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식탁에서 일어난 알렉스가 내 앞에 놓인 다 먹은 그릇들을 가져갔다.
설거지를 하기 위해 소매를 걷는 남자의 너른 등이 여전히 낯설었다.
“이유가 뭐야.”
“어?”
물소리 때문에 묻는 말을 듣지 못 했는지, 그가 설거지를 하다 말고 뒤를 돌았다.
“왜 여자인 척했냐고. 자의야 타의야.”
단순히 가짜 치료제 행세를 위해서 한 여장이라고 보기에는, 첫 만남 때부터 여장 중이었으니까.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어.”
“….”
언뜻언뜻 내비친 그의 가정 상황으로 보았을 때.
자의로 그랬다기보다는 타의나 강요에 가까웠겠지, 라는 추측을 했다.
그럼에도 알렉스가 명확히 타의였다고 대답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그 상황을 깨고 나오지 못 했다는 자책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점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언제부터 여장하고 살았는데.”
“6살이었나.”
어휴, 사리 분별도 못 하는 6살짜리를. 속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어서 네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활을 강요한 거야 등등.
속에서 화도 일고 궁금증도 일었지만 더는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가 바라는 일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안쓰럽지만 감정적인 동요를 보이진 말아야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자, 알렉스도 침묵을 지켰다.
중간중간 말소리 대신 그의 손에서 미끄러진 그릇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이제 그릇이 부족할 테니 저녁엔 밥을 손에 쥐고 먹어야겠네. 야만스럽게 손으로 먹게 할 거면 나 풀어줘라.”
“….”
무시하긴.
비꼰 이후로 알렉스는 그릇을 깨지 않았다.
설거지하는 물소리만이 잔잔히 부엌을 채웠다.
동요하던 감정을 갈무리하며 물끄러미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던 내 눈에 갈색 종이봉투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식탁 구석에 반이 접혀있는 종이봉투.
빈 봉투면 진작에 버렸을 테니 뭔가 들어있겠지.
아까 나갔다 오면서 후식이라도 같이 사 왔나 싶었다.
‘유리병?’
처음 보는 물건임에도 이상하게 익숙한 작은 유리병을 손바닥에 올렸다.
아, 왜 익숙한가 싶었는데 이 유리병.
‘마비 독이 담겨 있던 유리병이랑 같은 모양이네.’
서제국의 2황자를 때려눕히게 해줬던 유용한 독약이었지.
그럼 이건 뭘까.
유리병을 가볍게 흔들자, 투명한 분홍빛 액체가 찰랑거렸다.
잠깐만 이거….
“이거 뭐야.”
막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던 알렉스의 얼굴 위로 당황의 빛이 서렸다.
“별거 아냐. 먹는 건 아니니까 손대지 마.”
“아 그래?”
“응.”
그가 수납장 안쪽으로 유리병이 든 종이봉투를 깊게 밀어 넣었다.
와 이걸 어떡하지.
- 날 데리고 어디로 갈 생각인데.
- 서제국.
어제 그의 목적지가 서제국이란 얘길 들었을 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왜 하필 서제국이지.’
내게 보여준 저주에 관한 문서는 어떻게 구한 거지?
축제 첫날, 내가 첩자를 찾으러 술집을 뒤질 때, 알렉스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온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근데 왜 서제국이야? 네 연고지도 아니잖아.”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기로 했어.”
아는 사람 누구.
첩자로 활동해주는 대신 네게 어떤 보상을 약속한 사람이니?
“성격이 더러워서 친구라곤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별로 안 친해.”
“….”
한시바삐 도망쳐야 한다.
시간이 넉넉한 줄 알았지.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는 친구의 마음을 돌려놓을 시간이 내게 있는 줄 알았지 뭔가.
‘알렉스가 첩자였다니.’
유리병에 든 분홍색 액체는 독약일 거다.
나일에게 알려야 해, 그가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빨리 가야만 했다.
