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손바닥을 통해 밀려드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황홀감에 스르륵 눈이 감겨버렸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을 정도였으니.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부드럽지만 역동적인 에너지가 몸 안에서 휘몰아치며, 몸 구석구석을 깨우고 돌아다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상하리만치 사라지지 않았던 허기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몸 안이 따듯한 공기로 가득 찬 것처럼 가볍고 또 가벼웠다.
동시에 느껴지는 이 기분 좋은 포만감이라니.
가벼워서 날아갈 것 같은 느낌과 가득 배부른 느낌이 공존할 수 있는 건가.
나는 아마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던 것 같다.
“끅….”
감아버렸던 눈을 뜬 건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손등을 타고 축축한 물줄기가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내게 목을 붙들린 남자는 흐느낌을 안으로 집어 먹으며 울고 있었다.
“왜 내가….”
아까까지만 해도 목에 손을 올려놓듯, 그저 가볍게 대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양손으로 남자의 목을 조르듯이 쥐고 있었다.
질겁하며 뒤로 물러나자, 내게 목이 졸린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숨을 들이쉬었다.
“이게 무슨, 왜.”
놀라서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내게 로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땠어.”
“…?”
“황홀경이라고 들어서 어떤 느낌인지 궁금한데.”
다 알고 있다는 건조한 말투였다.
“저 사람한테, 아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당신.”
“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건 너지. 너한텐 아무 짓도 안 했고.”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 몸이 변했어. 문양이 사라진 상태와 똑같아.”
“….”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지. 생명력을 취하지 않으면 시든단 소리야.”
급하게 발목을 살폈다.
문양이 아직 남아있는데 어째서.
“방금 말했지만 이유는 나도 몰라.”
자꾸만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공문서 읽어가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해대는 로건 앞에서 나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멍히 바닥을 쳐다보는데, 그의 까만 장화가 시야로 들어왔다.
“이해했으면 마저 식사해.”
“…식사?”
“배가 덜 고프지 않아? 하던 식사를 끝내라고. 마저 흡수하라는 의미야.”
손바닥을 통해 빨려 들어오던 그 따듯한 기운이 저 남자의 생명력이었구나.
물끄러미 남자를 올려다보자, 우리의 대화를 명확히 이해하진 못 했어도 자신을 죽일 거란 예상은 들었는지 그는 두 눈으로 눈물을 쏟고 있었다.
“안 하면.”
“….”
“안 하면 어떻게 돼?”
“이미 알고 있는 걸로 아는데. 몰라서 묻는 거야, 멍청한 거야. 물을 안 마시면 어떻게 되지? 죽어.”
“그렇다고 저 사람을 죽일 순 없잖아.”
“그럼 지금 내 손에 죽을래?”
로건이 내 목을 틀어쥐고 들어 올렸다.
하얀 장갑을 낀 그의 손은 너무나 커서, 얇은 내 목은 마치 사람 손아귀에 붙잡힌 비틀리기 직전의 닭 모가지 같았다.
“생명력을 취하지 않으면 어차피 곧 죽을 테니, 지금 내 손에 죽는 거랑 별반 차이가 없을 거야.”
“….”
위협적인 낮은 목소리였지만 겁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쫑알거리지 말고 못 하겠단 말 집어치우고 얌전히 하라는 대로 해.”
“….”
“내가 이러는 게, 네가 걱정이라도 돼서 이러는 줄 알아? 너 같은 건 얼마든지….”
“죽여 그럼.”
협박이라도 해서 내가 저 사람의 생명력을 취하게 하려는 의도였겠지.
하지만 겁이 나질 않으니 그게 어디 협박이란 말인가.
“어서 손에 힘을 줘. 내 목이 뚝 꺾이게.”
“….”
“간단한 일이잖아?”
“….”
살짝 벌어졌던 입을 다물며 로건은 입술을 짓씹었다.
