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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93)화 (93/134)

93화

나는 입매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그를 좋아하기 전에는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가 중요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그냥 좋아할 뿐이야. 좋아해. 이제 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해도 아마 좋아할 거야. 내가 그 특별한 경우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남들한테 어려운 일이면 내게도 어려운 일이잖아.”

웃는 내 표정을 따라 하려는 듯 그녀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신뢰할 수 없어도 좋아할 거라니,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대답이니 알레나도 아마 나를 바보 같다 여겨 저런 이상한 표정인가보다, 그리 여겼다.

*

가는 길을 배웅해 달라는 알레나의 요청에, 황궁을 빠져나온 우리는 말 위에 올라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밤늦게까지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인해, 말은 걷는 게 고작이었다.

여기저기서 폭죽을 쏘아 올렸고 골목길마다 왁자지껄 술 취한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걷는 말발굽에 사람들이 버린 각종 쓰레기가 채였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후드를 깊게 눌러 썼다.

고개를 돌려 무대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뒤로 멀어지는 무대 위, 예선 심사가 끝났는지 예선 진출자들이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그 뒤 심사위원 석에서 나일은.

‘하품하네.’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나갔다.

동제국 황자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호언장담했던 만큼, 그는 온종일 은근한 미소와 권위가 적절히 섞인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행사가 다 끝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건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난 그의 표정은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로 눈이 풀려 있었다.

‘돌아가서 칭찬해 줘야지.’

오늘 무대에서 아주 멋졌다고.

맨날 놀기만 하는 황자님인 줄 알았는데 다시 봤다며, 호들갑을 떨어줘야지,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알레나가 아무도 모르게 수도를 빠져나가도록 하는 일이 우선이니까.

당분간 오래 못 볼지 모르니 배웅해달라고 먼저 말을 꺼낸 건 알레나였지만, 그녀가 그러지 않았어도 내가 먼저 마차 타는 곳까지 같이 가겠노라, 말했을 참이었다.

마차꾼의 얼굴을 봐두는 것만으로도, 내가 당신의 얼굴을 보았고, 알레나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편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혹여 나쁜 생각이거들랑 하지 말라는 의미가 전해지겠지.

무대 인근을 벗어나자, 사람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말은 몸이 근질댔는지, 고삐를 크게 흔들지 않았음에도 서서히 속도를 냈다.

앞으로 좀 더 나아가자 삯마차 몇 대가 주차된 곳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디가? 저기 마차 있는데?”

여러 대의 마차를 눈앞에 두고 알레나가 갑자기 말의 방향을 틀었다.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서며.

“피비, 마지막으로 말할게.”

“어?”

“나랑 떠나자.”

“하… 레나야, 내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이미 몇 번이나 얘길 하지 않았니.

나는 그를 좋아하고 그가 있는 이곳에 남기로 했다니까.

“….”

어둑한 골목 초입에 말을 세운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알레나는 먼저 말에서 뛰어 내린 후, 내게로 손을 뻗었다.

“우선 내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

시간이 더 지체되면 곤란한데.

나일이 나를 찾기 전에 돌아가고 싶었다.

“나 시간이 많지 않아.”

그녀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리며 한 번 더 단호히 못 박았다.

“무슨 얘긴데? 같이 떠나자는 말이라면 네 마음은 알겠지만 안 돼. 내 결정을 존중해 줘.”

새벽까지 불을 밝힌 노점상들의 불빛이 어두운 골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그림자가 깊은 골목 안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굉장히 슬픈 표정이네. 어째서 이렇게까지….’

빛에 반쯤 드러난 알레나의 얼굴이 너무나 슬퍼 보며,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로 손을 올렸다.

얼굴에 손을 대고서 엄지로 볼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들려온 말에 볼 위에서 엄지손가락이 굳어버렸다.

“너 죽어.”

나는 그때까지도 그 말을 그녀의 걱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죽을지도 몰라, 그 정도로 위험하면 어떡해? 하는.

