뒤에서 갈대밭을 누비는 바람 소리와 투덜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드 입자고 한 건 너잖아.”
*
별궁은 전체적으로 회색빛의 석조 건물인 데다가 들여놓은 가구나 물건도 무채색에 가까워서, 어딘지 모르게 수도원처럼 금욕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반가운 점이 있다면.
“와! 바다다!”
안내받은 방은 무려 바다뷰였다.
입구가 있는 별궁 정면으로 들어올 땐 몰랐는데, 방에서 내려다본 별궁의 뒤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창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밀려온 푸른 바닷물이 절벽에 부서져 하얀 거품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계속 감상할 수 있었다.
“예쁘네요, 여기.”
“….”
아예 창틀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본격적인 감상 모드로 돌입하자, 뭘 그렇게 보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슬며시 다가와 옆에 선 로건이 내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네, 예쁘네. 아주 짠 내도 풀풀 나고.”
“와 그쪽이 낭만 없는 인간인 거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굳이 옆으로 와서 내 낭만까지 깨트리진 말아 줄래요?”
“하하….”
그러더니 실실 쪼개며 소파로 가 앉는 것이었다.
“동제국 황실에서도 바다는 보였잖아.”
“코딱지만 하게 보였죠. 이렇게 바로 앞에서 펼쳐지진 않잖아요, 거긴.”
아 망할. 왜 바다 얘기에서 화제가 동제국으로 넘어가서 사람 기분을 또 가라앉게 만드냐.
동제국만 생각하면 이곳에 오기 전 수도에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갑작스러운 내 고백에 크게 놀라던 나일의 얼굴이라든가, 알렉스의 마지막 모습이라든가.
“….”
괜히 또 답답해진 가슴에 창밖으로 더 얼굴을 내밀었다.
짠 내 나고 좋네.
‘어?’
“로건.”
“왜 불러, 낭만 깨지 말래서 참는 중인데.”
시선은 계속 창밖에 둔 채로 그를 향해 손짓하자, 그가 너털너털 걸어와 옆에 섰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절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절벽으로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사라졌어요.”
“사람이 사라졌다고?”
“네, 저기.”
창밖으로 길게 목을 빼 살피던 그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갑자기 절벽에서 사람이 사라졌으면 귀신인가 보네. 딱 좋잖아 여기, 물에 풍덩 빠져 죽기에.”
“에이씨.”
질색하는 표정을 내비치자 그가 픽 하고 실소를 흘렸다.
“그게 아니면 절벽에 동굴 입구라도 있나 보지.”
“그런 거겠죠? 아 내가 본 게 정말 귀신이면 나 너무 소름 끼친단 말이에요.”
“네가 본 거 사람이야, 그러니까 미간 좀 펴고 쉬어 그만. 좀 있으면 황녀를 치료하러 가야 할 거 아냐.”
하긴, 먼 거리를 이동한 직후라 피로가 쌓인 상태기도 했고.
황녀의 준비가 끝나는 대로 시종이 부르러 온다 했으니 그동안 잠깐이라도 쉴 필요는 있었다.
쉬기를 권유하는 그에게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로건이 대뜸 내 턱을 손으로 쥐는 게 아닌가.
“네 얼굴, 하얗게 질려 있다고. 그거 알아? 쉬어야 한다고.”
“….”
턱을 들어 올려, 내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는 로건의 눈은 참 바다처럼 투명하고 푸르른 눈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얼마 전까지도, 새파란 저 눈이 내내 무섭고 정이라곤 없고 감정조차 담아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의 눈빛이라니.’
그러나 나는 말을 아꼈다.
그의 눈빛에서 연민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떠오르는 아무 말이나 그에게 지껄였다.
“눈이 참 예뻐요, 당신은. 짠 내 안 나는 바다 같아요.”
“….”
그 순간, 그가 화르륵 얼굴을 붉히며 떨어져 나갔다.
뒤돌아선 로건은 귓바퀴가 빨개져 있었다.
뭐야, 왜 저래.
“왜 난데없이 얼굴을 붉히고 그래요 기분 나쁘게. 누가 보면 오해하겠으니까 빨리 식혀요.”
“무슨 오해, 어차피 우린 지금 연인 사이인데.”
순간이동 했을 때도 토가 올라오지 않았었는데.
“제발 우리 둘이 있을 때는 연인 사이란 말은 꺼내지도 말아요. 소름 돋으니까.”
질색하며 몸서리치자, 로건은 조용히 소파로 가 다시 몸을 구겼다.
웅크린 그의 등을 잠깐 보았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우 내 기분, 다시 바다나 봐야지.
한참 후에 고개를 돌렸을 때, 로건은 여전히 귓바퀴의 열이 가라앉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
“네?”
“그게 그러니까 황녀님께서….”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덧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몸이 편찮으셔서 오늘은 만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오늘 내내요?”
“…네.”
연신 손을 꼬물딱거리며, 방황하는 눈동자로 말하는 시종의 표정은 어딘가 켕기는 게 있는 사람 같았다.
분명히 아까 전 방을 안내해준 다른 시종이 방을 떠나며 말하기로는.
- 오늘 약속한 시각이 2시가 맞지요? 황녀님께선 금방 준비를 끝마치실 테니 잠시만 방에서 기다려 주세요.
하고 나갔는데?
한 시간 만에 병이라도 난 건가?
“황녀님께서 제가 하는 치료의 방식은 알고 계신가요? 몸이 불편하시다면 전혀 움직이실 것 없고 그냥 가만히 누워만 계셔도 되는데요.”
“….”
“아니면 오늘 저녁이라도 좋습니다. 황녀님께서 몸이 나아지신다면 저녁에도 얼마든지….”
“그게….”
내리깐 눈을 열심히 굴리던 시종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국 불가하다는 말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예정된 날짜는 오늘이었는데 이렇게 어기다니.
허나 황족이 아프다는 데 별수 있나.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끝내고 성물을 얻어 떠나고 싶은 마음에, 나는 몸져누웠다는 황녀가 어서 회복하기만을 속으로 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