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황녀를 치료하고 나면 제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마법사가 치료해줄 수 있는 아이의 수가 제한된 것이냐 하면, 마물화된 자들을 치료하는 일은 마법사의 몸에 굉장한 무리를 주는 일이라고 한다, 라고 소문을 퍼트려 왔으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잖아?
죽음이라는 단어에 미약하게 흔들렸던 황제의 시선이 다시 올곧게 나를 응시했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 눈빛이 진득했다.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아이들을 치료한 이유는 연민이나 동정이 아닙니다. 제 몸과 마법을 한계까지 시험해보기 위함이었죠. 제 몸은 이미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막내 황녀의 상태를 보지는 못 했으나, 제가 치료했던 아이들과는 그 정도가 다르게 심각한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
대답 없이 가만히 있던 황제가 천천히 눈을 끔뻑였다. 긍정이었다.
“그렇다면 전 거의 죽음에 다다르게 될 겁니다, 황녀를 치료하고 나면 말이죠.”
“….”
머리를 굴려봐, 황제.
넌 내게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잖아.
잘 생각해 보라구. 치료 마법을 펼쳐서 막내 황녀도 사람으로 되돌리고 내가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
네가 사는 서제국 황실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두었을 몇 가지를 떠올려 보란 말야.
지금 나한테 치료를 안 하면 죽이겠다는 협박 같은 건 안 먹힌다고.
“확실히….”
“….”
“마법사의 상황이 정말 그러하다면 내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군. 그렇다면….”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황제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멈췄을 때, 황제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솟구쳤다.
“내 제안을 수정하겠소, 마법사.”
말해라, 말해. 성물의 이름을 네 입에 올려.
“황녀를 치료 후, 번복의 묵주를 그대가 사용하는 것으로 하지.”
이거지! 티가 나지 않게 표정을 신경 쓰며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번복의 묵주.
마법이나 저주, 실행자가 행한 주문을 취소시켜주는 성물.
성물의 능력 자체로 보면 대단한 물건이었지만 사용조건이 까다로웠다.
첫째로는 반드시 주문을 행한 자가 성물을 사용해야만 취소가 된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저주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면, 내가 아닌 내게 저주를 건 상대방이 성물을 사용해줘야 저주가 풀린다는 얘기였다.
마법으로 공격하거나 저주를 거는 것은 원한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담아서 행해지는 것이니 애초에 사용자가 취소하고 싶어 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게다가 진심으로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해도, 저주를 걸었을 때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제물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번복의 묵주는 성물 중에서도 유독 사용빈도가 낮은 성물이었다.
“마법사라면 성물에 대해 알고 있겠지. 서제국 황실 마법사에게도 성물의 사용을 허락하는 경우는 흔치 않소.”
마법사라면 누구나 성물을 직접 사용해보는 일에 호기심을 드러낼 테지.
반가운 마음을 조금은 드러내며 물었다.
“물론 번복의 묵주를 사용한다면 제 몸은 치료를 행하기 전으로 돌릴 수 있을 테지만, 황녀도 치료되기 전으로 돌아갈 텐데요.”
우려 속 호기심을 드러낸 내 질문에 황제의 눈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아마 나를 낚았다고 생각 중이겠지.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가치 없는 제물을 쓴다면 성물의 효과는 실행자를 넘어 대상까지 미치지 못 할 테니까. 성물의 효과를 막아낼 실력 있는 마법사들도 황궁엔 넘치니까 쓸데없는 우려요.”
슬쩍 벨라야와 로건을 살폈다.
원하던 말이 내 입이 아닌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지금의 상황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로건이 제법이라는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마법사가 원하는 것은 마법을 계속 해나가기 위해 실행자인 본인이 계속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라 했지. 방금 내 제안으로 그 문제는 해결된 것 같은데 맞소?”
“맞습니다.”
“다행이군.”
톡톡, 고개를 기울이며 황제가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그럼….”
“….”
