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나무문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집 안으로 진입하는 여럿의 군홧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아무도 없네.”
“혹시 몰라, 잘 수색해.”
병사들이 집안을 탈탈 털고 있었다.
물건을 들었다 놓는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갖은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심장이 쿵쿵댔다.
들키지 않길 바라는 두근거림인지, 들키길 바라는 두근거림인지.
아… 그러나 무엇을 바라든 알렉스가 끌려가 고문당해 너절해지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숨을 죽였다.
“꼭꼬?”
외벽에 바짝 붙어있는 우리를 향해, 닭장 속 닭 한 마리가 왕관 같은 붉은 벼슬을 흔들며 다가왔다.
근처로 다가온 닭이 댁들은 뉘신지, 하는 눈빛으로 목을 꺾었다.
닭의 지능이 주인과 주인이 아닌 자를 구분할 만큼 좋았던가?
머리 나쁜 사람한테 닭대가리라는 비유를 쓰는 거로 보아 아닌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꼭꼬꼬?”
아니라고 부정하듯 닭이 울음소리를 내며 목을 다시 반대편으로 꺾었다.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네가 주인이 아닌 사람을 알아볼 만큼 지능이 높은 닭이라면, 내 웃음의 의미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제발 소리 높여 울지 말아 달라는 의미로 웃으며 평화의 메시지를 보낸 순간이었다.
“꼬….”
“….”
“꼬끼오오오!”
아아.
그러자 알렉스가 안고 있던 나를 풀밭 위에 내려놓았다.
“뒷마당이 있나 본데?”
뒷문으로 모여드는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때, 알렉스가 내 손을 잡아챘다.
내 손을 꼭 쥐고서, 그가 한쪽 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
망설임 없이 내려긋는 남자의 팔 동작에,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허공이 일렁인다 싶더니 지퍼가 열리듯 부드럽게 갈라져 버린 것이다.
급박한 순간이라는 것도 잊고 입을 벌리고 있는 내 손을, 알렉스가 허공에 난 균열 안으로 끌어당겼다.
“사람 사는 집은 맞는 것 같은데 없네.”
열린 문으로 나온 병사들이 뒷마당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코앞으로 병사들이 지나갔지만, 그들은 바로 눈앞에 있는 나와 알렉스의 존재를 전혀 보지 못 하는 눈치였다.
“닭밖에 없는데?”
뒷마당엔 닭장을 빼면 낫이나 삽 같은 작은 농기구, 청소도구, 될 대로 쌓아놓은 짚더미들이 다였다.
병사 한 명이 밀짚 안을 들췄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그들은 빠르게 흥미를 잃은 듯했다.
아직도 수색해야 할 집이 수십 곳일 테니.
“가자.”
철수하려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우리를 못 본 채였다.
목구멍으로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느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현상이지?
저들이 우리를 보지 못 한다면 닿지도 못할까?
비어 있는 손을 들어 올려 앞으로 뻗었지만.
‘막혔어.’
분명 눈앞엔 아무것도 없는데, 앞을 지나가는 병사들과 나 사이에 투명한 막이 있는 것처럼 손바닥이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닿지 않아, 저들은 우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어.”
내가 가진 의문을 알고 있다는 투로 알렉스가 말을 이었다.
“이능력자야 나. 공간을 열고 닫을 수 있어.”
“….”
조금 전처럼 알렉스가 허공을 팔로 그었고, 그가 만들어 낸 공간 안에 숨어 있던 우리가 밖으로 빠져나왔을 땐 병사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후였다.
집은 도둑이 든 것처럼 난장판이었다.
“그러니까 네 걱정처럼 내가 잡힐 일은 없을 거야.”
바닥에 떨어진 장식용 나무 인형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곁으로 다가온 그에게 눈을 돌렸다.
무릎을 꿇고서 알렉스가 풀었던 족쇄를 다시 발목에 채우고 있었다.
“고마워, 나 잘못 될까 봐 걱정해줘서.”
가뿐히 족쇄를 채우고 일어선 그가 내 눈꺼풀 위에 입을 맞췄다.
“내가 잡히는 일도, 널 들키는 일도 없을 거야. 포기해, 피비.”
가슴의 움직임이 눈에 보일 만큼 몇 번이고 숨을 크게 내쉬고 나서.
