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남자였어.’
가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해도, 그냥 가끔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가시나라고만 생각했고, 감정을 숨기는 일이 능숙하지 않아서 그렇다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그냥 사내놈이라 그런 거였다니.
평소 워낙에 스스럼없이 끌어안고 장난치던 사이라 체취가 너무나 익숙했다.
그 익숙함이 자꾸만 판단력을 흐렸다.
얘 분명 알레난데, 내 친구 알레나.
그런데 이 남자는 누구지.
어쩌다 하루는 안 끼거나 다른 걸 낄 법도 한데, 만날 똑같은 저 반지를 손에 끼고 다니지 않았었나.
눈치가 있다고도 자신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이리 없는 줄은 몰랐다.
눈치가 없어도 참 더럽게 없었구나, 나.
“남자였구나.”
“…응.”
“진짜 이름 알려줘.”
“……알렉스.”
친구를 속여먹었다는 자각은 있는 건지 짧은 대답에서 망설임이 묻어났다.
진짜 이름을 말하며 알레나, 아니지 이제 알렉스는 두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성별이 바뀐 친구의 납작하고 단단한 가슴이 내 코끝을 짜부라트렸다.
이리 판판한 가슴을 매번 끌어안으면서 몰랐단 말인가.
“단순한 호기심인데, 속임수 보석이 외형뿐만 아니라 성별도 바꾸는 게 가능한 거야? 그러니까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던 것을 만들어 주고, 있던 것을 없애 주는.”
“그러진 못해. 착용 중에도 없던 것은 계속 없었고 원래 있던 건 계속 있었어.”
“그랬구나. 그럼 내가 그냥 눈썰미가 정말 없었던 거네.”
“필요할 땐 천 뭉치를 넣거나… 신경을 썼으니까.”
“응, 그렇게 나를 속였구나.”
마지막 말에서 나를 끌어안은 남자의 말이 뚝 끊겼다.
알레나, 아우 씨 젠장, 알렉스는 조심스럽게 숨만 들이쉬고 내뱉고를 반복할 뿐이었다.
“우리 이제 친구라는 관계마저도 놓아야 할까.”
질문을 해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투였다.
이름이 알렉스라는 것을 알았고, 성별이 남자라는 것도 알았지만 어제의 내가 알던 알레나와 오늘의 알레나가 다르진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나를 속인 이 녀석에 대한 괘씸함이 생겨났고, 왜 속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 속내가 궁금해졌다는 것뿐.
“손 묶은 거 풀어주면 계속 친구야.”
“묶은 거 풀어주는 순간 황궁으로 뛰어갈 거잖아.”
“그럼 친구 포기해.”
단호하게 말하면 알겠다며 풀어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를 품에서 떼어내 벽에 기대 앉힌 알렉스의 얼굴은 타격이라고는 전혀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차피 널 데리고 도망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친구는 포기했어.”
“….”
“널 속이고 이곳에 가둔 순간부터 난 네 친구도 될 수 없겠지, 내가 너의 뭣도 아니라도 좋아. 하지만 계속 살아있는 널 볼 수 있어. 그걸로 족해. 그러니까 놓아줄 순 없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알렉스가 귀 뒤로 넘겨주었다.
네 행동이 치 떨리게 싫고 끔찍하다는 표정을 얼른 지어서 보여주자.
그래야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은 이 머저리가 정신을 차리겠지.
“….”
그러나 치가 떨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긴 커녕, 속절없이 쓰라려가는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망할 납치범을 이해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내가 진짜 짜증나는 친구를 사귀고 말았구나.”
적어도 그 말 한마디는 그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데 성공한 건지, 내내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알렉스가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얼굴이 무언가를 참아내려는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 바보 같은 새끼야, 만약에 방법이 없다 해도….”
“….”
“내가 죽겠다잖아. 보내 달라고 이 납치범아.”
“미안, 미안. 안 돼.”
“안 들어줄 거면 꼴 보기 싫으니까 저리 꺼져.”
“그래.”
순순한 대답을 내놓고서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낡아 빠진 나무 바닥이, 멀어져가는 알렉스의 발걸음에 맞춰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
치료제와 그 시녀가 하룻밤 새 종적을 감추었단다.
황족이 직접 공식적인 발표를 하지 않았음에도 황궁인들 사이에 퍼진 소문은 단 몇 시간 만에 궁을 점령했다.
황자가 완쾌되었으니 치료제 앞에 남은 것은 막대한 보상을 수령하는 일 뿐이었다.
잔인한 형벌을 앞둔 사람도 아니고 금은보화를 손에 쥘 일만 남은 사람이 왜 스스로 종적을 감춘단 말인가.
그러니 이것은 자의가 아닌 누군가에 의한 실종이로구나, 사람들은 모두 그리 여겼다.
