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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98)화 (98/134)

98화

‘생각보다 깊게 찔렀나.’

나무 기둥을 부여잡고 힘겹게 일어서려 하자, 그렇지 않아도 욱신거리는 상처 부위에 힘이 들어가며 말도 못 할 고통이 밀려왔다.

굳이 몸에 상처를 내지 않고도 알렉스가 자리를 비우게 할 다른 방법이 있었겠지만, 내 생각에 가장 확률이 높은 방법은 이것이었다.

동시에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이기도 했지만.

기둥에 몸을 기대서서 알렉스가 동여매 준 천을 더 꽉 조였다.

“와악.”

너무 아파 진짜.

그래도 가만있을 순 없지.

어디 보자, 이 집 뒷마당에 손도끼가 있던가.

족쇄까지 풀진 못하겠지만 손도끼로 쇠 구슬이 달린 쇠사슬만 끊어낼 수 있다면 도망가는 일이 훨씬 수월할 것이었다.

다친 다리를 끌며 뒷마당으로 향하려는데.

“여기에요!”

알렉스가 정신없이 열고 나간 문 너머로 반가운 꼬맹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나를 손가락질하는 어린아이 뒤로는 더 반가운 병사들이 서 있었다.

정확한 7시 정각이었다.

요 영특한 꼬맹이 시간관념이 확실하구나.

뒤따라 들어오는 병사들을 향해 손짓하는 꼬맹이에게 하고 있던 한쪽 귀걸이를 빼 던졌다.

“해냈지? 누나 나 영웅 맞지?”

경쾌한 손놀림으로 귀걸이를 낚아챈 아이의 표정이 싱글벙글했다.

‘빠져나갈 수 있겠어.’

안도감으로 주저앉은 내게 병사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피기 란셀롯 영애십니까?”

“네.”

피에 익숙한 군인이라 이건가.

내 신원을 확인한 병사가 피로 물든 치맛자락에 주었던 시선을 가볍게 거둬들이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다리를 다치셨습니까?”

“허벅지를 베였어요.”

간단한 질의응답이 오가는 동안, 다른 병사 둘이 다가와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냈다.

“란셀롯 영애를 납치한 자들은 어디로 간 겁니까? 멘데 영애는 왜 안 보이죠?”

“….”

뭐부터, 아니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납치범들이 멘데 영애를 끌고 갔고, 그게 어딘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남치범들은 누굽니까? 란셀롯 영애는 어쩌다 이렇게 상처를 입은 겁니까?”

“저기요, 병사님.”

피 흘리는 사람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점, 대단하게 생각합니다만.

허벅지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사람을 봤으면 궁금한 걸 해결하려 들기보다는 데려가서 치료해 줄 생각을 먼저 하셔야죠.

그렇지 않아도 찔린 부위는 욱신거리고, 머리는 어지러워 죽겠단 말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한시라도 빨리, 알렉스가 돌아오기 전에 떠나고 싶기도 했고.

“일단 절 옮겨서 치료해주시는 게 먼저 아닐까요? 부축해 주시면 일어나 볼게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쑥, 얼굴 앞으로 질문 요정 병사가 질문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이해가 빨라서 좋네. 

“멍청한 놈들아.”

그때 내게 내민 손을 옆으로 툭 쳐내며 누군가가 병사 앞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니, 비집고 들어왔다는 표현보다는 병사가 그를 위해 자진해서 몸을 뒤로 뺐다는 표현이 더 알맞겠군.

“다리를 다쳤잖아. 걷게 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안아 들어도 되겠냐는 허락 한마디 없이, 한 남자가 거침없는 손길로 날 안아 들었다.

몸이 들리며 허벅지가 흔들리자 어김없이 고통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아씨.”

칼 맞으면 이렇게 아픈 거구나.

“공작이 친히 안아주는데 버릇없이 아씨라니. 많이 다쳤나 봐, 같은 편?”

품에 안겨 있는 덕분에 로건 후페이의 목소리와 함께 불어닥친 숨이 이마를 때렸다.

이마를 쓱 닦아내며 시선을 올리자,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맞이했다.

“조금 더 신경 써서 들어주신다면 저도 예의를 더 갖춰볼 텐데요.”

“다치면 안 돼. 나일이 슬퍼한다고.”

나일.

난데없이 날아든 사랑하는 이의 이름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두 눈을 꼭 감고서 차오르려는 눈물을 가라앉히는데, 그 모습을 다친 부위의 고통을 참아내는 것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많이 아픈가 보네.”

“황자님께 가고 싶어요. 데려가 주세요.”

“걱정 마. 그러기 위해 온 거니까.”

로건은 나를 안아 든 채로 부하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다가.

“저기, 부엌 수납장 안쪽에 챙겨가야 할 물건이 있어요.”

내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다가간 병사가 안에서 구겨진 종이봉투를 꺼내와 내게 안겼다.

됐다, 이제 이대로 나일에게 가면 돼.

그때였다.

종이봉투를 소중하게 끌어안는 나를 위에서 물끄러미 관찰하던 로건이 갑자기 고개를 홱 꺾었다.

“밖.”

그의 짧은 한마디에 병사 여럿이 우르르 집 밖으로 몰려나갔다.

설마 알렉스가 집 안의 상황을 모르고 가까이 다가오다가 인기척을 낸 건가?

그게 아니면 이 상황에서도 날 포기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해보려는 건 아니겠지?

적어도 생각이 있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마, 제발.

병사가 여럿에 로건까지 있다고.

“안겨서 꿈틀거리지 마.”

창밖의 상황을 보려, 그의 어깨에 매달려 고개를 빼 드는 나를 그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나무랐다.