“…음, 그런 걱정을 사실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도 않고. 어떻게든 그와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제 걱정은….”

“걱정이 아니야.”

“….”

“여기 있으면 넌 죽어. 황자에게 말해도 소용없을 거야.”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말투, 확신에 찬 친구의 표정에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어가는 걸 느꼈다.

“죽는다니? 어떻게 확신해 너.”

고이는 침을 삼키며 뒤에 이어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전 치료제를 데려간 사람이 전 후페이 공작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이 아이가 당황했던가.

마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또 듣는다는 것처럼 지루한 표정이지는 않았었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조금씩, 점점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치료제가 황자의 저주를 치료한다고들 말하지. 그 치료라는 게… 어떤 건지 알아?”

“그건….”

닿아서. 닿을 때마다 저주가 사라지는 거 아니야?

알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녀의 눈빛을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부디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저 입에서 나오길.

“….”

그러나 알레나는 우물쭈물하며 나와 시선 맞추길 피했다.

땅바닥만 바라보며 방황하던 눈동자가 한 곳만 바라보고 있던 내 눈동자와 다시 마주쳤을 때, 알레나는 말에 묶어 두었던 가방을 뒤적였다.

“이거, 이걸 먼저 읽는 게 빠르겠다.”

그녀가 건넨 건, 구겨진 몇 장의 문서였다.

반가운 내용이 아닐 게 너무나 확실해서, 읽기도 전에 큰 한숨부터 내쉬었다.

*

동제국과 서제국은 같은 제국이라 칭하기엔 규모도 내실도 차이가 났다.

오랜 세월 대륙을 호령해 온 서제국에 비하면, 동제국은 말만 제국이었지 실상을 들여다보면 작은 왕국들을 모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합지졸 동제국을 정말 제국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린 자가 리베르 1세였다.

리베르 1세가 이끄는 동제국은 단번에 서제국을 위협할 수준의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그를 가능케 했던 것은 리베르 1세가 가진 이능력에 있었다.

대륙에서는 수천 명 중 한 명꼴로 이능을 지닌 자들이 태어났다.

마법사의 수도 많았지만 서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많은 이능력자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수가 곧 서제국의 국력이었다.

우연일 뿐인가, 왜 유독 서제국에서만 이능력자가 많이 태어난단 말인가.

그 사실이 배 아픈 누군가는, 서제국이 인공적으로 이능력자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숨기고 있다 말하였지만 그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동제국에서 행운의 리베르 1세가 태어났다.

이능력자가 죄다 서제국에 몰린 불균형을 신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마치 그 불균형을, 리베르 1세 한 명을 통해 동제국에 보상하려는 신의 의도가 있는 것처럼 리베르 1세의 땅을 다루는 이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후로도 리베르의 혈육은 불, 바람 같은 자연을 휘두르는 이능력을 안고 세상에 태어났다.

리베르 황가는 이능과 강한 황권을 동시에 휘둘렀고, 비등비등했던 대륙의 저울이 동제국 쪽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세대를 거듭할수록 강한 이능력의 시초였던 리베르 1세의 피가 점점 옅어졌기 때문일까.

리베르 황가의 이능은 점점 약해져만 갔고, 리베르 5세에 이르러서는 이능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까지 전락한다.

내 다음 세대는 아예 이능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나겠구나.

내 아이가 리베르 황가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어.

리베르 5세는 사라져 가는 리베르의 이능력을 다시 강화시키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능을 강화시키는 방법을 찾기 위해 온 대륙을 뒤진다.

그리고 한 여자를 찾아낸다.

세대를 거듭해 이능이 내려온 집안의 여자였다.

이 여자의 피 속에는 이능이 새겨져 있구나.

그렇다면 이 여자에게서 아들을 보면 어떨까.

리베르의 피와 이 여자의 피가 만난다면 죽어가는 이능을 다시 꽃피울 수 있지 않을까.

내 아들에게 다시 강력한 이능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리베르 5세는 그 여자에게서 아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리베르 6세는 어렸을 때부터 강력한 이능을 발현시켰다.

