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건물 안에 들어서자, 이제껏 우리를 안내했던 남자들의 역할은 끝난 모양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 곁을 떠났고, 대신해서 안내자의 바톤을 이어받은 건 익숙한 얼굴이었다.
“마지?”
“마법사님!”
반가운 얼굴로 어제의 그 여자아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내게 매달린 아이의 눈시울이 금방 붉어졌다.
“제 동생, 발가벗겨서 살펴봤는데 괴물의 자국이라곤 이제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살이 정말 다 깨끗해서… 흑,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
눈물로 전해오는 감사 인사였지만, 알겠다, 괜찮다, 이런 한마디 없이 그저 당황스러운 얼굴로 듣기만 하고 서 있자.
여자아이가 알아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너는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것부터 말해줄래.”
“아, 그게….”
내리까는 눈꺼풀에서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느껴졌다.
“다른 이들에겐 말하지 말라고 했던 점, 잊은 건 아니겠지?”
“정말 그러려고 했는데요.”
“….”
말없이 옆에 서 있는 로건의 시선을 받았다.
그의 얼굴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너무 뻔해서 지루하기까지 하다는 표정이었다.
“…좋, 좋은 능력은 나누라고 있는 것 아닌가요? 한두 명 더 치료한다고 마법이 닳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아이는 제 이기심을 똑똑히 밝혀왔다.
차라리 그런 되지도 않는 변명거리를 꾸며내지 않았다면 기분이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가지는 않았을 텐데.
그저 약속을 지키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 해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면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어제 네게 아무런 대가 없이 마법을 베푼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 하나를 믿고서 한 일인데. 네가 먼저 그 약속을 어겼으니 나도 네게 대가를 받아야겠구나.”
“네? 하, 하지만 그럴만한 돈은….”
“돈이 없어? 그럼 내가 어제 행한 치료 마법을 되돌려야겠구나. 나는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에도 능하거든.”
“허, 헉. 자, 잘못했어요. 마법사님. 흑흑. 제발 그러지 말아 주세요.”
로건의 말처럼 된 것이다.
아이를 도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그걸 당연시 여겼으며, 이곳으로 불려온 것을 보면 나와의 약속 따위는 발로 차버린 것일 테지.
여관을 나설 때만 해도, 동생이 다 나아서 기뻐하는 이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여겼었는데.
지금 내 앞에서, 먹었던 것을 뱉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아이의 얼굴은 두려움에 질려있었다.
“됐어, 괜찮아. 뻔한 일로 화내지 마.”
“….”
로건이 나를 다독였다.
크게 달라진 내 눈빛과는 다르게, 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젯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야 너. 그래서 누구한테 말 한 건데. 이런 곳에 사람 써서 불러올 정도의 사람이면 네가 우릴 부른 건 아닐 거 아냐.”
“…그게.”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에 능하다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모양인지, 아이는 내 눈치를 슬슬 살폈다.
“제대로 말 안 하면 내 예비 신부가 네 동생을 정말 치료되기 전으로 돌려버릴지도 몰라. 한다면 하는 여자거든.”
“마, 말할게요! 그것만은 제발.”
예비 신부라는 말에 눈을 흘기자, 로건은 짓궂게 웃었다.
“우리 여기서 그렇게 알려져 있잖아?”
“저 안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벨라야 할머니를 만나실 수 있어요.”
“그래? 알았다.”
“그, 그럼 제 동생은….”
“아, 네 동생?”
장갑 낀 내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면서 로건은, 아이를 향해 실로 야비하게 눈웃음 지었다.
“아마 괜찮지 않을까? 내 예비 신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
신뢰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미소에 아이의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
“실망하지 마.”
“….”
“마음 아플 것도 없어.”
안쪽 공간으로 가는 복도에서 로건이 연이어 말을 건넸다.
그는 계속 어둡기만 한 내 낯빛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아까 일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왜 그래.”
마치 각성제를 과다 복용한 것처럼 심장의 두근거림이 거셌다.
얼마나 세게 쿵쿵거리는지 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왜 이러지.’
심장의 방망이질은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부인, 모셔왔습니다.”
우리를 방 앞까지 안내한 하녀가 안쪽에 말을 고하자.
“들어오세요.”
들려온 목소리는 언뜻 듣기엔 자애로운 노년 여성이 예상되는 목소리였다.
하녀가 열어주는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나이가 지긋이 든 금발의 여성이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 아기다.’
할머니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는 아기는, 얼핏 보기에도 어젯밤 만났던 그 아기였다.
“….”
사람을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반강제로 끌고 왔으면, 오자마자 데려온 이유부터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한껏 놀란 갈색 눈동자로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였다.
로건을 가볍게 스캔하고 난 여자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상하리만큼 강렬한 그 시선에 사로잡혀, 나 역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서서 나를 향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기 바빴다.
‘어?’
저 할머니, 지금 눈에 눈물 고인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여자가 입을 뗐다.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여기 앉아요.”
여전히 잠든 아이를 품에 소중히 안고서 여자는 우리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 자리에 앉으면 우리가 여기까지 영문도 모른 채 와야 했던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화가 날만 해요. 설명할 테니 앉아주겠어요?”
