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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20)화 (120/134)

120화

- 약속드린 날짜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간단한 서신만 보내놓고 기약의 날까지 아무 연락도 없던 서제국의 황제측은 약속을 지켰다.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비싼 재료들로만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외양의 마차가 벨라야의 건물 앞에 섰다.

마차에서 내린 자는 서제국 황제가 이곳을 찾았을 때 옆을 지켰던 보좌관이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제의 수석 보좌관을 맡고 있는 베르거 백작입니다.”

“마법사입니다.”

“마차에 오르시죠.”

보금자리를 떠나 세상을 돌며 수행을 하는 마법사들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길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쯤은 서제국의 귀족답게 잘 아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를 대상으로 하는 일인데 가짜 신상 정보라도 급조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이름도 밝히지 않고 그저 마법사다, 라는 대답에도 그들은 별다른 트집을 잡지 않았다.

나와 로건, 벨라야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서 앞 마차로 간 보좌관이 대열을 출발시켰다.

“불안불안했던 2황자에게서 들려오는 소식이 없어 이상하다 여기고 있었는데 결국 사고를 치고 있었던 거라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벨라야가 말을 뱉었다.

동제국에서 사절단이 온다는 소식과 함께 사절단이 서제국을 방문하는 목적이 알려졌고.

그 덕분에 2황자가 동제국 수도에서 벌인 만행이 온 천하에 알려진 것이었다.

“벨라야가 꿈속에서 봤던 모습들은 다 실제 상황이었어요.”

“….”

“어떻게 될 거라 예상해요? 벨라야는 서제국 사교계의 분위기를 읽었을 거 아니에요.”

창밖으로 멀어지는 마을이 보였다.

넓게 트인 길로 들어서면서 느리게만 가던 마차가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내 물음에 잠깐 고심하는 표정을 짓던 벨라야가 입을 뗐다.

“2황자가 벌인 테러의 결과를 서제국 사교계는 명백한 실패라고 평가하는 것 같아. 수도를 들쑤셔놓긴 한 모양이지만, 동제국의 중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애지 못 했으니까. 동제국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몇 명한테서 나오는 거잖니. 수도의 인원을 좀 줄이고 귀족 몇 명 제거한 결과로는… 오히려 서제국이 동제국 황제가 쏟아낼 화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었을 뿐이야.”

“….”

“피에 미친 사람들처럼 전쟁을 외치던 강경파들도 하나둘 2황자와의 관계 정리를 시작하는 분위기고, 동제국에선 2황자의 양도를 요구한 모양이던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나. 어쨌든 2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은 이제 와해됐으니 그의 아버지에게 달렸다고 봐야겠지.”

거기서 대화가 정리되는 듯싶었으나, 그때까지 대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창밖에 보이는 행렬만 쫓던 로건이 말꼬리를 잡았다.

“서제국 황제가 자식을 내어주진 않겠지. 동제국은 그걸 알면서도 양도를 요구한 거야. 2황자를 넘겨받진 못 해도 서제국 황제는 자식의 양도를 거부하는 대신 더한 것들을 내어놓아야 할 테니까.”

“….”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 서제국 황제는 자식 사랑이 대단하다고 동제국까지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로건의 질문에 벨라야는 자못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식 사랑… 네, 대단하지만 자식마다 정도는 다른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저도 장담은 못 하겠습니다.”

벨라야의 말을 끝으로 순간이동 마법진이 있는 장소까지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이어졌다.

*

명색이 마법사인데 순간이동이 난생처음이면 안 되니까.

눈을 감으라는 로건의 귓속말에, 여러 명의 마법사들과 함께 마법진이 발동되는 장면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도착했어, 떠.”

이렇게 빨리?

귓가를 간질이는 그의 목소리와 더불어 낯선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물에 젖은 흙냄새와 마른 풀 냄새, 그리고 뒤이어 바다 내음이 흘러들어왔다.

습한 공기가 볼에 달라붙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뜨자, 너른 들판 위로 길게 자란 갈대들이 부는 바람에 몸을 이리저리 누이고 있었다.

