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어디 소속인지는 상관없어요.”
상관없다니?
막 움직이려는 로건의 손을 붙들었다.
벨라야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당신들의 소속이 서제국이건 동제국이건 그건 아무 상관도 없어요. 내게 중요한 건, 당신이 내가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 또한 당신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돌아본 그녀의 눈빛은 간절했지만, 나는 너무나 당당히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거라는 벨라야의 말이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뭘 원하지는 알지도 못 하면서 도울 수 있다는 말을 잘도 하는군요.”
“맞아요. 난 당신들에 대해 잘 모르죠. 당신들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온 건지 전혀 알지 못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추측할 수 있어요.
당신들이 동제국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언젠간 동제국으로 돌아갈 거라는 것을요. 하지만 단둘이서 서제국을 가로질러 국경을 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요? 내가 도울 수 있어요. 빠르게 국경까지 한 번에 가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요.”
국경까지 한 번에.
그 방법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우리가 동제국에서 왔고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저 말이 진실일까?
진실이라면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라 생각했다.
서제국을 이리저리 헤매며 시간을 낭비할 바에야, 여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빠르게 국경까지 가는 게 훨씬….
그때, 로건이 귓속말을 속삭였다.
“흔들리지 마. 국경까지 한 번에 보내줄 수 있다고? 이런 촌구석에 그런 게 가능한 거물이 있을 거라 생각해? 저 여자를 봐, 거물로 보여? 원하는 것만 취하고 버릴 생각으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거야.”
“….”
“우린.”
“로건, 잠깐만요.”
여자에게 거절의 말을 건네려는 로건을 제지했다.
내 입에서 다음 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벨라야는 입술이 마르는 모양인지 몇 번이나 입술을 적시고 있었다.
“당신이 우리에게 바란다는 도움이 무엇인지, 또 국경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뭔지 설명해요.”
“이봐, 너.”
“시간이… 우리에겐 생각보다 시간이 없을 수 있어요. 로건.”
“….”
그게 무슨 말이야? 라는 눈빛으로 로건은 날 바라보았다.
내게 남은 시간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적을 수 있다는 얘기예요.
그런 예감이 든다구요.
그러니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나일에게 갈 수 있다면 모험을 하는 쪽에 걸겠어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대화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느꼈는지, 차분히 우리를 기다리던 벨라야가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서제국의 2황자가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전쟁이 나면 국경을 넘긴 더더욱 힘들어 지겠죠. 그러니 서로 도운 후 빨리 동제국으로 떠나는 게 당신들에게도 좋은 일이라 생각해요.”
잠깐만 저 말은….
“전쟁이 끝난 지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또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구요? 더 설명해 봐요.”
“지난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서제국 사람들은 전쟁만큼이나 질질 끌어오던 황태자도 정해질 거라 예상했어요. 그리고 다들 황태자로 2황자를 점쳤죠. 그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오히려 세력 구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어요. 빌론에서 제국의 황자로서 걸맞지 않은 일을 저지른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졌기 때문이에요.”
‘그 일이다.’
2황자가 종전 협상을 위해 빌론에 왔을 때, 1거처와 3거처에서 벌였던 추악한 만행이 드러난 거야.
이어진 벨라야의 말에 따르면, 그 일을 계기로 2황자가 감춰왔던 죄질이 무거운 행적들이 모두 까발려졌다고 했다.
때문에 그 이후로 2황자는 거듭해 추락의 길을 걸었고, 끝내 황태자로 책봉된 것은 황후가 아닌 황비 소생의 3황자였다고.
“굳어진 권력의 판도를 뒤집기 위해서 2황자가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는 소문이 오래 전부터 계속 있어왔어요. 황실의 대부분이 온화한 성품을 가진 황태자를 지지하지만, 아직도 강경파 중에서는 2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으니까요.”
소문이 아니라 정말 일으켰죠, 2황자가.
원작에서의 단순한 테러가 왜 이렇게 커진 건지 그렇지 않아도 의아했었는데, 그제야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정말 전쟁을 일으킬 생각으로 테러를 한 거였다니.
‘이 여자, 허풍이 아니야.’
여자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리고 꽤나 서제국 황실 상황에 밝은 자이기도 했고.
로건을 바라보니, 그도 한층 더 진지해진 눈빛으로 벨라야의 말을 듣고 있었다.
“좋아요, 상황은 알겠어요. 그럼 방법은 뭐죠.”
“국경까지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순간이동 마법진이 있어요. 동제국과 전쟁 중에 군의 수뇌부가 쓰던 거죠. 난 그 위치를 알고, 장치를 가동시킬 마력을 부어줄 마법사들을 동원할 수 있어요.”
구미가 당기는 소식이었지만 한 가지 찜찜한 것이 있었다.
나는 소파 한 구석에서 잠들어 있는 아기를 가리켰다.
“마지가 한 말에 따르면, 저 아기는 제게 치료 받기 전 마법사도 사제도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았어요. 당신은 아이들을 아끼는 사람 같은데, 당신이 그리 쉽게 마법사들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저 아기는 어째서 지금까지 마법사를 만나보지 못한 걸까요.”
“….”
벨라야는 맞닿아 있던 눈동자를 내리깔며 웃음 지었다.
“당신은 신중하고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로군요.”
“….”
“당신의 말처럼 나는 이 아이들을 아낍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아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마법사들을 불렀죠.”
“그럼 왜 마지는.”