리베르 5세는 느꼈다.

실로 이 여자의 피가 대단하구나.

그렇다면 내가 너를 잡아먹으면 어떨까.

네 피가 섞여 태어나는 것만으로 소멸하여가던 이능이 되살아났는데.

리베르 5세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른다.

여자를 잡아먹으려는 순간, 여자는 자신의 남편이며 제 아이의 아비인 자에게 애원했다.

- 폐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도 저를 사랑하여 생명의 결실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 내 너를 사랑했다 여기느냐. 단지 너는 내 아이가 이능을 갖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 말을 마치고, 리베르 5세는 자신을 바라보는 원망 가득한 여자의 두 눈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여자의 두 눈부터 파먹었다.

여자는 죽어가며 자신의 피로 저주를 내렸다.

이 악귀와 내 피를 타고나는 아이는 저주를 받으리라.

내 원한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것이며 저주 역시 점점 강해지리라.

리베르의 아이들은 악몽에 시달릴 것이다.

리베르의 남자에게 내가 눈이 파먹힌 것처럼 그들도 시력을 잃으리라.

리베르의 남자에게 내가 몸이 먹힌 것처럼 그들도 사지가 썩어 가리라.

그러던 중 여자를 만나리라.

그리고 잡아먹힐 것이다.

내가 당한 것처럼, 구원받았다 여기는 순간에 상대에게 잡아먹히게 되리라.

리베르 5세 너의 아이들은 여자들에게 억겁의 세월 속에서 잡아먹히게 되리라.

같은 문양을 공유하는 치료제라 불리는 대상을 만나 안도하는 순간, 저주가 모두 치료되었다 착각해 환희에 빠지는 그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리라.

*

저주의 시초부터 치료제가 황자와 닿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가 문서에 모두 담겨있었다.

문서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핫… 하.”

하도 어이가 없으려니까 헛웃음부터 나오네.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계속 부정하려 들었던 사실 한 문장이, 머릿속에 오롯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치료제라는 거….”

뒷말을 다 잇기도 전에 목이 멨다.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 흘리고 싶지 않은데 정말.

각막에 점점 물기가 차올라 나는 고개를 하늘 위로 치켜들어야 했다.

야, 울지 말자.

손에 문서를 쥐고 희번득한 모양으로 고개를 들고 있자, 잔인하게도 알레나가 내가 잇지 못한 뒷말을 이어서 내뱉었다.

“저주는 강력해. 치료되거나 사라지지 않아. 그 대신 치료제는 저주를 흡수하지. 황자의 곁에서 스펀지처럼 저주를 빨아들여. 빨아들인 저주는 한동안은 치료제 안에 그대로 머물지만, 언제까지 아무 탈 없이 치료제가 저주를 제 몸에 가둬둘 수 있는 건 아냐. 시간이 지나면.”

“폭발하는구나 나. 하하, 아… 황당하네 진짜.”

“….”

“여기 뭐라고 쓰여 있냐면, 몸속에서 응축된 저주가 한순간에 터져 나오면서 그 주변을 몰살시킨대. 그러니까 문양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인간 시한폭탄이 되는 거야. 이거 맞아? 확실해? 아니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야? 너무 황당한 얘기 아니냐고.”

알레나는 대답 대신 표정을 굳혔다.

정말 몰라서 물은 건 아니었는데 저렇게 표정을 싹 굳히니까 할 말이 없네. 하하 참.

그래서 죽인 거였구나.

문양이 사라짐과 동시에 시한폭탄이 되어버리는 치료제를 터지기 전에 제거해 왔던 거야.

펑, 퍼퍼펑. 누군가가 또 불꽃을 쏘아 올렸다.

분명 흐느끼고 있었는데도 내 작은 울음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알겠지? 여길 떠나야 한다는 말.”

다시 말에 오르려는 듯, 말 앞에 서서 알레나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야말로 거절의 말 따위 나오지 않을 거라 예상한 듯, 그녀의 얼굴은 확고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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