- 짝
알렉스의 얼굴이 뒤로 돌아갈 만큼 세게 뺨을 갈겼다.
“너 최악인 거 알지.”
홱 돌아갔던 고개가 느릿하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모르겠냐.”
“….”
“알아, 나도.”
화끈거렸을 뺨을 손으로 감싸지도 않고 알렉스는 미소 지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가만히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내게로 그가 맞은 뺨을 비볐다.
방금 내가 갈긴 그의 볼이 뜨거웠다.
맞닿은 볼이 함께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되게 이상해, 너한테 맞으니까. 살면서 자주 맞아서 아주 익숙한 일인데도.”
“….”
“괜찮아, 답답하고 화가 나면 때려. 그래도 돼. 기분이 이상하다는 말 나쁘다는 의미 아니야. 때려서 화가 풀리기만 한다면 나는….”
“떨어지기나 해.”
“….”
닿아 있던 볼을 떨어트리는 알렉스의 얼굴이 부모를 잃은 아이 같았다.
쓸쓸한 미소를 거두며 돌아선 그가 어질러진 공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하는데 시간이 자꾸만 흘렀다.
*
알렉스가 집을 비웠지만 나는 도망갈 수가 없었다.
내 곁을 떠날 때마다 알렉스는 이미 채워진 족쇄로도 모자라, 족쇄에 달린 쇠사슬과 거실 통나무 기둥을 연결했다.
묶인 자가 쇠 구슬을 끌고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허점이 있을 거라 주시했지만 알렉스는 은근히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이걸 어쩐다.”
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만드는 쇠사슬도 나무 기둥도.
내겐 무엇 하나 자를 능력이 없었다.
주변엔 그 희귀하다는 이능력자가 넘치는데 왜 내겐 이걸 자를 능력 하나가 없을까.
“놀자~~”
“….”
“또 집에 없나?”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들려온 목소리는 문밖에 서 있었다.
“아줌마~~”
아이가 문을 콩콩 두드리며 원래 이 집에 있었을 사람들을 찾았다.
“꼬마야!”
“응?”
“꼬마야 창문으로 와 봐! 창문!!”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잠금 걸쇠가 걸려있진 않았다.
창문 아래 아이의 잿빛 정수리가 보였다.
“밖에서 창문 밀어볼래?”
“응.”
밖에서 안쪽을 향해 창문을 미는 작은 열 손가락이 보였다.
“으아. 힘이 안 들어가.”
“집 뒤에 밀집 더미가 있어. 그걸 가져다가 밟고 올라가서 밀어볼래?”
알겠다는 대답은 없었지만, 집 뒤로 다다다 뛰어가는 폭이 좁은 발소리가 들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유리창 뒤로 쑥 올라온 아이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 덜커덩
양쪽 창문이 큰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시원하게 열렸다.
“누나는 누구야? 내 친구는 어디 갔어?”
“미안, 그건 모르겠어. 대신 누나랑 놀까?”
“음….”
잿빛 머리 아이는 처음 보는 여자가 과연 제 놀이 상대로 적합한지 가늠하는 듯했다.
변덕스러워 보이는 그 얼굴이 홱 돌아서서 가버리기 전에 붙잡아야만 했다.
“무슨 놀이 할 건데?”
“영웅 놀이.”
“영웅 놀이?”
“응, 네가 영웅 역할이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아이의 표정에 그제서야 흥미가 깃들었다.
“영웅은 뭘 해야 영웅이야?”
나는 발목에 감긴 족쇄를 가리켰다.
“누나는 이것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는데, 네가 정해진 시간에 병사들을 데리고 이 집을 찾아와주면 누나는 풀려날 거야. 그럼 네가 사람을 구하는 영웅이 되는 거지!”
“흐음….”
영웅이라는 단어에 흥미를 보이던 아이의 얼굴은 다시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듯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가 의심을 지우지 못 한 채 입을 열었다.
“영웅은 공주님을 구해야 영웅인데 누나는 공주라기엔….”
“….”
이 건방진 꼬마 놈이.
그러나 여길 빠져나갈 기회를 이렇게 쉽게 차버릴 순 없었다.
“여, 영웅은 공주님도 구하고 평범한 사람들도 다 구해야 영웅인 거야. 영웅인데 차별을 하면 되겠어?”