유례없던 일에 황궁이 뒤집힐 줄 알았지만 의외로 황궁은 잠잠하기만 했다.
소란이 일긴 했지만 황궁은 예정된 축제 일정을 차례대로 진행해 나갔다.
잠잠하지 못한 이는 동제국의 황자 나일 리베르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소화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축제의 2일 차와 3일 차의 일정을 모조리 무산시켰다.
황제는 창백해진 얼굴로 황궁을 들쑤시고 다니는 제 아들에게.
- 그나마 치료가 끝나고 사라졌으니 걱정거리가 크게 줄지 않았느냐. 천천히 찾아보면 된다.
하였지만, 나일은 병사들이 돌아다니다 보면 소식을 주워와 주겠지, 여기며 차분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사실은 그가 아직 덜 치료되었기 때문에?
아니, 그에겐 이 일은 치료제가 사라진 일이 아닌, 그 여자가 사라진 일이었다.
그녀가 위험에 빠졌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그를 잠식해 들어갔다.
축제 첫날인 어제는 온화하게 웃고만 있던 황자가 넋이 나가 사방팔방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모습에.
오죽하면 황궁 사용인들의 입에서는 사실은 치료가 덜 끝난 게 아니냐는 말이 추가로 흘러나왔다.
그것도 아니면?
황자가 치료제의 시녀를 데리고 놀았다던데, 저러는 것을 보면 놀이가 아닌 진심이었던 거 아니야?
등등의 말들이 돌았다.
*
후페이 노공의 입에 물려 있는 것은 나뭇결이 고급스러운 목제 파이프였다.
파이프 담배의 몸통에서 흘러나온 매캐한 담배 연기가 방안으로 흩어졌다.
오늘 오전 그는, 황제와 황자의 다툼을 목격했다.
축제 일정을 예정대로 소화하라는 황제와 실종된 두 명을 찾아 나서겠다는 황자가 대립각을 세웠다.
사이좋은 부자 사이었던 만큼 갈등은 금방 해소되었지만, 여느 때와 다르게 끝내 의견을 관철한 쪽은 황자 쪽이었다.
“로건아.”
“예. 할아버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손자에게서 즉각 대답이 나왔다.
“네게 이런 일을 시켜 미안하구나.”
“제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나일 그 아이를 보면 먼저 간 내 아이가 생각나. 쉽게 정을 주고 마음이 여린 점이 내 아이를 생각나게 해.”
이제는 세상에 없는 손자의 아버지이자 하나뿐이었던 자신의 아들.
“아직도 생각해. 싫다는 애를 억지로 떠밀면 안 되는 거였다. 그 애는 나처럼 비정한 인간이 아니었는데, 내 아들이니 나 같은 족속일 거라 생각했지 뭐냐.”
멀쩡한 아들을 잃은 노인의 회한만큼 희뿌연 담배 연기가 그의 얼굴을 가렸다.
리베르 황가와 역사를 함께 해온 후페이 공작가에선 오래전부터 비밀스러운 일을 수행해 왔다.
그것은 황자 몰래 제 기능을 다 한 치료제를 세상에서 지우는 일이었다.
전 치료제를 도맡은 이는 로건의 아비였고, 그 전대는 후페이 노공이었다.
그러나 유약한 기질을 타고났던 아들은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해야만 하는 자신의 소임 앞에서 좌절했다.
전 치료제의 저택 앞까지 갔던 그는, 그 문턱을 넘지 못한 채 뒤돌아섰고 근처 낭떠러지 위에서 몸을 날렸다.
“다행인 점은 이번 대는 치료제에게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점이구나.”
아들을 대신해서 치료제를 처리하고, 후에 그 모든 사실을 황제에게 알렸을 때를 생각하면 이번 대의 황자가 애정을 품은 대상이 치료제가 아니라는 점은 정말이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자신을 구원해준 대상을 죽여야만 하는 운명이라니, 그들이 직접 하긴 실로 어려운 일이지.”
후페이 노공은 창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빠진 손자의 무릎 위에 손을 두었다.
“너는 네 아비를 닮지 않았다. 넌 나를 닮았어.”
“….”
“나일이 끝까지 모르게 처리해야 한다. 그 아이는 버티지 못할 거야.”
“….”
“반드시 먼저 찾아라. 찾아서 죽여.”
“…예. 할아버지.”
로건은 무릎 위에 올라가 있는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바라보며 속으로 답했다.
해야만 하는 일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쟁에서 이미 수많은 병사를 죽인 제게는 어렵지도 않은 일일 겁니다.
다만, 둘이 함께 있다면 치료제의 제거를 그 녹색 눈의 시녀에게만큼은 들키지 않으려 합니다.
