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축제도 첫날에나 신기했지 파베라는 이튿날부턴 영 구경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피비가 말하길, 축제는 첫날 보다는 그 다음날, 그 다음날 보다는 마지막 날이 가장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을 것이라 했지만.
혼자서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을 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았고, 첫날 보고 나니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고.
파베라는 2층 침실에 누워 일찍 잠이나 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만 감으면 바로 숙면에 빠질 줄 알았는데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영 잠에 들기가 쉽지 않았다.
축제 기간이긴 하지만 여긴 관광객들이 오지 않는 주택가라 내내 조용했는데 갑자기 소음이 들끓기 시작했다.
본선 어쩌구라고 하더니 그것 때문인가?
파베라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 우당탕탕
물건이 넘어져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온 곳은 1층이었다.
그녀가 뒤집어썼던 이불을 끌어내렸다.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크지 않았다.
일부러 소리 죽여 걷는 걸음이라기엔 발소리의 간격이 일정치 않았다.
마치 어린 아이가 제대로 걷지 못하고 뒤뚱뒤뚱 걷는 것처럼.
불균일한 발소리가 그녀가 있는 방문 앞을 지나쳐 비어있는 피비의 방으로 향했다.
매우 귀찮기도 했고, 도둑이 이 집에서 뭘 가져가든 물건에 별로 애착이 없는 그녀에겐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피비의 물건은 예외였다.
파베라는 결국 느린 동작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나가라, 어른한테 혼나기 전에.”
“크앙.”
피비의 방문 앞에 서 있는 생명체가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눈을 부라리며 자신을 노려볼 도둑을 상상했건만, 그것의 키는 채 1미터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새끼 마물?’
오래 살면서 많은 마물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생긴 마물은 처음이었다.
아직 어린 새끼인데도 단단한 피부를 가진 그것이 둥그렇게 불거져 나온 눈알을 도록도록 굴려댔다.
“…흠.”
인간들이라면 마물을 보자마자 무서워 벌벌 떨거나 죽일 생각을 했겠지만 파베라는 달랐다.
마물이긴 했지만 딱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해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직 덜 자란 어린 것이기도 했고.
“크아앙.”
작은 소리로 울어대는 모습이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울지 마라. 살고 싶으면.”
파베라의 손에서 뻗어 나온 초록빛 식물 줄기가 작은 마물의 몸을 휘어감았다.
줄기에 감긴 마물이 공중에 만들어진 식물 감옥 안에서 버둥대며 소리를 냈다.
부엌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가져다 감옥 안으로 넣어주자, 작은 생물은 음식을 입에 넣기 바빴다.
“그래. 조용히 해야지.”
어쩌다 집에 들어온 귀뚜라미를 산채로 잡아다가 밖에 풀어주는 것처럼 새끼마물을 집밖에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저것이 나가면 밖의 인간들도 놀라고 저것도 놀라고 하겠지.
그리고 사냥당하는 쪽은 어린 마물이 될 테지.
그 전에 저것이 다른 어린 것을 물어뜯을 수도 있고.
잘 숨겨 수도를 벗어나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숲에다 내던지고 오면 될 것이다.
“아니 그런데.”
밖이 왜 이렇게 시끄럽다냐.
꽉 걸어 잠근 창문을 뚫고 번거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밖의 상황을 알기 위해, 잔뜩 구긴 인상으로 파베라가 커튼을 열었을 때였다.
“….”
사람이 적어야 할 주택가 도로 위를 사람과, 사람 비슷한 무엇이 뒤섞여 뛰어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들은 방금 감옥에 가둔 어린 마물의 확대판이었다.
“너 이제 보니 대가족이구나?”
“….”
“네가 제일 어린 것 같네. 막둥이니?”
“크아앙.”
“할머니가 변덕스러운 사람이야. 울면 마음 바뀐다.”
“….”
어라.
그런데 사람의 뒤를 무섭게 뒤쫓는 마물들의 외양이 조금 이상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마물은 봤어도, 사람을 잡아먹고서 옷을 뺏어 입는 마물이 있었던가.
쟤들 왜 옷을 입은 애들이 보이지?
“가야 되나?”
피비는 황궁에 있거나 황자 근처에 있을 테고, 거기엔 마물보다 더 무서운 인간 몇이 있으니 걱정할 건 딱히 없을 것 같긴 한데.
“….”
도로를 뛰어다니는 저것들이, 이렇게나 오랜 세월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마물이라는 점이 그녀의 마음에 걸렸다.
파베라가 축제 첫날 새로 산 값비싼 숄을 어깨에 둘렀다.
그리고 현관문을 밀었을 때.
- 피융
보랏빛 불덩이가 긴 꼬리를 뽐내며 하늘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높이 올라갈 힘은 없는지 점점 눈에 띄게 속도가 줄더니, 얼마 못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솟구쳤을 때 그것이.
- 파바바바박.
대형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백갈래로 갈라져 하늘을 뒤덮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파베라가 작게 혼잣말을 지껄였다.
“역시 귀찮아도 움직여야 한다니까.”
안 나왔으면 큰일 날 뻔 했잖아 이거.
파베라가 보랏빛 불덩이가 보인 황궁 앞 무대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무대에서 고작 한 골목 떨어진 장소.
큰 건물 뒤 가려진 공터에서 한 공간이 일렁이더니 장막이 열리듯 공간이 열렸다.
열린 공간에서 나온 것은 몇 명의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 장면을 목격했지만, 저걸 보라며 소리치거나 놀랄 수 없었다.
쫓아오는 괴물을 피해 달리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운 나쁜 괴물 하나가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그들을 보고 목표물을 수정했다.
