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나일이 어렸을 때.”
가장 소중한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 그의 말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평소 차갑고 무뚝뚝하기만 한 로건의 목소리가 눅진해져 있었으니까.
“난 곱상하게만 생긴 그 자식이 싫었다. 거기다가 뭔 저주가 달려있다고 하질 않나. 할아버지까지 내가 그놈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니까, 더 싫었어. 어찌나 잘 우는지 등신 같은 새x라고 생각했지.
제 역할을 다 한 황제의 치료제를 죽이는 일은 내 아버지 담당이었는데. 그러니까 지금의 너와 나 같은 관계지. 바보 같은 인간이 방심한 건지, 죽이질 못 한 건지. 치료제를 죽이러 갔던 남자가 자신이 죽어서 돌아왔어.
나는 그때까지도 나일이 그저 그랬어, 오히려 더 싫어졌달까. 왜 내 아버지가 그 자식 아버지를 위해 원치도 않는 일을 하려다가 그렇게 된 건지. 이해하기 싫었으니까.
근데 그 자식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온 거야. 황제의 손을 잡고서 딱 봐도 겁 많아 보이는 눈망울을 해가지고. 귀족가의 장례식이 대부분 그렇지만 울고불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거든. 엄청 엄숙한 분위기니까. 가끔 귀부인들이 슬픔을 감당 못 해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곳엔 나랑 할아버지뿐이었으니까.
나야 할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우는 건 귀족답지 못한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서 꾹꾹 참고 있었고. 장례식장을 방문한 다른 사람들이야 뭐,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아버지랑 친분이 있던 사람? 없었던 건지 내가 어려서 몰랐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장례식장 분위기는 정말 조용했어.”
똑바로 누워서 로건은, 천장에 시선을 둔 채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근데 나일이 갑자기 나를 보더니 엄청 큰 소리로 우는 거야. 장례식장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다 우리 쪽으로 쏠렸지. 아 이 등신 같은 새x.
사람들 시선도 낯뜨겁고, 괜히 그 자식 때문에 나도 눈물이 나올 거 같더라고. 그래서 무작정 나일을 이끌고 장례식장 뒤로 갔어. 나일이 아마 그때 우리 또래 중에서 가장 작았을 걸? 근데 그 작은 놈이 거기서 엄청 크게 우는 거야.
야! 당장 울음 그치라고, 네가 왜 우냐고 악을 썼는데. 평소 같았으면 좀만 소리 질러도 냅다 쫄던 놈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울더라.
근데 계속 우니까, 우는 걸 보고 있으니까 내 기분이 점점 이상해지는 거야. 볼 때마다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울음이었는데, 역시나 바보처럼 얼굴을 다 일그러트리면서 우는데, 내 기분이 살 것 같았어.
그제야 막혀있던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난 그때도 걔보다 키가 더 컸는데, 나일의 품에 안겨서 울었어. 아이씨, 창피하게 정신없이 울고 보니까 그 자식 품에 안겨 있더라고.
그때 생각했다. 이 아이를 위해 살아야겠구나, 할아버지 말이 맞구나 하고. 이 아이를 저주에서 지켜내야지. 그게…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일일 줄은 몰랐지만.”
“….”
아무 죄 없는 사람, 그 말이 유독 또박또박 들려왔다.
그래서 넌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니까 네게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라는 말도 아니었고.
죽이려 해서 미안하다는 작은 사과 한마디 덧붙이지 않았는데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뒷말을 덧붙이지 않는 걸 보면, 로건의 결심은 그대로일 것이었다.
무사히 함께 황궁으로 돌아가면 그는 여지없이 그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려 들겠지.
사정 있는 개새x라고 해서 개새x가 아닌 건 아니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려버린 감정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왜 개새x 마음에 공감하고 난리야 나?
그가 눈치챌까 봐 베개에 더 깊게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니까 결국 너나 나나 우는 모습에 넘어간 거네. 하여튼 잘 운다니까 그 자식은.”
나일을 비웃는 그 말에 울음을 삼키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이씨, 저놈 말에 웃어주다니. 짜증 나.
“너 때문에 웃은 거 아냐. 나일이 생각나서 웃은 거야.”
“그래, 알아. 그리고 한 가지 더.”
“…?”
“그 목걸이 항상 하고 있기엔 부담스러운 거 아닌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짚었다.
무슨 말이냐며 모른 척을 하기엔, 이미 뻔히 다 알고 있다는 말투여서 시치미를 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내가 치료제라는 것부터 다… 어떻게 안 거야?”
“나일이 늘 데리고 다니는 시종. 알레나 멘데랑 네가 납치되었을 때, 내 수중엔 둘의 얼굴을 확실히 아는 자가 없어서 시종을 끌고 갔었거든. 넘겨짚었을 뿐인데 술술 불더라고.”
하, 그분 그렇게 안 봤는데 입이 가벼운 분이었구나.
- 똑똑
그때 로건이 팔을 쭉 뻗어 내 침대를 두드렸다.
“알고 있으니까 빼고 자라는 말이야.”
“됐어. 상관 마.”
“그렇다면.”
그는 짧게 대답했고, 그날 밤 더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
우리는 아침 일찍 짐을 쌌다.
원래는 이곳에 며칠 더 머물 예정이었지만, 어제의 일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마을을 뜨자고 하는 로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더 남아 마을을 조사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이 마을로 소환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은 내 추측일 뿐이었으니까.
그저 근거 없는 감에 의해서 마을에 더 머물자고 고집부릴 수는 없었다.
“어머, 벌써 떠나?”
처음 봤을 때부터 말이 많던 여관 주인은 끝까지 말이 많았다.
“예. 그렇게 됐습니다.”