*
“자자~ 이 음료가 무엇이냐 하면.”
호객 행위를 하는 남자 앞으로 어린 것들이 조르르 앉아 있었다.
남자의 손에 들린 음료의 색은 장미를 녹여낸 듯 분홍빛이었다.
보기만 해도 혀가 달짝지근해지는 느낌에, 아이들은 혀 아래 모이는 침을 꼴딱꼴딱 삼켜댔다.
“거기 아줌마! 이걸 마실 기회를 놓칠 생각이야? 공짠데도? 천하의 바보 같으니.”
남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앞을 지나가던 중년 여성을 불러 세웠다.
맞아, 그냥 가면 바보야!
곧 음료를 맛볼 생각에 신이 난 아이들이 호객꾼의 말을 따라 했다.
어른의 눈에도 생전 처음 보는 음료였다.
제 손을 이끄는 아이에게 이끌려 중년 여성도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게 무엇이냐, 머나먼 동방 해역을 건너온 장미 꽃차다 이 말씀이야.”
신비로운 동방 나라 사람들한테 아주 인기인 차인데, 이게 제국에서도 먹히는지 알기 위해 무료로 시음 중이다, 하고 말했다.
맛이 어떻고 또 효능은 어떻고, 호객꾼이 큰 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가자 축제를 즐기러 나온 주변인들이 몰려들었다.
드디어 남자가 음료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럼 귀여운 아이들부터.”
벌어진 작은 입으로 분홍빛 액체가 호로록 넘어갔다.
와아! 맛있어!
혀에 감기는 환상적인 단맛에 아이들이 기쁜 소리들을 냈다.
“장미 꽃차라고? 정말 달고 맛있네.”
음료에 대한 칭찬은 어른들의 입에서도 나왔다.
여럿이 모여 즐거운 얼굴로 음료를 마시는 모습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그 중에 민트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도 껴 있었다.
그가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음료가 쌓인 매대를 돌아 뒤로 들어섰다.
“자.”
호객꾼이 아닌, 매대 뒤에 있던 남자가 알렉스를 알아보고 음료를 내밀었다.
제 앞으로 내민 분홍빛 액체에 알렉스가 거칠게 얼굴을 구겼다.
“뭐 하는 짓이야.”
“아? 아니~ 마시라는 게 아니라 냄새를 맡아보라고. 냄새를 알아야 이게 들어간 음료를 구분해서 피할 수 있을 거 아냐.”
여전히 구겨진 얼굴로 잔을 받아든 알렉스가 음료를 코 밑으로 가져갔다.
향긋하고 단 장미향이 올라왔다.
“하나뿐인 내통자가 괴물로 변해서 말이 안 통하게 되면 우리는 어쩌라고.”
심술궂은 인상의 남자가 상스럽게 웃으며 알렉스에게 재미없는 농담을 이어갔다.
“당신이 괴물로 변한 모습이 정 궁금하거들랑 마셔보고. 큭큭, 말리지는 않을게.”
농담을 건네든 말든,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서 알렉스는 매대 앞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제 막 머리카락이 자라나기 시작한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여자.
음료를 마시는 와중에도 서로 꼭 손을 쥐고 있는 연인.
깔깔대며 뛰어노는 아이들까지.
별다를 것 없는 안온한 일상의 한 장면이었다.
“변이가 일어나는 게 몇 시간 후라고 했지.”
“비교적 천천히 중독돼. 빠르면 24시간, 늦으면 36시간?”
“그렇군.”
알렉스는 별 반응도 해주질 않는데, 남자는 여전히 껄렁대는 게 즐거운지 웃는 낯으로 말을 걸었다.
“왜 쓸쓸한 표정이야? 이제 와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나 봐”
“아니, 그래서가 아니라….”
분홍빛 액체가 사람들의 목구멍으로 넘실넘실 넘어갔다.
“다 죽어버렸으면 싶어서.”
“…의외네.”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어야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미련도 없겠지.”
