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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94)화 (94/134)

94화

“나 안 가.”

“뭐?”

확고해 보였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까짓 거 하지 뭐. 시한폭탄? 해, 한다고.”

미안, 두 눈으로 눈물 질질 흘리면서 이런 말 하면 신뢰감 제로라는 거 알겠는데.

눈물도 흘려야겠고 거절도 해야겠다.

“여기 남아서 해결할 방법을 같이 찾을 거야. 터지기까지 시간 있잖아. 어떻게든 찾으면 돼.”

알레나는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진실을 알고 난 후에도 변함없는 내 태도에 분노가 인다는 듯 그녀는 맨 얼굴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러댔다.

“왜 저들이 계속 치료제들을 죽여 왔는데,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야. 모르겠어?”

“레나야, 나 안 간다고. 그러니까 어서 가. 어떻게 이 문서들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거짓말했을 리는 없으니까.

고마워. 궁금해하던 걸 속 시원히 알게 됐어. 여기서 헤어지자.”

더 말해봤자 이제까지의 대화가 반복될 뿐이었다.

손에 들려있던 문서들을 건네는데 알레나가 받질 않고 가만히 있길래, 말없이 그녀의 가방을 열고 다시 서류를 집어넣었다.

볼에 흐른 눈물 자국을 문질러 지워냈다.

울지 말자. 울기보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때잖아.

웃는 얼굴로 느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알레나에게 애써 웃어 보인 뒤 몸을 돌렸다.

“미안.”

등 뒤에서 짤막한 사과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검은 그림자가 눈앞을 뒤덮었다.

*

“으.”

눈을 떠보니, 술을 진탕 먹고 깨어났을 때처럼 머리가 아파 왔다.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몇 번이나 깜빡이고 나서야 시야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인 건, 말린 음식들이 대롱대롱 매달린 층고가 낮은 천장이었다.

주로 머물던 집들이 층고가 하늘처럼 높은 고급 저택이나 황궁이었으니, 성인 남자 중에서도 키가 큰 자라면 후천적 척추 장애를 얻을 것만 같은 이 낮은 천장이 적응이 될 리 만무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어느 민가의 거실 겸 부엌쯤 돼 보이는 공간이었다.

조금 더 집안을 살피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그제서야 몸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누워있는 몸을 일으키려면 손으로 바닥을 짚어야 했는데, 손이 등 뒤에 묶여서 빠지질 않는 상태였다.

‘적어도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네.’

마지막에 어떻게 됐더라.

기억이 끊긴 순간을 더듬더듬 짚어나가자 떠오른 얼굴은 민트색 눈동자가 맑고 싱그러운 알레나의 씁쓸한 얼굴이었다.

만약에 내가 축제를 즐기느라 정신없는 귀족 영애를 납치해 크게 한탕 해보려는 납치범에게 납치된 상황이라면, 알레나도 이곳 어딘가에 묶여 있을 것이었다.

일단 생존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묶인 손을 빼보려 애벌레처럼 꿈틀대는데.

“꼼꼼히 묶어놨어. 그렇게 힘주면 빠지진 않고 손목에 상처만 날 거야.”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에 반동을 줘 홱 돌아누웠다.

조금 전엔 보이지 않았는데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다 굴러 나온 걸까.

아마 나처럼 구속된 처지일 테니 알레나도 바닥을 구르고 있겠지 싶었으나, 눈에 들어온 건 서 있는 사람의 발과 다리였다.

시선을 위로 쭉 들어 올리자, 안타까운 얼굴을 한 그녀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묶인 거 풀었네? 여기 어딘지 확인했어? 우릴 납치한 사람들은 어디 간 거야?”

“….”

“곧 인간 시한폭탄이 될 거란 사실을 알자마자 납치라니 내 인생 너무 다이나믹한 거 같아.”

궁금했던 것들을 와르르 쏟아내고선 그녀가 행동하기를 기다렸다.

이제 알레나가 곁으로 다가와 손목에 묶인 천을 풀어주고선 그녀가 알아낸 사항들을 나와 공유해 주겠지.