“유명한 마법사들이 하나 같이 자신의 능력으론 치료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빼앗기는 싫었어요. 잔인하잖아요.”
“….”
“그러니까.”
벨라야가 천천히 내렸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발 도와주시겠어요? 동제국의 이름 모를 마법사님. 당신이 마지막 희망입니다.”
내게 닿았던 아기를 바라보았다.
오동통한 볼살이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 저 아기와 같은 증상을 가진 아이들이 몇이나 더 있는 걸까.
아이들을 다 치료해도 난 괜찮을까.
“….”
가만히 서 있는 내 손을 로건이 문 쪽으로 잡아끌듯 이끌었다.
손을 꾹 잡아 쥐는 그의 힘을 느꼈다.
“하죠. 거래.”
*
벨라야는 자신을 남작 부인이자 보육원의 소유주로 소개했다.
이곳에 머물 동안 쓰라며 그녀가 마련해 준 공간을 살피는데, 로건이 동의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라고 한 적 없는데요.”
“노크했어.”
“….”
딱 봐도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들어선 남자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이 갔기에, 살피던 침대를 계속 보는데.
로건은 내가 제게 관심을 주든 말든 상관없다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그가 내 팔뚝을 잡고 몸을 거칠게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괜찮아?”
“네. 멀쩡해 보이지 않나요?”
“….”
벨라야와 낮에 한 명, 저녁에 한 명을 치료하기로 거래했기에, 아이 한 명을 치료하고 방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마에 맨손을 데려던 로건이 움찔하며 손을 내렸다.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아.”
“몸에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걱정되면 영험한 보약이라도 구해다 주든가요.”
분위기가 가라앉는 걸 원치 않았기에.
농담조로 가볍게 받아넘겼지만 어째선지 로건의 낯빛은 어두워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좋아, 그럼 몸에 좋은 사람을 내가….”
“이봐요.”
아마 로건의 그 말은 농담이라기 보다는 진담에 가까운 말이었겠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깔깔거리며 웃는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은 웃을 듯 말듯 복잡해 보였다.
“진심이야, 왜 자꾸 네게 안 좋은 쪽으로 결정하는 거야.”
“아하하, 우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쉽고 빠른 방법이 있다면 그걸 택하는 게 맞는 거잖아요.”
“웃지 마.”
로건은 어느새 딱딱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저런 명령조의 말이 참 무서웠는데.
“왜 그렇게 잔뜩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하는 거예요. 우리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우리 사이 잊은 거 아니죠?”
나는 나름 웃으라고 한 소리였는데, 그에겐 전혀 웃긴 말이 아니었나 보다.
그가 미간을 길게 좁혔다.
“알아, 누구보다 잘 알아.”
“그럼 나 쉬게 이제….”
“근데 네가 그런 식으로 웃으면….”
“….”
하려던 말을 까먹은 사람처럼 로건은 한동안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엇이 그리 거슬리는지 눈썹을 까닥거리던 남자가 이내 벌어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너를 건강한 상태로 나일에게 데려가야 하니까.”
“어디 한 곳이 부러져도 저주를 없애는 덴 상관없다면서요, 살아있기만 하면.”
“….”
“걱정 말아요. 살아서 갈 거니까.”
입꼬리를 끌어올리려 애쓰며 남자의 팔뚝을 가볍게 쳤다.
무거워지는 분위기가 싫었던 것뿐인데, 그런 내 행동이 싫었는지 로건이 거칠게 내 팔을 잡았다.
그나마 사이가 좀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자식 또 왜 이러는 거야.
“아파요.”
얼마나 억세게 팔을 쥐는지, 뻐근함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구긴 미간 위로 로건이 제 뜨거운 손바닥을 올렸다.
순간, 그의 생명력이 이마를 타고 빨려 들어오는 느낌에 놀라 몸을 뒤로 물린 건 나였다.
“뭐하는 거예요?”
“…너를 건강한 상태로 나일에게 데려가야 하니까.”
맛이 간 로봇처럼 로건은 좀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고는 방을 나섰다.
저 놈이 왜 저러지. 아픈 건 본인 같은데?
*
저녁 식사 후 방으로 배달된 것이 달콤한 디저트뿐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디저트를 들고 서 있는 아이의 상태는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
치료했던 아기처럼 얼굴의 반이 마물의 상태였는데, 조금 더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한쪽 눈마저 마물화가 진행된 상태라, 길게 찢어진 파충류의 눈이 도륵도륵 굴렀다.
말없이 디저트를 든 아이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남자아이가 수치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람의 눈은 수치심이 어려 바닥으로 향하는데, 마물의 눈은 여전히 감정을 모르는 빛깔로 데굴데굴 움직이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아이에게 수치심을 주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고 시선을 거뒀다.
“맛있겠다. 들고 온 디저트 이름이 뭐야?”
“판나코타에 블루베리 콩포트를 올린 디저트래요.”
“그렇구나, 그럼 네 이름은?”
“브로도요.”
“브로도… 옆에 와서 앉을래?”
조용히 곁으로 와 앉는 남자아이는, 마물로 변한 쪽을 보이기 싫은지 비스듬히 앉아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벨라야 할머니에게 설명을 듣고 온 거니?”
“네. 정말 저도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나요?”
“…그럼, 그렇고말고. 자 그럼 손을 줄래?”
조심스레 내미는 손을 바라보며 장갑을 벗으려던 찰나에.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