“….”
놀려먹기 좋은 샌님인 줄 알았더니 그냥 돈 놈이네, 라고 생각하며 실없는 농담을 즐기던 남자는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아.”
생각났다는 듯, 남자가 작은 유리병을 알렉스에게 건넸다.
“휘발성이 강하고 소량으로도 충분하니까 알아서 잘 쓰라고.”
알렉스가 품에 든 종이봉투 안에는 당근, 양파 등의 식재료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유리병이 깨지지 않게 소중히, 그가 식재료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유리병을 밀어 넣었다.
*
동제국 병사들은 수도를 중심부터 이 잡듯 뒤져나갔다.
수색은 빨랐고 병사들이 수도 변두리에 도착하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교적 늦은 점심을 먹는 모양인 건너편 집 굴뚝에서는, 팔팔 끓는 토마토 스튜 냄새가 연기와 섞여 올라왔다.
무슨 음식을 하는지 냄새로 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알렉스는 냄새가 들어오는 열린 창 앞에 서서, 긴장해 굳은 표정으로 옆집을 훔쳐보았다.
네 명? 다섯 명인가?
몇 명 되지 않는 병사들이 옆집 앞에 모여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집주인으로 보이는 자가 밖으로 나왔고,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스러운 손짓을 보이는 주인을 세워두고서 병사들은 거세게 집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무슨 연유로 집을 수색하는지는, 일단 들어가서 수색하며 설명할 요량으로 보였다.
병사들의 강압적인 태도로 보아, 아마 집주인이 문 열기를 거절했다면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도망치지 그래?”
“….”
“너랑 나를 찾는 병사들이야. 그들에게 네가 날 납치했다고 다 말할 거야.”
그러니까 제발 이제라도 나를 이곳에 두고 도망가 줘.
나는 그가 있는 황궁으로 돌아갈 거고, 너는 잡히지 말고 어딘가로 떠나서 잘 살았음 좋겠단 말이야.
목구멍에 걸린 뒷말을 삼켰다.
“….”
아, 작은 집이라 볼 것도 많지 않았나 보다.
동제국 병사들이 옆집을 나왔다.
옆집보다 살짝 언덕 아래에 있는 이 집으로, 그들이 군화발로 잔디를 지르밟으며 가까워졌다.
알렉스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애가 탔다.
잡혀서 이 모든 게 밝혀지면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이라도 꽁지에 불 붙은 것 마냥 도망가야지 가만히 서서 뭐하냐?
“알렉스! 뭐해.”
움직여!
소리치자 그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아직도 포기 못 했어? 네가 저 병사들을 혼자서 상대할 수 있어? 끌려가서 죽는다고.”
아니지, 죽는 게 문제야?
첩자로 활동한 게 밝혀지면 오만 끔찍한 고문을 당하다가 차리라 죽여줘라, 외치게 될 거라고!
답답해 소리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스는 한 팔로는 등을, 남은 한쪽 팔로는 허벅지 아래를 받쳐 나를 안아 들었다.
“그렇게 나 걱정하는 말 좀 하지 마. 끌려가서 죽기 전에 설레 죽겠으니까.”
“아이씨.”
이 또라이.
알렉스가 날 안아 들고서 집 뒷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원래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 키웠던 모양인지 닭장 속에 든 닭 몇 마리가 우리를 반겼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소리 지를 거야.”
“질러.”
무심하게 답하며 그가 뒷문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집 앞에 도착한 병사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계십니까?”
“….”
품에 안겨 알렉스를 올려다봤다.
지르고 싶다면 질러, 라고 말하는 듯.
알렉스는 내 입을 막지도 않고서 날 지켜볼 뿐이었다.
입만 뻥긋하면 병사들이 이 작은 집을 빙 돌아서 날 발견하겠지.
그럼 나일에게로 갈 수 있다.
그리고 알렉스는.
“….”
“안 계십니까?”
“없는 것 같은데.”
“문 따.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