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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09)화 (109/134)

109화

밤에 집 밖을 나서는 여자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지만 로건은 따라 나가지 않았다.

들려오는 걸음 소리가 몇 걸음 가지 않고 멈췄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손엔 그가 건넨 갈색 자루와 작은 삽이 들려있었으니, 그는 그녀가 무엇을 하러 밖에 나간 건지 알 수 있었다.

“….”

얼마 후 돌아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그는 잠시 떴던 눈을 감았다.

여자가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침대 안으로 숨어들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모양이지만, 흐느끼는 소리가 다 새어 나왔다.

끊어질 듯 계속 이어지는 흐느낌을 들으며 로건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어둠 속에서 둥그런 이불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들썩거렸다.

그는 문득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무슨 말로 위로를 한단 말인가.

위로의 말 같은 거,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알지 못하는데.

가진 해결책도 없이 공허하게 건네는 위로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나.

그리고 자신은 언젠가 여자를 죽이겠다 말한 사자가 아닌가.

자신을 죽일 사자에게서 듣는 위로라니, 혐오스럽기 짝이 없군.

“….”

그냥 지금은 가만히 있자.

모르는 척, 자는 척해주는 게 지금의 가장 큰 위로일 테니.

*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로건은 평민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동제국의 유명인사인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지.”

“네, 그렇겠네요.”

그는 마을에 가서 지도부터 구할 생각이라 했다.

지도를 구하고, 동제국으로 가는 여러 갈래의 길 중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을 찾을 거라고.

“서제국 지리에 대해 얼마나 알아요?”

“잘 몰라. 잘 아는 지역도 있긴 하지만 그런 곳들은 다 동제국과 인접한 곳들뿐이야. 전쟁하느라 알 필요가 있었으니까.”

이곳처럼 서제국의 안쪽 지역은 그도 잘 모른다 했다.

“근데 말야.”

찬물로 가볍게 세안하는 내게 로건이 물어왔다.

“짐작 가는 곳 없어? 이 먼 곳까지 이동한 게 네가 한 일이 아니라면 다른 누가 있다는 소리니까.”

“지인 중에 마법사는 한 명도 없어요.”

“하긴, 동제국에서 마법사 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

“아직 가장 유력한 가설은 네가 한 일인데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게 가장 유력해. 난 아직 널 못 믿어.”

“내가 이렇게나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대단한 마법사라면 당신 입부터 틀어막았어요. 이러면 내가 마법을 못 쓴다는 근거에 힘이 좀 실리나?”

“어 좀 신빙성이 생기네.”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그가 내게로 무언가를 던졌다.

받아보니 빨간색이 탐스러운 사과였다.

“어제 먹은 거, 숲에서 먹은 게 다잖아.”

사실 눈을 뜬 순간부터 찾아든 배고픔을 애써 외면하던 차였다.

얼마 안 갈 거라고 하더니 벌써 부족하단 말인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력을 앗아가야 한단 얘긴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배고프지 않아? 먹어.”

손에 든 빨간 사과를 내려다볼 뿐 먹질 않자, 그가 채근하듯 말을 덧붙였다.

“….”

그래 이건 그 배고픔이 아니니까.

나는 안심하며 사과를 깨물었다.

*

“지도를 사려고 왔습니다.”

“지도요? 아, 잠시만요… 찾는 사람이 없어서. 예전에 몇 장 가져다 놓은 게 남아 있나?”

가게 주인은 중얼거리며 창고로 보이는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참 만에 나타난 그의 손엔 말린 종이가 들려있었다.

“켁.”

얼마나 오래된 물건인지 그가 가볍게 지도를 털어내자 몇 년은 묵어 보이는 먼지들이 공기 중에 흩날렸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먼지가 많네.”

“….”

“여기 말씀하신 지도요.”

“감사합니다.”

마을 상인이 내미는 지도를 로건은 꽤나 공손한 태로도 건네받았다.