“치료해도 죽지 않는 것을 보상이라 할 수는 없으니 말이야, 원하는 보상을 적게.”
내 손에 들려 있는 종이를 바라보며 황제가 말했다.
무얼 적지, 계획에 없었던 보상이라 딱히 생각해둔 것이 없는데.
어차피 필요로 했던 성물을 받아내기로 했으니 더는 원하는 게 없었지만, 그렇다고 빈 종이를 건네면 그것 또한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지 모를 일이었다.
적당한 보상, 너무 하찮지 않으면서 황제가 기분 좋게 내어줄 수 있는 것, 음….
- 똑똑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보좌관이 문을 열었다.
들어온 남성과 보좌관이 시선을 교환했고, 남성은 그대로 황제에게 다가가 귓가로 얼굴을 가져갔다.
남성이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했지만, 익숙한 몇몇 단어는 가까이 있던 나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동제국, 사절단, 2황자….’
귓속말이 끝나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자신의 마법 외에는 관심이 없는 마법사니 말이야, 보상을 생각하는데 시간이 걸리겠지. 그 이야긴 천천히 듣지. 잠깐 자리를 비워주겠나?”
그 말을 끝으로 벨라야와 로건, 내가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
“그런 식으로 황제가 먼저 말을 꺼내게 할 줄은 몰랐어.”
“로건, 아까 들었어요?”
응접실을 빠져나와 성물과 서제국의 황실 상황을 미리 자세히 알려준 벨라야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로건의 옷자락을 끌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야길 꺼냈다.
“황제에게 전하는 귓속말을 몇 마디 들었는데, 동제국에서 사절단을 보낸 모양이에요.”
“그런 짓을 벌였으니… 폐하가 가만 계시진 않았겠지. 그분의 성격상 아마 서제국이 땅을 기는 수준으로 몸을 낮추지 않는다면 전쟁이야.”
“사절단에 합류해 돌아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음….”
로건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절단이 향하는 곳은 서제국 황실이 있는 수도일거야. 막내 황녀가 있는 별궁으로 가야하는 우리와는 동선이 겹치지 않아.”
“사절단의 대표는 나일일까요? 테러까지 당해놓고 이 위험한 곳에 그를 보낸다는 게 전 이해가 안 돼요.”
불안한 기색을 잔뜩 내비치며 토해내는 말에 로건은 싱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폐하는 상황판단이 어설픈 분이 아니야. 아마 서제국이 전쟁을 불사하기 보다는 꼬리를 자를 거라고 추측하신 거겠지. 확실히 서제국은 지금 전쟁 의사가 전혀 없어. 황제는 노쇠했고 황태자로 즉위한 황비 소생의 3황자는 아직 전쟁을 이끌만한 능력도 경험도 부족하니까. 전쟁을 이끌 장수도 없는데 전쟁을 하려들지는 않을 거야, 불 보듯 패배가 뻔해. 한 가지 미지수가 있다면….”
“….”
“동제국에서 테러의 배상과 함께 주모자의 처벌을 요구할 텐데, 서제국 황제가 어디까지 받아들일지는 모르겠군.”
*
뜨거운 햇살에 계속 노출된 상태로 달리는 마차 안은 공기가 후덥지근했다.
들러붙기 시작하는 검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일은 돌돌 말린 붉은 두루마리를 무릎 위에 펼쳤다.
“잠적이라….”
“….”
“야, 역적. 어떻게 생각해?”
나일의 물음에, 내내 반대편 창 너머로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 있던 알렉스가 고개를 돌렸다.
살짝 일그러트리는 미간이 불쾌함을 내뿜고 있었다.
“….”
“황자가 부르는데 대답도 없네, 우리 역적은? 불만이 있다면 언제든 살려놓기 전으로 되돌려줄 테니까 말만 해.”
“….”
저 녹색머리 놈의 목숨을 붙어있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제들이 매달려 신성력을 부어댔단 말인가.
보고 있으면 여간 속이 아니꼬웠지만, 그래. 이미 살린 것을.