“왜~ 어제 온 거 아니었어? 우리 마을에 별로 볼 게 없나?”
“그렇게 됐습니다.”
“….”
대놓고 싫은 티를 내는 로건을 옆으로 밀어내며 여관 주인에게 물었다.
“어제 저희를 안내해줬던 마지라는 종업원은 안 보이네요?”
“마지는 오늘 일을 안 해.”
“아….”
깨끗해진 동생의 얼굴을 보고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겠지?
딱히 감사 인사를 받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웃는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긴 했는데.
“잘 묵다 갑니다.”
*
여관을 떠나서 우리는 서제국의 수도로 향한다는 한 상인의 짐마차에 올라탔다.
로건이 입고 있던 제복에 달린 장신구를 한 개만 팔아치워도 이런 짐마차를 얻어 타는 게 아닌 번듯한 말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이런 작은 마을에서 제값도 못 받고 파느니 큰 마을에 가서 파는 게 더 이득이란 판단이었다.
귀족들한테야 늘 말이나 마차로 이동하는 게 일상이지만, 평민들은 짐마차를 얻어 타고 이동하는 게 더 흔한 일이기도 했고.
“서비스다 서비스. 복숭아 한 개씩 골라 집으라고.”
짐마차엔 농작물과 복숭아가 든 상자들이 가득했다.
상인은 인심 좋은 얼굴로 복숭아가 든 상자를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아직 실어야 할 물건이 다 오질 않아서 좀 기다려야 하는데, 금방 올 거야!”
“예, 아저씨.”
상인의 권유에 복숭아를 하나 집어 들긴 했지만 먹을 수가 없었다.
손바닥에 복숭아를 올리고서 빤히 바라만 보고 있자, 로건이 물어왔다.
“되게 먹고 싶은 표정으로 안 먹고 있는 건 무슨 짓이지?”
“복숭아에 털 났잖아요.”
“털?”
“이거요. 복숭아 껍질에 난 털.”
“하, 기다려 봐.”
피식 웃더니 로건은 복숭아 두 개를 손에 들고 짐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어디까지 뛰어가는 거야.’
복숭아를 들고 뛰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자들 틈으로 몸을 구겼다.
상자들이랑 같이 덜컹거리는 짐마차에 실려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엉덩이가 아픈 느낌이었다.
‘저 건초 더미를 깔고 앉으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짐마차 구석에 잔뜩 쌓인 건초 더미를 몇 개 내려 방석을 만드는데, 저편에서 몇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묻겠습니다.”
“…?”
“사람을 찾고 있는데,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젊은 남성과 갈색 머리카락에… 녹안을 가진 여성….”
“….”
내 외형 정보를 읊으며 나를 훑어 내리는 남자의 시선에 의심이 깃들고 있었다.
‘자경단인가?’
짐마차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세 명의 남자는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군인으로 보이진 않았다.
제대로 된 군복을 갖춰 입은 게 아닌, 각자 제멋대로의 복장이었다.
아무리 봐도 지역 치안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꾸린 자경단원이었다.
‘무엇 때문이지, 설마 약초꾼 일이 발각된 건가?’
로건이 일을 허술하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쩌지. 맞다고 해? 아니면 아니라고 부정해? 하지만 마땅한 변명이 없는데….
“혹시 일행이 벽안에 은발 남자 아닙니까?”
“….”
“무슨 일이시죠?”
하아.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 거리는데, 저 멀리서 로건이 하얗게 속살을 드러낸 복숭아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들의 시선이 나와 로건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두 분 마차에서 내려주시죠.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
*
“어떡할래.”
“뭘 어떡해요.”
세 남자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로건이 속삭여 왔다.
“우리가 끌려갈 일이 뭐가 있어, 그 일밖에 더 있어?”
“….”
그래, 그 일밖에 더 없지. 그래서 문제지.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냐,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 물었지만 남자들은 따라와 달라는 말 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묵었던 여관을 지나쳐 그들은 우리를 마을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기다려 봐요.”
“뭘 기다려. 감옥에 갇히고 나서 의논할래?”
“난 지금 희박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으니까 잠깐 좀 있어 보라구요.”
“그냥 죽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
저들이 자경단원이 맞다면 저들의 근거지는 이렇게 마을 외진 곳이 아니라 마을 중심부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저들은 지금 시장과 여관을 지나쳐 살림집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주 구역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었다.
마을의 공공 기관이 이렇게 구석에 처박혀 있을 리 없기도 했고.
약초꾼 살해 혐의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라면 왜 이렇게 두 손 두 발을 자유롭게 데려간단 말인가.
물론 아무리 물어도 목적지를 말하지 않는 것이 매우 수상쩍긴 하다만.
“내 옆에만 붙어있어.”
“옆에만 붙어있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이 마을을 쓸어버리는 거지.”
와, 순간 그래도 되냐고, 그럴 수 있냐고 물을 뻔했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하는 놈 옆에 붙어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동화되나 봐.
“쓸어버리긴 뭘 쓸어버려요. 일 키우지 말고 만약 정말 그 일로 끌려가는 거면 최소한의 인원만 제압하고 달아나는 걸로 해요.”
“죽이는 것보다 기절이 더 어렵다니까.”
“일을 키우는 만큼 더 까다로운 추격자가 붙겠죠.”
“….”
그때, 앞서가던 세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여깁니다. 들어가시죠.”
눈앞의 건물은, 단연코 이곳에서 봤던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이었다.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소박한 외형이 이질적이었다.
“….”
로건이 쿡 옆구리를 찔렀다.
정말 들어 갈 거야? 여기서 도망 안 가고? 라고 묻는 눈빛이었다.
“들어가요.”
“…원하신다면.”
내키지 않아 하는 그의 허리를 밀었다.
내 감이 맞았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