밖으로 나간 병사들이 집 근처를 수색했지만 발견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여기 있다면 나오지 마.

모습을 드러내지 마.

이건 내가 원하는 일이야.

이대로 내가 나일에게 가도록 해줘.

왠지 알렉스가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속으로 말을 건넸다.

“도대체 뭘 그렇게 보는 건지 같은 편한테도 알려주면 어때?”

“전하께 데려가만 주시면 같은 편으로 인정해드릴게요.”

“아하?”

우리 아직 같은 편이 아니었구나? 하하.

한편이 되려면 너한테 인정받아야 하는 거였어.

어이없다는 투로 말을 이어붙이는 로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 멀리 가.

다시 보지 말자. 알렉스.

*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마차를 타고 이동해 도착한 곳은 수도의 동부기지였다.

어두컴컴한 방구석의 침상 위로 날 눕히자마자 방을 나갔던 로건이 다시 돌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상처를 치료할 사제를 불러오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갔으니 사제와 함께 들어올 거라 예상했는데 돌아온 그는 혼자였다.

조용히 방문을 닫은 그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렸다.

“각하, 여기서 얼마나 머무르는 거죠? 바로 황궁으로 갈 순 없나요?”

“….”

조르듯 물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사제가 금방 오지 않고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치료는 나중으로 미뤄도 좋으니 지금은 황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밤새 달린다면 피로하겠지만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는 걸 설명하면 그도 이해하겠지.

“보여드릴 물건이 있어요. 아마 이걸 보시면….”

소중히 안고 있던 종이봉투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 내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침상 곁으로 다가온 로건이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려보는 눈빛이 눈앞의 상대를 당장이라도 잡아먹으려는 듯했다.

‘왜 이렇게 나를.’

무섭고, 무거운 눈으로 보는 거지.

“이봐 너.”

“….”

눈빛만큼이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소리 지르지 마. 좋을 거 없을 테니까.”

“….”

“가만히, 가만히 있어라.”

“….”

그가 내뿜는 위압감에 내뱉으려던 목소리를 안으로 삼켰다.

남자가 지금 하려는 행동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원하지 않는 행동일 거라는 예감.

그리고 반항해도 결과는 같을 거라는 무력감이 나를 집어삼켰다.

“….”

내가 완전히 얼어붙어 버린 것을 확인한 남자가 피가 말라붙어 뻣뻣해진 드레스를 위로 걷어 올렸다.

치마가 위로 올라가며 스타킹을 신은 종아리가 드러났지만 그의 목적지는 더 위였다.

반 스타킹 위로 허연 허벅지가 마저 드러나고 나서야 로건의 손이 치마에서 떨어졌다.

“같은 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같은 편이고 싶어, 지금도.”

“그렇다면 이런 무례한 행동은….”

“입 다물어.”

“….”

스타킹이 끝나는 바로 윗부분, 무릎 바로 위 허벅지에 세로로 칼날이 박혔다 나온 상흔이 보였다.

내가 만든 상처를, 로건은 유심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허벅지에 닿은 남자의 손이 세로로 난 상처를 좌우로 벌렸다.

“아아악!”

채찍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눈앞의 상대가 아파하건 비명을 지르건, 그저 제가 관심 있는 것만 들여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상처, 네가 만든 상처잖아.”

“….”

“칼날의 방향이 위를 향해 있어. 어떤 머저리가 칼날을 위로 잡고 칼을 쓰지? 이건 네가 스스로 박아 넣은 거야.”

“….”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왜 자해한 거지?”

대답 대신 봉투에서 독약 병을 꺼내 침상 위로 던졌다.

“남의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려고 하지 말고 그거나 챙겨요.”

내게 박혀있던 남자의 눈이 제 옆에 떨어진 유리병을 찍고서 돌아왔다.

“날 납치한 서제국 사람들이 가져온 독약이니까.”

“서제국이라니.”

“갑자기 서제국이 나오는 게 이상해요? 서제국에서 황궁에 끊임없이 첩자를 심어오지 않았나? 나를 추궁할 게 아니라, 그 독약이 무슨 독약인지 알아내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이 독약을 가지고 수도 내로 몰래 들어왔다면 그걸 먹이고 싶어 할 대상이 누구인지 뻔히 짐작이 가는데?”

“…젠장.”

로건이 낮게 욕을 뱉어냈다.

“내가 만든 상처 맞아요. 하지만 속인 적은 없어요. 굳이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뿐이지.”

갑갑해진 듯 목을 문지르는 그에게 말을 이었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일단 황자 전하께 가요. 언제 그들이 전하를 해치려 들지 모르는데 여기서….”

“아니, 지금 설명을 들어야겠어.”

“….”

“내가 알고 싶은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넌 여길 못 나가.”

“….”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면 첫 번째 질문은 됐어. 중요한 건 이 다음 질문이니까.”

바로 전까지 상처를 벌리며 내게 고통을 안기던 남자의 손이 목을 감쌌다.

목을 꽉 틀어쥔 손이 내 턱을 밀어 올렸다.

“왜 네가 치료제라는 걸 나일에게 숨기려 들었지?”

꾹 눌러오는 손끝에 목이 졸리며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내가 치료제라는 걸 알고 있어?’

“저주와 치료제에 관해 뭘 알고 있지? 어디서 들은 거냐.”

목을 틀어쥔 남자의 손에서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서늘해지는 턱밑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이거 봐. 당신이랑 나 같은 편 아니라니까.”

들어 올려진 턱 때문에 그를 내려다보며 조소하자, 남자의 인상이 뒤틀렸다.

“나일한텐 못 가, 치료제. 넌 지금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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