뼛속까지 귀족인 그가 평민 신분에 걸맞는 행동 양식을 능숙하게 해내는 모습이 정말 예상외였다.

“태어나서 평민으로 살아 본 시간은 단 하루도 없을 텐데, 평민 흉내 잘 내내요?

“평민들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떠올려보면 쉬운 일이야.”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그의 옆모습을 스치듯 흘겨봤다.

여기 오기 전 그가 입고 있던 하얀 제복을 생각한다면, 지금 입은 복장은 염색도 되지 않은 누리끼리한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게다가 빛바래고 낡기까지 해, 마음 사람들의 복장에 비해서도 허름한 편이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옷은 너무나 형편없는데 반해, 그 안에 담긴 사람은 너무나 귀족적인 용모와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낡아빠져서 흐늘거리며 축축 처지는 셔츠 깃과 로건의 눈부시게 새하얀 은발, 날카로운 푸른 눈은 굉장히 대조적이었고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지나치게 공손해요.”

“뭐가.”

“지금 당신의 태도가 당신을 대하는 평민들에게서 따온 행동이라, 같은 평민들끼리 주고받기엔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라구요.”

“일리 있네.”

내 지적을 로건은 쉽게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지도엔 아직도 먼지가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지도를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은 이 마을이 여행자가 자주 찾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 이동량이 거의 없는 장소라는 것을 의미했다.

굳이 지도 때문이 아니더라도 유추가 가능한 상황이기도 했다.

“우리 오늘 떠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아요.”

“어.”

“그럼 마을 여관에 묵는 게 낫겠어요.”

“어째서.”

“우린 눈에 띄니까요.”

“그게 무슨 모순적인 말이야?”

눈에 띌 걸 걱정하면서 마을 한가운데 있는 여관에 묵자 말하는 내 말에 로건은 의아한 듯 눈을 치켜떴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필요한 물건을 구입한 후, 집주인이 없어져 버린 지금의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높임말 들어봤어요?”

“….”

그가 기억을 더듬듯 주변을 한 번 빙 둘러보았다.

한 길로 쭉 이어진 시장 거리에서 사람들이 친근한 표정으로 대화들을 나누고 있었다.

“쭉 걸어오는 동안 어색한 대화는 한 번도 듣지 못 했어요. 상인이건 손님이건 서로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이라는 얘기죠. 지도도 그렇잖아요? 외부인이 많은 마을이라면 지도에 그렇게 먼지가 쌓이지 않을 테니까.”

로건은 제 손에 들린 지도를 한 번 더 살폈다.

지도를 만진 그의 손바닥에 까만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매일 같이 항상 보던 얼굴들만 보고 살던 사람들이에요. 근데 매일 보던 얼굴 하나가 갑자기 사라졌다? 작고 외부인이 없는 만큼 사건 사고도 많지 않을 텐데, 금방 알아차리지 않겠어요? 그 집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숲 초입에 있다고 해도 가까운 거리에요. 나타나지 않는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하면 별 고민 없이 찾아올 수 있을 만큼 가깝죠.”

“….”

“그런데 그 집에 가봤더니 외부인이 살고 있다? 너무 의심스럽잖아요. 눈에 띄어도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어요.”

“그것도 일리 있네. 그렇게 하지.”

수긍하는 로건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느라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키가 비슷한 여자와 어깨가 가볍게 부딪혔고, 그녀는 바로 미안하다며 가벼운 사과를 건넸다.

“아, 미안해요.”

“….”

겁먹은 표정으로 애벌레처럼 몸을 잔뜩 움츠린 나를 보며, 여자는 과민반응을 보는 듯한 시선을 주더니 가던 길을 떠났다.

“옷 위로 닿는 건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

“알아요.”

“…일단 여관에 방이 있을지 모르니까 여관부터 들러.”

“그렇게 해요.”

소매 아래로 드러난 맨손을 꾹 말아쥐었다.