들끓어 오르는 화를 참고 또 참고 또 참아내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네가 생명력을 취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저 남자를 살려둘 것 같아? 어차피 죽일 거야. 알겠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상관없어. 둘 다 죽여, 저 남자도 나도. 그런다고 해도 내가 저 남자를 만지는 일은 없을 거니까.”
“아하, 그래? 좋아 그럼.”
사람 손에 목이 붙들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닭처럼, 나는 로건이 힘을 주는 방향으로 흔들렸다.
목을 쥐고 주저앉아 있던 나를 일으켜 세운 그가, 얼어붙은 남자의 곁으로 날 밀어붙였다.
“안 한다면 어쩌겠어. 내가 하게 해줄게.”
닿아버린 이마를 통해 아까와 같은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우습게도 나는 그 순간에 또 다시 환락 같은 기분에 젖어 들고 말았다.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력이란 것을 알았으면서도.
- 짝
몸이 채워지는 것을 느끼며 로건의 얼굴에 비어 있는 손을 올렸다.
그의 손엔 장갑이 끼워져 있지만 얼굴은 무방비했으니까.
로건이 깜짝 놀라 내 목을 틀어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하아, 하….”
“미안한데, 당신 뜻대로 할 생각은 전혀 없어. 협박이 통할 거라 생각하는 게 참 우습다. 넌 날 여기서는 못 죽이잖아? 살려서 데려가야 하니까.”
“….”
“그걸 뻔히 아는 나한테 죽인다는 협박이 먹힐 거라 생각하지 마. 나보다 치료제에 대해서 잘 알지? 그거나 붙들고 연구해. 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리고 싶으면.”
“후….”
낮은 한숨을 내쉰 그가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읊조렸다.
“고집불통이군. 이렇게나 완강히 거부하면 나도 어쩔 수 없네.”
“….”
“나갔다 올 테니까, 밖으로 나올 생각 말고 여기 있어.”
굳어 있던 남자를 끌고 로건이 집 밖을 나섰다.
아마 저 사람은 죽임을 당하겠지, 그럴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들었으니까, 로건이 살려둘 리 없었다.
“….”
사람이 죽을 거라는 걸 예상하면서도 구석에 쭈그려 앉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기운 없던 몸에 활력이 넘쳤다.
이게 다 그 남자에게서 빨아들인 생명력 덕분이려나.
이렇게 죽는 걸 방관할 거라면 로건이 시키는 일을 뭐 하러 거부했을까 싶어져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하하….”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즐거운 기분을 느끼는 존재라니, 이제 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사람을 잡아먹는데?
사람을 잡아먹는 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같은 인간은 아니고.
“괴물인가 나.”
무심코 바라본 창밖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
로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들어오는 그는 혼자였고 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가 집을 나설 때의 자세 그대로 웅크려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
로건은 그대로 나를 지나쳐 열려 있는 창을 닫았다.
“열어 놔요. 더워요.”
“안 돼. 밖에서 보이면 위험해.”
“뭐가 위험해요? 여기서 나랑 당신만큼 위험한 존재가 어디 있다고?”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상황이 좋지가 않아서 말이야.”
“….”
“여기가 어딘지 알아냈거든.”
“어딘데요.”
“서제국이야.”
서제국이란 말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둥그레진 내 눈을 이해한다는 얼굴이던 표정이 스르륵 장난스러운 빛깔을 띠었다.
“어? 지금 그렇게 눈 뜨는 거 익숙한데 말이지. 아, 맞네. 그때 그 눈이야.”
“….”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네 녹색 눈알을 파버리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딱 그 눈이네. 반가워.”
“서제국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요.”
로건은 상황에 맞지 않게 서운하다는 표정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기운을 북돋아 보려는 내 진심 어린 노력을 이렇게 묵살하다니, 해도 너무하네. 치료제 양.”
내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자, 그가 알겠다는 의미로 얼굴을 끄덕였다.