그 여자는 흔치 않게 나일이 아끼는 사람이니까.
*
절거덕 소리와 함께 족쇄가 잠겼다.
계속 손을 등 뒤로 묶어두는 건 자기가 생각해도 아니라고 느꼈는지, 잠깐 집을 나간 알렉스가 어딘가에서 커다란 족쇄를 구해온 것이다.
발목에 채워지는 족쇄를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절하게 낡아빠진 족쇄에는 군데군데 붉은 녹이 슬어있었다.
“야 이거 녹슨 거 봐. 쇳독 오르는 거 아냐? 이게 최선이야? 어차피 계속 감금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면 건강하게 감금되고 싶은데.”
“….”
“그러기 어려울 것 같아? 그럼 풀어주든 가아~”
“건강 챙겨 줄게.”
발버둥 치는 나를 뒤로하고 일어선 알렉스가 부엌으로 걸어갔다.
그나마 천으로 묶였을 때는 풀어볼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는데 이건 무슨.
‘진짜 수감자가 따로 없네.’
“나 벌써 발목 간지러운 느낌 드는데?”
“….”
“건강을 뭐 어떻게 챙겨 준다는 거야.”
“….”
“교도관님, 수감자의 인권은 어디로 실종된 건데요.”
수감자의 인권 상실 문제를 빌미로 계속 주절거리며 풀어주기를 요청했지만, 부엌으로 간 그는 꿈적도 하질 않았다.
에이씨 독한 놈.
“점심거리 사 왔어. 영양가 있는 음식 해줄게.”
갈색 종이봉투 안에서 이것저것 식료품을 꺼낸 그는 바로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이라니.
쟤 음식을 직접 해본 적도 없지 않나?
영양가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먹을 수 있는 걸 만들어 내는 게 저 손으로 가능한 거냐고.
“나 맛없으면 안 먹는다.”
“….”
“자신 없어? 그럼 풀어주든가.”
“….”
아주 사람 말 무시하는 게 습관이 됐구만.
물로 재료를 헹구는 옆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다가 열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딱 봐도 동제국 수도 안이거나 수도 근처의 민가 같은데.
황궁에선 이미 실종되었다는 걸 알았을 테고, 수많은 병사가 수색에 나서면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알렉스는 왜 날 여기에 묶어두고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걸까.
“언제 떠나?”
“뭐?”
갑자기 질문을 받아서 놀랐는지, 알렉스가 들고 있던 칼로 나무 도마를 콱 내려쳤고, 거친 칼질에 튕겨 나온 당근 조각이 포물선을 그리며 내 발치로 떨어졌다.
“여기 계속 있을 생각은 아닐 거 아냐.”
“오늘은 아니지만 곧 떠날 거야.”
“날 데리고 어디로 갈 생각인데.”
“서제국.”
“….”
“서제국에 있다가 치료제를 잃은 황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빌론으로 갈 거야. 그때쯤이면 너도 가족들이 그립겠지.”
“지금도 보고 싶어. 그러니까 풀어줘.”
“보고 싶다는 애가 죽을 생각을 했냐.”
어차피 떠날 계획이라면 축제로 정신없는 3일 안에 떠나는 게 여러 가지로 좋을 텐데.
“왜 오늘 안 떠나는데.”
“해야 할 일이 남았어. 그 일만 마무리하고 바로 떠날 거야.”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서투르기 짝이 없는 칼질을 이어나갔다.
“너 요리 해 본 적은 있어?”
“있겠냐.”
“….”
들려오는 어설픈 칼질 소리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발치에 떨어진 당근 조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음식이길래 당근 조각이 저렇게 큰 걸까를 고민하던 나는, 못생긴 당근 조각과 내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후….”
한숨을 나직이 내쉰 후 일어섰다.
족쇄에 달린 쇠 구슬이 참 무겁고도 무겁구나.
쇠사슬이 나무 바닥을 긁으며 소리를 냈고, 쇠 구슬을 질질 끌고 제게로 다가오는 내 모습을 힐끗 본 그가 도마로 고개를 돌렸다.
“칼 줘. 내가 썰 테니까.”
“….”
옆에 선 내게로 그가 칼을 건넸다.
당근 해체 후엔 양파를 썰고 있던 모양인지, 도마 위에 양파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칼을 받아드는 내 옆모습을 훔쳐보는 알렉스의 눈이 젖어있었다.
양파를 썰어보긴 커녕, 식칼을 쥐어본 게 처음이겠지.
“눈 비비지 마. 양파 썰다 눈 비비면 눈 매워.”
“응.”
쌍욕을 해도 모자랄 악질이거나, 좋은 친구거나 둘 중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도 저도 아닌 이 새끼가 제일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