어느새 한여름으로 옷을 갈아입은 쨍한 햇살이 속눈썹 밑으로 파고들어, 나는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앞머리에 눈을 찔렸다고 착각했는지, 로건이 말없이 내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

“초짜같이 굴지 마. 마법사가 아닌 거 티 나니까.”

“햇빛이 눈부셨을 뿐이거든요.”

“속은?”

“괜찮아요.”

마법진에 올라서기 전, 처음 마법으로 장거리를 이동하면 속이 뒤집힐 수 있다며 로건이 주의를 준 참이었다.

마법사가 순간이동에 토를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서, 토가 올라오면 씹어 삼키기라도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막상 아무렇지도 않으니 다행이었다.

“다행이네, 우웩.”

“…?”

괴상한 소리를 내며 등이 굽는 로건을 따라 내 시선도 아래로 향했다.

“괜찮으세요?”

“아, 네. 제 연인이 좀 약골이라서요.”

“하하, 그러시구나.”

보좌관 일행에게 오늘 아침 먹은 메뉴를 선보이는 로건의 등을 살갑게 두드리며 귓속말했다.

“나한테 괜찮냐고 묻더니만?”

“내가 안 괜찮아서 물은 거야, 망할 마법이동은 몇 번을 해도 속이 뒤집힌다고.”

“나한테 마법사가 아닌 티 내지 말라더니, 당신이야말로 마법사의 연인답게 좀 굴어 봐요.”

우리는 지금 마법사와 마법사의 연인을 가장하고 있었으니까.

시종이 건넨 물병을 받아서 입을 헹군 그가 입가를 문지르며 씩 웃음 지었다.

“정말 연인답게 군다, 너. 네 입으로 말한 거야.”

“….”

“자, 우리 마법사 일행분들, 사이가 좋은 건 알겠지만 날씨가 덥습니다, 더워요. 어서 마차에 올라타시죠. 저 앞에 보이는 궁이 별궁입니다.”

보좌관이 손짓하며 길을 재촉했다.

가을이 오기 전, 여름의 갈대밭은 아직 초록빛이었다.

몇 번이고 누웠다 일어서길 반복하는 갈대밭 너머로 얕은 언덕 위, 홀로 높이 선 하얀 성이 보였다.

*

벨라야의 저택에서 마법진까지, 마법으로 이동하고 다시 마법진에서 궁까지 마차로 이동한 끝에야 우리는 별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운이 다 빠져 별궁 입구로 향하는 돌계단을 터벅터벅 오르는데.

“잠시 검문하겠습니다.”

기사 한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검문? 검문을 한단 말은 미리 듣지 못 했는데.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몸수색을 하겠다는 말에 불쾌해진 기분으로 먼저 올라간 보좌관 일행을 바라보자.

“형식적인 검문에 불과합니다. 별궁을 출입하는 누구나 받는 일이죠.”

분위기가 굳어지지 않게 애쓰며 보좌관이 대답했다.

“감히 몸에 손을 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얕게 내뱉는 한숨으로 언짢아진 기분을 드러내며 서 있자, 기사가 긴 막대기 모양으로 조각된 크리스탈을 몸 가까이 댔다.

발끝부터 천천히 크리스탈 막대가 올라와 턱 밑에 다다랐을 때였다.

투명했던 크리스탈이 붉게 물들자, 막대를 든 기사의 경직된 시선이 내 목 언저리를 향했다.

“어….”

보좌관이 살짝 난감해 하며 물어왔다.

“혹시 마법 물품을 소지하고 계십니까?”

“저는 마법사입니다.”

“예?”

“마법사가 마법 용품을 소지하고 있는 게 문제가 됩니까?”

“아, 하하… 그렇죠. 마법사님이시니까.”

할 말을 찾지 못 했는지 잠깐 우물쭈물하던 보좌관이 말을 이었다.

“서제국은 마법사가 넘쳐나고, 그렇다 보니 누구든 쉽게 돈만 있으면 마법 물품을 구하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마법 물품을 이용한 황족 시해 시도 같은 사건들이 종종 발생하곤 합니다. 혹시 가지고 계신 물건의 용도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 외형을 바꿔주는 물건입니다.”