그러나 그녀에게서 나온 대답은 아주 의외의 것이었다.

“풀리지 않게 묶어놓은 거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줘. 계속 버둥거리면 아예 다른 곳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야 하는데 그건 더 갑갑해서 힘들 거야.”

“어?”

바보 같은 반응이 튀어나왔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을 쳐다보았다.

“…날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 설마 너야?”

“뭐 좀 먹고서 얘기하자. 머리 많이 아프지?”

“레나야.”

“….”

“야 알레나 멘데.”

“….”

“뭐 하는 거야, 하나도 재미없어. 이거 풀어 빨리.”

곁에 쭈그려 앉은 그녀가 저 멀리 쓸려가 있던 베개를 가져와 툭툭 털더니 내 머리 아래로 집어넣었다.

“바닥 딱딱하니까 베고 있어, 아니면 앉아 있을래? 일으켜 줄까? 침대방이 있긴 한데 눈길 닿는 곳에 두고 싶어서.”

“너 이거 뭐 하는 거냐고.”

“뭐 하는 걸로 보이는데.”

“….”

와, 얘가 왜 이러는 거지.

받은 질문은 모조리 패스하시고 도리어 내게 물어오는 바람에, 나는 한껏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돌려주었다.

“너 황자를 살리고 죽을 생각이잖아.”

“….”

나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렸을까.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어서,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시도해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뭐, 죽어야지. 이런 마음 아니야? 넌 죽으면 끝이야? 그렇게 죽은 너를 기억할 남은 사람들은 전혀 생각 안 해?”

무릎을 꿇고 앉아서, 허물어지는 상체를 낡은 나무 바닥을 손바닥으로 짚어 버티면서, 고개를 떨군 채.

알레나는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궜다.

눈물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나무 바닥에 짙은 색 동그라미들이 생겨났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아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는지, 큰 눈으로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입으로는 엉엉 우는 소리를 하염없이 쏟아냈다.

두 손이 뒤로 묶여 있는 탓에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왕 굼벵이처럼 몸을 꿈틀대고 나서야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다.

겨우 일어나 앉아, 앉은 자세로 꾸물꾸물 기어가 고개 숙인 아이의 머리를 볼로 비볐다.

“미안, 미안해.”

“너는 세상에 사랑하는 게 그 남자밖에 없어? 다른 사람들 생각은 안 하냐고. 널 사랑하는 가족은? 나는? 네가 죽을 걸 아는데 나 혼자 도망가서 다른 치료제들처럼 너 실종되었단 소식을 들으면, 아 네가 죽었나 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계속 살면 되는 거냐?”

“아이 정말. 야, 나 아직 안 죽었어. 살아있다? 봐봐. 내 얼굴 봐.”

여전히 바닥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악을 써대는 알레나의 머리를 이마로 부볐다.

내 얼굴을 좀 봐달라는 의미였다.

손을 사용할 수가 없으니 불편해 죽겠구만.

‘이 아이, 그새 내게 정을 이만큼이나 주었구나.’

나 대신 얘가 다친다고 생각하면 너무 싫었으니까.

알레나를 피신시키는 일에만 열중하느라 이 아이의 속이 이 정도로 까매진 줄은 정말 까마득히 몰랐다.

신경 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신경을 못 쓴 것도 사실이어서 할 말이 없긴 했다.

이제 와서 알았다고, 황자 같은 건 버리고 너랑 같이 도망갈게, 라고 말을 바꿀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날 위해 마음 아파하며 펑펑 우는 애를 보니 심장이 눅진하게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나 최~ 대한 시간 끌거야.”

“….”

“당장 내 몸에 문양을 없애가며 그를 완쾌시키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어느 정도 시간은 있겠지. 방법을 찾아보면 돼. 그래도 못 찾으면 음….”

“….”

“위로할 땐 거짓말도 용서해 주겠지? 나 도망갈게 그럼. 그러니까 울지 마.”

“끝까지 고집은 안 꺾는구나.”

응.