뒤틀리는 속을 가라앉히며 나일은 펼친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어 내렸다.
- 동제국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2황자 테오 세리에의 잘못은 인정하지만 그가 지금 잠적해 서제국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 하는 상태니 다른 방법으로 배상하겠다.
‘행방이 묘연하다라.’
동제국에서 요구한 배상에 대한 서제국의 이 답신의 내용이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서제국은 이번 테러를 2황자의 단독 범행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래봤자 보상을 피할 길은 없었지만, 2황자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대는 것인지, 정말 그가 잠적해 행방이 묘연한 것인지 이쪽에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나마 단서가 나올만한 데가 있다면 저놈인데.
“역적, 어떻게 생각 하냐고. 2황자가 어디로 숨어들었을 것 같은지 말해라. 너랑 2황자랑 친구잖아.”
친구라는 말에 놈이 또 눈썹을 움찔거렸다.
건방진 자식.
“친구 아니라고 몇 번을 말 합니까.”
“아, 그랬었나. 그럼 정정하지. 야, 역적 겸 졸개. 2황자가 잠적했을 만한 곳을 말해라.”
“저는 그 자와….”
“신중하게 말해. 그 x끼가 있는 곳에 피비가 있을 확률이 크니까.”
“….”
피비라는 이름을 올리자마자 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것조차 심기를 거슬리게 했지만, 사라진 2황자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놈이니 만큼 그를 찾는데 도움이 될 거란 게 나일의 생각이었다.
“요구를 들어주는 대가로 제게 약속한 영지가 있었는데, 그곳에 뭘 가져다 놨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테러가 성공하면 그곳에 가서 물건을 가져온다 어쩐다 말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고, 실패한 후에도 그 물건이 필요 있는지도 알 수 없죠.”
만약 2황자가 테러를 위한 준비를 그곳에서 했다면, 테러가 실패했다 쳐도 적어도 한 번은 그곳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테러가 성공했다면 그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실패했다면 장소를 정리하고 흔적을 지워야 할 테니까.
“이 자가 말한 곳으로 간다.”
마차 창문 가까이 다가와 나일의 명을 받든 기사가 대열의 선두를 향해 달려갔다.
길고 긴 행렬에서 그들이 탄 마차와 소수의 인원이 이탈하자, 알렉스가 멀어져가는 행렬을 보며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리베르 전하는 동제국의 사절단 대표가 아닙니까?”
“누가 그래, 나 사절단 아냐.”
“….”
“우린 피비를 찾는다, 그리고 2황자를 처리할 수 있으면 좋고.”
“….”
알렉스는 제 배를 바라보며 다쳤던 곳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이니 아직 완치가 덜 됐더라면 통증이 있었을 텐데.
죽음을 직감했던 순간, 저를 바라보던 피비의 엉망이 된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듯 했다.
알렉스는 조용히 제 안쪽 볼 살을 깨물었다.
“저를 왜 살린 겁니까. 전하의 말대로 저는 역적인데요.”
“피비가 그러길 원하는 것 같아 보였으니까.”
“….”
“나야 네가 어떻게 죽든 상관없는데 말야, 그녀는 네가 살길 원하는 것 같았어. 사실 그 점 때문에 널 죽여 버리고 싶기도 해. 갈등 중이랄까.”
“….”
“그러니 널 살린 건 피비라고 보는 게 맞겠지. 그러니까 목숨을 빚진 만큼 도움이 되도록 해.”
“찾지 말라고 해도 피비를 찾을 겁니다. 저 역시 피비를….”
아, 진짜 짜증나는데 그냥 죽일까.
인상을 와락 구기며 나일이 알렉스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역적, 한번만 더 피비라고 부르면 다시 지옥으로 돌려보낸다.”
“그럼 피비를 피비….”
“예비 황태자비라고 불러, 알겠냐?”
“….”
다시 조용해진 마차 안에서, 제발 찾아낼 때까지 무사해 달라고 나일은 신에게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