“외형이라….”

거짓말을 했다 걸리면 더 큰 오해를 살 수 있기에 솔직히 대답했다.

너넨 내 이름도 묻지 않았잖아, 내가 누군지 치료만 잘 해주면 상관없는 거 아니었어? 그럼 실제 외모가 어떻든 알 필요 없잖아.

고민하던 보좌관이 웃으려 노력하며 말을 꺼냈다.

“마법사님께서 별궁에 계시는 동안 저희가 잘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싫다면요.”

“지금 뭐라고 하셨는지.”

“별궁에 입궁하지 않는다면 물건을 반납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닙니까. 저는 제 물건을 반납할 생각이 없으니 별궁에 들어가지 않을 거고, 그럼 황녀님의 치료도 할 수 없게 되겠군요.”

이곳에서야 내 실제 외모를 감출 필요도 없고, 어차피 난 마법사로 통하고 있으니 순순히 목걸이를 벗어줘도 문제 될 건 없었지만.

늘 부적같이 차 온 목걸이를 왠지 벗어주고 싶지가 않았다.

“마법사들이 수행 중에 정체를 드러내는 일을 꺼린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요?”

“그거야, 그렇긴 합니다만….”

“….”

“저희도 늘 지켜왔던 원칙이 있는지라, 이거 참.”

그때,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로건이 귓속말을 속삭였다.

“어차피 상관없잖아, 누가 널 알아본다고 그래.”

“….”

“우린 황녀를 치료하고 성물을 건네받은 뒤 별궁을 뜨면 그만이야, 여기서 지내는 거 길어야 이삼일일 텐데. 그냥 잡음 없이 입궁하는 편이 나.”

“당신이나 후드 깊게 눌러 써요.”

사실 로건의 말은 틀릴 거 없는 말이었다.

오히려 누가 알아볼 걱정이라면 로건이 더 크면 컸지, 나야….

그렇지 않아도 로건을 알아보는 자가 있을까 싶어, 그에게 가발을 씌우고 깊게 후드를 눌러쓰게 한 참이었다.

그림자가 진 후드 안에서 로건의 변함없이 푸른 눈이 내 행동을 재촉했다.

그래, 별일 없을 테니까.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황태자 전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기사와 보좌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내가 뒤를 도는 것보다 목소리의 주인이 계단을 올라 내 옆에 서는 것이 더 빨랐다.

옆에 선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며 후드를 뒤집어쓴 채 가만히 서 있자, 시야로 느릿하게 사람의 고개가 들어왔다.

“당신이 그 마법사로군요. 아바마마께 전해 들었습니다.”

“….”

그는 2황자를 제치고 황태자의 자리를 거머쥔 자였다.

‘서제국의 황태자….’

아비의 피가 진하게 섞인 2황자와는 다르게 어미인 황비의 피를 더 물려받았는지.

짧고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에 남청색 눈동자를 가진 자였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는 남청색 눈동자가 모인 사람들을 하나씩 훑고는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입가엔 은은한 미소를 걸친 채였다.

“누가 마법사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겁니까.”

“….”

질문은 내게 했지만 대답이 들려온 곳은 저쪽이었다.

“아 전하, 그것이….”

“폐하께서 그대들에게 명한 내용은 제가 도착하기 전까지 마법사님을 별궁에 편히 모시라는 내용일 텐데요.”

“….”

“아니 그렇습니까?”

“….”

근데 왜 내 옆에 딱 붙어서 이래?

웃는 낯으로 보좌관과 그 일행을 질책하는 황태자는 내 옆에 딱 붙어선 그대로였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나를 쳐다보았다.

“별궁까지의 안내는 베르거 백작의 임무였으나, 별궁에서 지내실 동안 마법사님의 안전을 책임질 사람은 접니다. 미리 도착해 마중을 나왔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황궁에서 성물을 운반해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아… 네, 그렇군요.”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서제국의 황태자 헤란 세리에입니다.”

“….”

남자가 짓는 눈웃음에, 남청색 눈동자가 눈꺼풀 안으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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