로건의 장갑이라도 낄까 생각했지만 그의 장갑은 너무 커서 쉽게 벗겨지기 일 수 였고, 너무 고급품이라 지금 복장에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몇 가게를 들어가 보았지만, 귀족 여성들이나 사용하는 장갑을 이런 마을에서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한적한 마을이라 붐비지도 않잖아. 거리를 두고 걸으면 문제는 없을 거야.”

“…가요.”

손을 공손히 모은 자세로 나는 그와 함께 여관으로 향했다.

*

“어라, 타지 분이시네?”

여관으로 들어가 계산대 앞에 서기도 전에,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 말을 걸었다.

“두 사람이 묵을 방이 필요합니다.”

“가만 보자, 두 사람이 묵을 방이면….”

로건의 살짝 뒤에 서 있던 나를 향해,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 고개를 빼끔거렸다.

“방 하나?”

그녀는 우리를 한 방에 함께 묵어도 되는 사이로 본 것 같았다.

아직 나를 의심하고 있는 로건은 여관 주인이 먼저 방 하나를 제안하지 않았어도 나를 혼자 묵게 할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네, 하나 주시면 됩니다.”

“신혼부부? 아니면 연인 사인가?”

“….”

남의 일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여관 주인의 물음에 로건은 순간 대답이 없었다.

뒤에서 본 뒤통수가 왠지 짜증 나 보이는 게 내 착각은 아니겠지.

“아니, 나는~ 큰 침대 하나로 줄지 작은 침대 두 개로 줄지 몰라서 물어봤지~ 아직 침대를 같이 쓰기 어색한 사이일 수도 있잖아.”

“두 개요!”

재빨리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나를 향해 로건과 여관 주인의 시선이 모였다.

딱 봐도 같잖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로건이 슥 얼굴을 붙여왔다.

“나 너 안 잡아먹어. 관심 없어 너한테.”

“누가 뭐래요. 침대 두 개 방이 있는데 굳이 하나인 방에 들어가서 한 사람이 바닥 신세가 될 필요가 있어요?”

“…아니다. 정정할게.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해. 네가 이렇게 또랑또랑한 눈으로 노려볼 땐 관심이 생기더라고.”

“아, 재수 없어.”

“야, 뭐라고?”

둘만 아는 귓속말을 나누는 동안, 여관 주인은 종이에 무언가를 적더니 종업원을 불렀다.

“마지야~ 손님 모셔라~”

“예~~”

여관 뒤편에서 앳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타난 종업원은 아래로 내려 묶은 양 갈래머리에 수더분한 인상을 가진 어린 여자아이였다.

“이쪽으로 모실게요.”

일하기엔 너무 어려 보이지 않나 싶은 아이가 밝게 웃으며 앞장섰다.

마지라는 이름으로 불린 아이는 복도를 가며 연신 우리를 흘끔거렸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네?”

“연인 사이시잖아요? 초록색 눈동자랑 파란색 눈동자가 꼭 숲이랑 바다 같아요.”

어린아이치고는 멘트가 너무 오지랖 넓은 중년 같다는 생각을 하며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로건은 아닌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 사장님께서 여기에 손님들 정보를 적어주셨거든요.”

“…!!”

손님들의 정보라는 말에 황급히 종업원의 손에 들린 쪽지를 거칠게 빼앗았다.

나와 로건을 주요 깊게 관찰하던 여관 주인의 시선이 떠올랐다. 

혹시 여관 주인이 우리에게서 무언가 수상한 점을 발견했을까 봐 마음이 다급해졌던 탓이었다.

-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아직은 서로 쑥스러운 연인 사이로 보임. 여관에 비치된 커플 물품을 권유해 볼 것. -

“….”

아, 뭐야 이게.

쪽지에 적힌 내용은 여관 주인의 야심 찬 상술뿐이었다.

“어, 저….”

그리고 깜짝 놀란 표정의 종업원이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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