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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03)화 (103/134)

103화

“이놈들 봐라?”

머리 위를 뒤덮은 보라색 장막을 올려다보는 황제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내 집 지붕 위에다 결계를 쳤어?”

순간 반투명한 보라색 장막에서 색소가 빠지듯 보라색 마력이 빠져나가자, 하늘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투명하기만 했다. 

그러나 결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점 하나를 태워먹고도 활활 타올라 지붕마저 꿀꺽 삼킨 불이 공중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곧게 오르던 시커먼 연기가 마치 스스로 허리를 접듯 수평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아버지.”

수많은 전쟁터를 휩쓸고 다녔던 자신조차도 처음 보는 종류의 결계였으니, 제 아들놈은 오죽할까.

나일이 살짝 놀란 듯 자신을 부르자, 황제가 안심하라는 투로 그를 달랬다.

“모양이 신기하긴 하다만 저놈들이 치는 결계가 거기서 거기지. 별 거 아니다.”

음, 확실히 모양새가 신기하긴 해.

분명 처음 보는 류의 결계였다.

특히나 결계의 높이가 저리 낮은 것이 있던가?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공간을 높게 감싼 결계는 본적이 있었지만.

‘15미터 쯤?’

결계의 높이는 15미터가 채 되지 않아 보였다.

‘서제국 놈들이군.’

높이가 낮다는 점이 특이했지만 결계가 퍼져나가는 방식을 보아, 전쟁터에서 늘 보아왔던 서제국 놈들이 결계를 치는 방식과 유사했다.

이 정도의 결계를 칠 수 있는 놈들은 마법사를 많이 보유한 서제국 말곤 없기도 했고.

“아들아.”

“예.”

결계를 해제하기 위해선 사용된 주술도구를 다 제거하는 게 원래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빠 엄호를 좀 해주겠니?”

주술도구를 찾고 말고 할 필요 없이 그냥 힘으로 태워버리면 그만이었다.

어지간한 능력자라 해도 마법사들이 공들여 만든 결계를 힘으로 부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조금 특이하다곤 해도 전장에서 수백 번 태워버렸던 결계일 뿐.

“엄호요? 어, 그게….”

“…대답이 왜 그 모양이야? 아빠 결계 부수게 엄호해.”

“…노력해 볼게요.”

대답이 왜 이렇게 시원치 않나 싶어서 황제가 아들 쪽을 돌아보니, 나일이 잔뜩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제 앞으로 걸어오는 드레스를 입은 마물을 마주하고 있었다.

*

“저기, 영애?”

“크아아악.”

“….”

아까는 그렇게 쑥스러운 얼굴로 춤을 청하더니만.

남작가 영애는 이제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는 커다란 목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제게 춤을 청하셨을 때는 충분한 용기를 가지고서 하신 일이 아닙니까?”

“크악.”

몸이 변화해, 군데군데 터져나간 하얀 드레스를 흔들거리며 마물이 성큼성큼 나일에게로 거리를 좁혔다.

“그 용기엔 거절당할 용기도 포함된 것 아니었나요? 제가 거절했다고 이렇게 화를 내시면.”

“크아아아아아!”

“음.”

마물이 한층 더 성난 눈으로 포효했다.

어째 제 말이 점점 더 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사실 나일은 알고 있었다.

이제 마물로 변해버린 눈앞의 저 여인이 사람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는 것을.

“크아아!”

“꺄아악!”

나일이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자, 마물이 제 옆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에게로 정신을 팔았다.

그 모습에 나일이 얼른 다시 그녀였던 마물에게 말을 걸었다.

“변명을 하자면!”

“크아악?”

“제가 정말 좋아하는 여자가 지금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라, 도저히 춤을 출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크르르….”

“그러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일의 설명에 마물이 일순 행동을 멈췄다.

그 모습을 숨죽이고 보면서, 나일은 황제에게로 달려드는 마물을 향해 푸른 전격을 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한 전류에 충격을 받은 마물이 혼절해 옆으로 고꾸라졌다.

“….”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찾지 못한 것뿐이 아닐까?

무대 밑에서도 날뛰는 마물들과 저지하려는 병사들이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방금까지 저들은 무대 아래서 행복한 얼굴로 축제를 즐기던 이 나라의 사람들이지 않은가.

정말 죽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건가.

“크아아악!”

어쩌면 말을 알아듣지는 않을까 가졌던 희망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잠깐 가만히 있던 흰 드레스의 마물이 괴성을 내지르며 나일에게로 달려들었다.

내키지 않지만 능력자인 그가 한 마리라도 더 무력화시켜야 했다.

그래야 제국민과 병사들의 희생을 줄일 수가 있었으니까.

“미안합니다.”

나일이 방출한 전격에 흰 드레스의 마물이 무대 위로 엎어졌다.

*

무대가 설치된 곳으로 접근해 갈수록 광경은 점점 아수라장에 가까워졌다.

여기저기서 질러대는 비명에 귀는 따갑고, 마물의 피와 사람의 피가 섞여 튀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래도 황궁이 제일 안전할 테니.’

황궁에 있는 거면 좋겠는데.

허나 친구인 알레나의 손을 잡고 축제 구경이라도 나왔다면 문제였다.

파베라는 달려드는 마물들을 가볍게 잡아다 내던지며 황궁 앞 무대로 걸어갔다.

다행히 피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무대 위엔 마물들을 상대하기에 여념이 없는 황자와 황제의 모습만 보였다.

“황자 전하!”

“….”

“나일 리베르 황자 전하!”

“?”

워낙 소음이 심해 두 번 만에 그가 뒤를 돌았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는 모습이 꼭 저를 아는 것만 같았다.