전력질주 하는 사람들 속에서 가만히 서 있는 인간 몇은 가장 잡아먹기 쉬워보였으니까.
끈적거리는 침을 질질 흘리며 송곳니를 드러낸 마물이 곧장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끼에에엑
그리고 신나게 비명을 질러대며 달려드는 마물을 향해 무리의 어떤 남자가 간단히 주문을 외웠다.
“동제국의 황족들도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방금 전까지 생명체였던 것이 피가 섞인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눌러 붙어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보며 갈색 장발의 남자가 쓰고 있던 은테 안경을 빼들었다.
“그럴 수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 피곤한 일을 벌였겠냐?”
안경알에 튄 피를 닦는 남자는 서제국의 2황자, 테오 세리에였다.
그의 말에 제 능력을 과신하며 건방떨던 자의 입이 가로로 다물렸다.
“그런데 2황자 전하, 여길 함께 오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적진 한복판인 이곳은 너무 위험한데요.”
“공적인 과업은 편하게 앉아서도 이룰 수 있지만 사적인 원한은 직접 풀어야 하니까.”
깨끗이 닦인 안경을 다시 쓰며 테오가 무심히 대답했다.
그리고 조용히 서 있는 민트색 머리칼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알렉스였다.
“게다가 공간 능력자가 우리 편이잖아?”
제게로 쏠리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속된 시간보다 너무 늦게 와서 배신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말이야. 와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니까?”
적진 한복판인 이곳에서 결계를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꽤 오랜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알렉스가 만들어준 공간이 아니었다면 주술도구에 마력을 주입하다가 중간에 발각되었을 것이 뻔했다.
첩자로 활동하면서도, 살갑게 굴지 않는 제 태도를 비꼬는 말에, 알렉스는 별로 반응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약속한 일은 여기까지야. 이제 당신들 안전은 당신들 몫이고. 더 이상 당신들을 숨겨주는 일은 없을 거다.”
“당신들이라니, 2황자님께 말조심해라.”
테오의 부하 중 한 명이 알렉스의 턱밑으로 칼을 가져갔다.
“귀하신 몸이야. 이 자는 이제 서제국 측 사람이라니까? 너랑 너, 같은 서제국.”
테오가 부하와 알렉스를 각각 가리키며 낄낄거렸다.
뭐가 즐거운지 모르겠지만 웃고 있는 서제국의 황족을 보며 알렉스가 말을 덧붙였다.
“약속된 일을 해줬으니 내게 약속된 것들도 차질이 없었으면 좋겠어.”
“물론, 알지 알지. 근데 말이야….”
테오가 알렉스의 어깨에 슬그머니 팔을 둘렀다.
“너 네 가문과 나라를 팔아먹은 새X잖아. 물론 가문이고 나라고 곧 다 뒈져버릴 거라 널 비난할 놈들도 없겠지만, 그래도 갈 곳은 있어야지.
그게 우리밖에 더 있어? 우리가 안 받아주면 어디로 갈 건데? 그러니 착하게 좀 굴자. 좀 웃고.”
두른 팔로 알렉스의 오른쪽 어깨를 쥐어짜듯이 누르며, 테오가 말을 이었다.
“서제국이 마법사는 차고 넘치는데 능력자는 부족하잖아? 특히 너 같은 희귀 계열은 대환영이라고. 응? 잘 지내자.”
“….”
“가문도 나라도 팔았으니 이제 새 친구가 필요할 거 아냐? 해준다니까.”
“2황자 전하, 마력 주입이 끝났습니다.”
“그래? 쏴.”
테오가 짧게 명하자, 그를 따라온 마법사가 방금까지 마력을 불어넣던 주술도구를 작동시켰다.
시원하게 공중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보라색 불덩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
로건이 모는 말을 타고 한 시간도 넘게 달렸을 때였다.
오는 중간에 병사 한 명이 변이를 일으켜 대열을 이탈했다.
달리던 말에서 낙마해 몸을 떠는 동료에게 병사들의 안타까운 눈빛이 꽂혔지만, 누구하나 속도를 줄이자고 외치는 이가 없었다.
대신 그가 완전히 마물로 변하기 전에 목숨을 거둬갈 친한 병사 한 명이 말에서 내릴 뿐이었다.
그들은 마물로 변이 후 돌아오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냉정과 냉철은 겉으로 보기엔 닮아 있으나, 병사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은 냉철이었다.
급히 황궁으로 가야하는 지금의 상황을 알기에 그들은 빠르게 말을 모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 애썼다.
자신이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었지만, 그것마저도 꾹 누르려 애를 썼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독약을 분석하면, 해독제를 만들 수 있지 않아요?”
“마물로 변화시키는 독약은 이제껏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가능하겠지. 시간이 문제야.”
극히 적은 마법사의 수를 자랑하는 동제국의 몇 없는 마법사는 황궁에 몰려있었다.
그들이 해독제를 만들어 낸다고 해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변이된 사람들을 그동안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문제였다.
“변이체를 생포해 수도에서 떨어진 곳까지 이동시켜 잠시 묶어두는 수밖에 없어. 다 왔군.”
수도의 중앙 지역을 알리는 경계석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늘에!”
병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가 외치지 않았더라도 모두 그것을 보았을 것이다.
중앙에서 시작된 보랏빛 빛줄기가 낮은 하늘을 타고 공중을 뒤덮어나가는 중 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 그 빛이 끝나는 지점을 보았다.
방금 지나쳤던 중앙 지역의 경계석.
하늘에서 내려온 빛줄기가 그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결계야. 서제국에서 결계를 쳤어.”
로건이 고삐를 더 세게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