내 볼멘 목소리를 누그러트리듯 미안함 가득한 표정이었다.
내 기분이 상했다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그녀가 재빨리 차를 권했다.
“먼저, 이유도 잘 알려주지 않고서 와달라 생떼 부린 것 미안해요, 그리고 와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
나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심장을 짓누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저 여자다, 내 심장이 이렇게 뛰는 이유는 저 여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건은 옆에서 별말 없이 상황을 관망할 뿐이었다.
수틀리면 뒤엎어 버리겠다는 눈빛으로.
“꺄아.”
의자 끄는 소리에 잠에서 깬 아기가 나를 향해 팔을 뻗자, 벨라야 라는 이름의 여자가 내게로 아기를 건네려는 듯 상체를 기울였다.
“아기가 숙녀분에게 가길 원하네요. 안아보시겠어요?”
“아뇨.”
“아….”
차가운 거절에 그녀는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그러나 품에 안지 않아도 뽀얀 아기의 얼굴이 보였고, 나를 향해 꺄륵거리며 눈웃음 짓는 아기를 다시 보니 좋았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시선을 던지고 있자,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브래들리랍니다. 브래들리가 굉장히 똑똑해요. 그래서 지금도 은인을 바로 알아보고 좋아하네요.”
“….”
“아이의 불치병을 치료해주셨다 들었습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어요.”
평소 같았으면 진심을 담은 인사에는 정중한 태도로 반응을 보였겠지만.
“그럼 우리는 당신의 감사 인사를 듣기 위해 여기까지 끌려 온 게 되는 건가요?”
가슴은 계속 뛰어댔고, 가장 중요한 우리가 이곳에 와야 했던 목적을 뒤로 미루는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히 불쾌감을 숨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
“저희가 원하는 건 이곳에 왜 와야만 했던 건지에 대한 답인데, 언젠가는 말씀을 해주실 거라 생각하지만 그 언젠가가 굉장히 늦게 올 것 같군요. 기다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일어나죠.”
로건은 생각보다 내가 꽤 강경하게 나온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씩 웃으며 나를 따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모양이군요.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마법사님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충분히 예상했던 시나리오였기에, 내 대답은 곧장 나왔다.
“무슨 일이건 간에, 저희는 도움을 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얘기가 끝났군요. 갈 길이 바빠서요.”
말을 마치고 뒤를 돌았다.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데, 뒤에서 여자의 급박한 음성이 따라왔다.
“마법사님은 어디 소속 마법사시죠?”
“….”
뒤에서 들려온 그 말에 로건과 내 시선이 교차했다.
차분하게 생각하자, 저건 함정이다.
눈에 뻔히 보이는 함정을 밟아줄 필요는 없어.
“수행을 나온 마법사가 제 정체를 드러내는 일을 좋아하던가요? 그렇게 알고 계신다면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실례되는 질문을 더 받을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적어도 마법사님은 황궁 소속은 아니실 겁니다.”
“….”
너무도 확신에 찬 말이었다.
그 말이 내 발목을 묶었다.
무슨 이유로 저렇게 확신하는 거지?
벨라야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서제국 황실 소속 마법사라면 왜 아직도 서제국의 막내 황녀가 괴물 신세일까요. 황궁 소속 마법사 중에 마물로 변한 사람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럼 제가 황궁 소속이 아닌 거겠죠.”
서제국의 황녀가 마물로 변했고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신세라고?
깜짝 놀랄만한 소식에 조금 동요가 일긴 했으나, 그게 이곳에 남아 저들을 도와줄 이유는 되지 못 했다.
나는 하루바삐 동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몸이라고.
어린 황녀가 마물이 된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여기 남을 이유는 되지 못 해.
황궁 소속이 아니라는 답을 마지막으로 정말 방을 나서려 했을 때였다.
“그럼 당신은 어느 소속 마법사입니까? 혹시 서제국 소속이 아닌 것은 아닙니까?”
“….”
“어느 집단이건 관계없이, 서제국은 막내 황녀를 되돌리기 위해 서제국의 모든 마법사 단체에 의뢰를 넣은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마법사도 사제도 막내 황녀를 인간으로 되돌리지 못했죠. 헌데 당신의 얼굴은 마치 이 소식을 처음 듣는 사람의 얼굴 같네요.”
아니 나 뒤돌아 있는데 얼굴 보이냐고….
서제국의 마법사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을 너는 모르는 것 같구나.
이 다음에 나올 질문은 하나였다.
“혹시 동제국 소속인가요?”
“….”
올 것이 왔구나.
시선을 내리자, 로건이 주먹을 꽉 쥐는 모습이 보였다.
곧 그의 손에서 냉기가 풀풀 올라올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어쩌지, 끝까지 잡아떼야 하나.
아니 잡아떼기엔 너무 멀리 온 거 같은데.
동제국에 가기는커녕, 동제국까지 한 걸음도 가까워지지 못 했는데 바로 정체가 들통 날 위기라니.
위기가 너무 빨리 온 거 아니냐구.
로건이 내게 시선을 보냈고, 그 의미를 알아챈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좋게좋게 끌고 가기엔 늦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