“피비는 어디에 있어요? 황궁에 있나요?”

나일은 무대 아래,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곳에서 혼자 평온히 서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아, 저 여자. 피비가 살고 있는 곳 집 주인이지.

피비와 매우 친밀한 사이 같던데.

“….”

행방불명이라고 하면 걱정할 테지.

우선 그보다 빨리 자리를 피하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저 여자, 이 난장판이 보이지 않는 건가.

왜 저리 평온한 표정인지.

“우선 안전한 곳으로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쪽으로 가십시오.”

병사들이 쳐 놓은 바리케이드 쪽으로 눈짓했지만 여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전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괜찮구요. 피비 어디 있냐구요. 전하 곁에 있던 거 아닙니까?”

“이곳에 없습니다.”

“아, 황궁에 있군요. 다행이네.”

“아뇨.”

무대 밑 사람을 물려하는 마물에게 푸른 전류에 휘감긴 창을 날리며 나일은 입술을 달싹였다.

“피비는 어젯밤부터 실종된 상태입니다. 오늘 아침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네?”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우선 그대의 안전부터.”

“그 애가 없는데 내가 안전해서 뭐해.”

자연스럽게 나온 반말에 나일은 살짝 당황했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후페이 공작이 중앙군을 이끌고 동쪽 지역으로 간 상태니 연락이 있을 겁니다.”

“그럼 동쪽으로 가면 되겠네요.”

파베라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피비가 없다면 여기 머무를 필요가 없었으니.

“혼자 가서 어떻게 찾으실 생각입니까? 이 난리통을 뚫고 그대 혼자 가실 수나 있습니까? 동쪽 어디로 가실 겁니까? 무슨 옷을 입고 갔는지는 아십니까? 다른 정보는요? 저라고 걱정이 되지 않아서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

“저도 찾으러 갈 겁니다. 찾으러 가기 위해서 이러고 있는 겁니다. 어차피 결계가 쳐진 상태로는 나갈 수도 없습니다.”

파베라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린 황자의 말 그대로였다.

투명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결계.

저것이 있는 한 파베라는 피비를 찾으러 이곳을 빠져나갈 수조차 없을 것이었다.

“후….”

그래, 일단 여기 얌전히 있어볼까.

딱히 그녀로서는 결계를 해제할 방법이 없기도 했다.

황자랑 황제가 결계를 깨트리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걸 기다렸다 결계가 깨진 후에 바로 움직이면 될 테니.

“이리 오시죠.”

나일의 명을 받은 병사 한 명이 그녀를 바리케이트 안으로 들이기 위해 다가왔다.

“위험해!”

파베라의 등 뒤로 유독 거대한 마물 하나가 다가왔지만 난리통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순간이었다.

뒤늦게 본 나일이 다급하게 소리를 내지르며 사고를 직감했을 때였다.

“꾸에에엑!”

“?”

파베라의 왼팔에서 뻗어 나온 초록 줄기에 칭칭 감긴 괴물이 공중에서 괴성을 내질렀다.

버둥거리는 발 모양새가 꼭 내려달라 때를 쓰는 아이 같기도 했다.

살아 움직이는 녹색 줄기를 한참 들여다보던 나일의 시선이 천천히 파베라의 얼굴로 옮겨갔다.

‘왜 익숙하지?’

피비의 지인이 갑자기 저런 능력을 쓴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지만, 더 이상한 것은 분명 처음 보는 저 식물 줄기들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나일은 거대한 마물을 마치 아기처럼 손쉽게 다루는 파베라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하… 들통 났네.”

파베라가 시선을 피하며, 머쓱한 얼굴로 턱을 긁었다.

“내가 그때 좀 피해를 줬잖아? 대신 오늘 열심히 봉사할게! 몇 마리 잡을까?? 말만 해요, 황자님.”

“….”

*

조금만 지체했더라면 결계 때문에 중앙 지역에 들어오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낮게 깔린 결계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로건의 등 뒤에서 고개를 살짝 옆으로 뺐다.

저 바로 앞이 황궁이었다.

“황궁으로 직행하는 건 나 혼자다. 외곽에서부터 정리를 시작해. 제압을 우선으로 하지만 우리 쪽 사상자가 나올 것 같으면 가차 없이 벤다. 알겠나?”

“예!!”

그의 말에, 함께 달리던 4개의 소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좌우로 갈라져 나갔다.

“다 보내도 괜찮아요?”

“나만 있으면 돼.”

하긴, 중대 하나의 병사보다도 로건 한 명의 힘이 월등하니까.

“….”

말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가 나일에게 장미 꽃차를 먹었는지부터 물어봐야지.

귀족들이야 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으니 안 먹었을 것 같기도 하고, 축제 첫날 나일은 워낙 바빴기 때문에 그런 걸 구경하고 먹을 시간도 없었을 테지만.

“다 왔어.”

“….”

로건의 말처럼, 하얀 무대의 끝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곧 나일의 생사를 확인할 수….

‘저게 뭐야?’

황궁 앞 무대의 중앙이었다.

화산에서 용암이 분출하듯 펄펄 끓는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솟아오른 불길이 낮은 경계를 만나 머리 위에서 납작하게 퍼져나갔다.

‘목이 말라.’

일렁이는 불길에 대기 중의 수분이 증발하며 목이 타기 시작했다.

갈증이 나는 것뿐이라면 아무렇지 않겠지만, 문제는 연기였다.

붉은 페인트칠을 해놓은 것처럼 하늘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르지 않은 묽은 페인트가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하늘에서 작은 불덩이들이 떨어졌다.

떨어진 불덩이들이 집을 태우고, 수도를 태우고.

시꺼먼 연기에 코와 목이 매캐했다.

“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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