사실 나도 내가 이렇게 확고하게 결정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추측하고 의심할 때만 해도, 내가 해를 입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도망이라도 쳐야 하나.

고민 참 많이 했는데 말이지.

막상 이렇게 봉투 안에 들어있던 카드가 깔끔하게 죽음! 이라고 나오니까 말이야.

최악의 결과가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되게 명확해졌어.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 고민하는 게 그렇지 않아도 지겨웠는데, 오히려 가야 할 길이 하나라는 걸 알고 나니까 홀가분해진 느낌이랄까, 그러네.

“미안, 마음 아파하는 걸 보니까 나도 참 마음 저린데, 바꾸진 않을 거야. 그래도 울지 마. 너 우는 거 싫어.”

그만 울라는 의미로, 고개 숙인 그녀의 관자놀이를 코로 쿡쿡 찍었다.

“응? 울지 마. 야, 손이 없으니 위로가 너무 힘들다. 좀 풀어줄래?”

내 말에 알레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에휴. 엉덩이를 꼼지락거려 더 가까이 다가간 후에, 그 아이의 얼굴을 잔뜩 적시고 있는 눈물을 볼로 훔쳐냈다.

“자, 손이 없어서 얼굴로 눈물 닦아줬다. 이제 끝.”

새액새액.

우느라 크게 오르내리던 어깨의 움직임이 잦아들며, 알레나의 숨소리도 점점 평안을 찾아간다고 느낄 때였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두 손이 얼굴을 감싸는가 싶더니.

“…?”

울음을 토해내느라 아직도 식지 않은 뜨거운 입술을 그 아이가 부딪혀 왔다.

순간 입술에 닿은 축축한 살덩이의 느낌에, 놀라서 상체를 뒤로 뺀 건 너무나 당연한 처사였다.

그러나 내 뒤엔 벽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고, 손도 묶여 있었으니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며 뒤통수가 깨질 게 뻔했기에.

‘윽.’

고통을 예감하며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내 뒤통수로 파고든 건 고통이 아닌 알레나의 손이었다.

손으로 내 머리를 받치고서 그녀가 나를 부드럽게 바닥으로 눕혔다.

‘얘 눈빛이 왜 이렇게 달짝지근하지.’

친구가 친구를 바라보는, 내가 아는 모든 눈빛 중에 저런 눈빛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즈음.

- 쪽

이마에 상대의 입술이 가볍게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진짜 이상한데 방금? 되게 이상한데?

“레나야?”

의문들로 복잡해지는 머릿속이 잔뜩 좁힌 내 미간에서 충분히 표출되지 않았나 싶다.

왜 얘가 나한테 입을 맞춰?

앉은 자세로 누워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알레나의 눈빛이 흐릿해져 갔다.

“야….”

이거 무슨 상황이냐고.

살짝 흐트러진 제 긴 머리를 그녀가 쓸어 넘겼다.

그리곤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늘 끼고 다니던 반지로 한 손을 가져갔다.

잠깐 딴생각을 하는 듯, 손가락에 낀 반지를 잡고 돌리는 그녀의 모습을 숨을 멈춘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툭, 알레나가 빼 던진 반지가 빙그르르 바닥을 돌았다.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던 반지가 툭 바닥에 눕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어떠한 하나의 생각으로 점점 더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상대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옅은 숨을 들이켠 뒤, 반지에 꽂혀 있던 시선을 나를 바라보는 자에게로 돌렸다.

“미안, 사과는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해.”

똑같은 민트색 눈동자, 똑같은 민트색 머리카락이지만 짧아진 머리.

알레나와 남매 사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아 있는 얼굴.

어딘가 익숙하지만 처음 보는 남자가 내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방금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로, 그리고 다시 울 것 같은 얼굴로.

“좋아해서 미안하다.”

포박당해 쓰러져 있는 나를 남자가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당신을 모른다 부정하며 몸을 버둥거리고 싶었지만, 낯선 남자의 품 안에서 풍기는 익숙한 친구의 체취를 모른다 할 수는 없었다.

알레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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