“그런가.”
어린 남자아이들은 다들 마음속에 되고 싶은 히어로 하나 품고 있잖아.
영웅이 되는 일이라고 하면 냅다 오케이 할 줄 알았건만.
“좋아, 누나를 구해도 영웅이라고 쳐. 영웅이 되면 뭐가 좋은데? 황금 상자를 가져가서 사고 싶은 걸 잔뜩 사는 건 악당이던데.”
에라이.
사람 구하는 일보다 재물을 탐하면 평생 영웅 되긴 글렀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이제라도 본심을 알게 되었으니 협상은 더 쉬웠다.
“갖고 싶은 게 있구나, 너.”
“….”
“그럼 누나가 이거 줄게.”
한쪽 귀걸이를 빼 창가 쪽으로 들이밀자, 그 어느 때보다 관심 있는 눈빛으로 아이가 손바닥 위에 놓인 귀걸이를 살폈다.
거리가 좀 있었음에도 귀걸이에 장식된 보석이 햇살에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났다.
그제야 아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에 와야 해?”
“7시.”
“알겠어, 공주님.”
밀집 위에서 펄쩍 뛰어내린 아이가 언덕을 달려 나갔다.
돌아올 거지? 병사들을 데리고서.
넌 영웅이라기보다는 악당이지만, 믿는다. 꼬마야.
*
알렉스는 이제 당연하다는 듯 식사 준비 때마다 식칼을 내게 맡겼다.
가니쉬 용 야채 손질을 내게 맡기고서 그는 스테이크로 만들 고기를 재우고 있었다.
탁탁탁탁, 도마 위를 오가는 일정한 칼질 소리만이 부엌을 채웠다.
칼질 소리를 살짝 낮추고 말을 꺼냈다.
“나 예전에 누구를 정말 죽이려고 했던 적 있었다.”
“…왜.”
자극적인 내용에도, 그는 별 미동 없이 하던 일을 해나갔다.
돌린 등 너머로 고기를 손질하는 손이 잠깐 주춤댔으나 그뿐이었다.
“살려고. 내가 살 길 찾으려고 보니까 누구 하나를 죽여야겠더라고.”
“….”
“근데 결국 못 했어. 아마 저질렀으면 평생 후회했을 거야.”
탁탁탁.
일정하게 울리던 칼질 소리가 끊겼다.
방금까지 야채를 썰던 식칼을 알렉스의 목 아래로 가져갔다.
시린 날붙이의 느낌이 제 목에서 느껴지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저번엔 미수로 그쳤지만, 이번엔 날 방해하는 널 죽여 볼까 하는데.”
“….”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에도 후회를 안 하려면.”
“내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까?”
그의 얼굴 위로 슬픈 기색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알렉스가 예고도 없이 한 발짝 가까워지는 바람에, 살짝 대고만 있던 칼날이 살 안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다가오지 마라.
그가 더 가까워지면 정말 목을 벨 것만 같았다.
“너, 지금 네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보고나 그런 말 해.”
“….”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되네. 그렇게 울 것 같은 눈이라니.”
“안 믿기나 보네? 진짜야.”
말과 동시에 상대방에게서 거둔 칼날을 내게로 돌렸다.
은빛 칼날이 허벅지를 푹, 아니 살짝 파고들었다.
힘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아프네.
근육과 혈관이 찢어지며 붉은 피가 허벅지 위 드레스를 물들였다.
“너…!!”
상처가 난 부위를 급하게 동여맨 알렉스가 집을 뒤졌지만, 집 안엔 상처를 치료하는 데 쓰일만한 그 어느 것도 없었다.
“상처 난 곳 꾹 누르고 있어, 금방 나갔다 올 테니까.”
나를 기둥에 묶는 것도 까먹고, 문도 닫지 않고서 그는 사라졌다.
7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집 뒷마당에서 몸을 숨겼을 때, 그는 한 번 잡은 내 손을 내내 놓지 않았었다.
‘곁에 없고, 닿지도 않은 상태에서는 능력을 쓸 수 없는 게 맞지 않을까.’
자, 이제 계획했던 대로 알렉스를 떨어트리긴 했는데 그 꼬맹이가 과연 병사들을 불러줬을까.
아니면 이 족쇄를 끌고서라도 나가야 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