“아, 알았다니까. 재미없게 대화해보자고 그럼. 다시 말하지만 여긴 서제국이야. 서제국에서도 아주 깊숙한 곳이지. 동제국과는 아주 먼.”
동제국의 수도 근처가 아니란 사실은 진작에 알았지만, 그래 봤자 동제국 어딘가 일거란 생각이 나와 그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서제국이라니.
“어떻게… 어떻게 안 거예요?”
“편히 주무실 때, 이 공작이 친히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
“집주인한테서도 확인했고.”
“….”
어안이 벙벙했다고 해야 되나 말문이 막혔다고 해야 되나.
머릿속에서 내가 알던 모든 것들이 녹아내려 사라진 것처럼 나는 그 순간 백지였다.
동제국으로 어떻게 가야 하지, 도 움받을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오히려 귀족이란 사실이 더 문제 아냐? 귀족이란 게 동제국에서나 쓸모 있지 여기서는 들키면….
그래, 로건은 막강한 능력자니까.
여기가 동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적국의 땅이라 한들 그가 강력한 능력자인 사실은 변함이 없는걸.
“동제국까지 얼마나 걸려요? 가는 데 문제는 없겠죠?”
그러나 로건이 곧바로 내놓은 대답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글쎄.”
“….”
“가 봐야지. 좀 걸릴 거야.”
“글쎄라뇨. 당신은 능력자잖아요. 누가 오든 쓰러트리고 가면 그만인 엄청난 능력자.”
“뭐 물론 그렇긴 한데.”
“….”
“내가 로건 후페이인 만큼, 가는 길에 정체가 알려지면 서제국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무력을 준비하겠지? 걔들도 바보는 아니잖아.”
“아….”
낙담하는 나를 두고 그가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다 포기하고 싶다는 얼굴 하라고 한 말 아니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준 것뿐이지.”
“….”
“말했듯이 난 널 나일에게 데려가서 내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할 거야.”
“….”
“그리고 어찌 보면 네겐 좋은 소식 아니야? 넌 죽는 게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던 거 아닌가.”
부정도 긍정도, 아무 대꾸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말을 잃은 내 근처로 로건이 갈색 자루를 던졌다.
“뭐예요.”
“먹어 둬. 내일 많이 이동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갈색 자루는 손으로 잡았을 때 말랑거리는 느낌이었다.
허벅지 위에 올려서 묶인 매듭을 풀자, 자루 안에 들어있는 것은 토끼였다.
“….”
“아까 흡수한 양으론 턱없이 부족할 거야. 어차피 결국 사람의 생명력을 필요로 하게 되겠지만… 일단 그거라도 흡수해 둬.”
로건이 기절시켜 잡아 온 모양인지, 움직임이 없는 토끼는 죽은 게 아니었다.
보송보송한 흰 털이 가득 난 몸통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낮에도 내가 잡아 온 토끼 고기를 먹었잖아. 그거랑 별다를 거 없는 일이야.”
“…알겠어요. 이따 할게요.”
그날 밤, 로건은 바닥에 이불을 폈고 나는 침대 위에서 잠을 청했다.
불을 끈 지 얼마나 지났지.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두었던 갈색 자루를 이불 위에 올렸다.
여전히 기절해있는 토끼의 모습은 암흑 속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망설이던 손을 토끼의 몸 위에 올리자, 작은 생명체의 온기가 손으로 전해졌다.
로건의 말처럼 이건 고기를 먹는 것과 같은 일이야.
이제껏 아무 생각 없이 동물의 살코기를 먹어왔잖아?
그러니까 네가 지금 이런 마음을 갖는 건 새삼스러운 일일뿐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
손바닥 안에서 점점 여린 숨이 잦아들었다.
이내 숨이 멈췄을 땐,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을 때였다.
생명체의 온기가 빠르게 식어갔다.
내가 죽여버린 토끼의 몸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