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서고에서 방으로 돌아와 불을 밝힌 나는 소파 구석에 몸을 밀어 넣었다.
원작의 피비는 왜 살해당했는가.
그녀는 주인공 둘의 관계에 끊임없이 갈등을 불어넣는 요소였다.
갈등뿐 아니라, 공작을 없애보겠다고 서제국의 첩자로까지 활동했고, 오히려 나일을 위험에 빠트리는 결과를 초래했지.
동제국에선, 황자의 치료제로 애썼던 공적을 참작해 피비를 사형시키진 않았지만, 공작은 철두철미한 성격이었으니까.
로건의 눈에 그녀는 언젠가 또 자신과 나일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위협이 될 만한 출중한 능력 따위는 없었지만, 그가 보기에 피비는 미친 사람 그 자체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피비는 죽기 전에 가서는 희한한 소리를 지껄이기도 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거나, 그 여자가 날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 등등의.
그래서 나는 이제껏 피비가 죽은 이유를 그녀 개인에게서만 찾아왔다.
하지만 피비 말고도 다른 치료제들에게 어떤 불행이 반복되고 있었다면….
‘로건이 피비를 죽인 건 단순한 질투 따위가 아니었어. 피비 개인이 아닌 치료제라는 존재를 관통하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거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수집한 정보를 조각 맞추는데, 옆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알레나가 돌아왔을 거란 생각이 들자마자 방을 나가 옆방 문을 열어 재꼈다.
“앗!”
불 꺼진 어두운 방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날아와 시야를 가렸다.
재빨리 머리를 뒤덮은 담요를 끌어내려 바닥으로 내팽개쳤을 땐, 그 찰나에 이미 시야에 담겼던 인영이 자취를 감추고 난 후였다.
“레나야?”
“….”
왜 대답이 없을까.
알레나의 목소리를 기대하고 이름을 불렀지만, 방금 어둠 속에서 옷장 안으로 후다닥 모습을 감춘 이에게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레나가 아니야?
그 짧은 순간 눈에 담은 누군가의 모습은, 드레스 차림이 아닌 남성복의 실루엣을 가진 이였기에.
긴장감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방안으로 들였던 발을 조금씩 뒤로 물렸다.
그때, 기대했던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노야 괜찮아. 겁먹지 마, 나야.”
닫혔던 옷장 문이 스르륵 열리며 안에서 알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풀어헤쳐 진 셔츠 앞섶을 손으로 움켜쥔 채,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중이었다.
“왜 옷장 속으로 뛰어 들어가?”
“옷 갈아입는데 노크도 없이 사람이 들어오면 누구나 놀란다고. 황궁에서 누가 귀족이 묵는 방을 두드리지도 않고 열겠어.”
걱정했으니까 그렇지.
“늘 의외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지. 멍청아.”
등 뒤로 문을 잠그며 타박하자, 귀족가 영식들이 입을법한 남성복 차림을 하고서 알레나는 배시시 웃었다.
“행사 첫날인데 일찍 왔네. 밤늦게까지 놀다 새벽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내게 등을 보이고서, 알레나는 풀었던 셔츠 단추를 다시 잠가 나갔다.
“너 내 체력 끝내주는 거 알아 몰라. 그리고 갈아입던 거 아냐? 왜 다시 입어?”
“아… 너 가면 갈아입지 뭐. 편해 이 옷도.”
다시 나를 보고 돌아선 그녀에게 곁으로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순순히 내 앞으로 다가온 친구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게 너무 잘 느껴져서 몇 시간 동안의 염려가 싹 사그라지는 느낌이었다.
나보다 약간 키가 큰 알레나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너 잘못된 줄 알고.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불안해서 내내 찾았어.”
내가 이러는 이유를 정확히 모를 테니, 장난스러운 반응을 보일 거라 여겼는데, 알레나는 마치 다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걱정했어?”
“어. 오늘 별일 없었지 너?”
“응. 아무 일도 없었어.”
됐어, 그럼.
부러 소리 나게, 끌어안은 친구의 등을 괜히 퍽퍽 치고서 떨어지려 하는데, 알레나는 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두 팔이 더 힘 있게 나를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멀쩡하시다니 됐습니다. 이제 놓아주시죠.”
“뭘 걱정했어? 내가 어디 가서 또 뺨 맞고 다닐까 봐?”
“아니, 물론 그래서도 안 되지만 그걸 걱정한 건 아니고. 야, 놔 봐봐 좀.”
얘가 왜 이래.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그녀를 밀어 의자에 앉히고서 나도 그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 저녁 행사에서, 그리고 황족 전용 서고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그녀에게 꺼내 놓아야 했다.
지금 치료제로 알려진 건 알레나였으니까.
“전 치료제 동생분이 했던 말 기억나지? 언니가 회색 로브를 입은 푸른 눈의 남자와 동행한 날 실종됐다고.”
“응.”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오늘 동생 분을 행사에 불렀어.”
알레나는 별 동요 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아마 이 다음에 나오는 이름을 듣고 나서는 저 표정에 금이 가지 않을까.
“그런데 그 남자가 후페이 노공이라고 했어. 세월이 흘렀지만 기억이 난대.”
후페이 노공이라는 말에 알레나는 눈꺼풀을 조금 티 나게 위로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얌전하게 동요하는군.
너무 놀라 한다면 다음 이야기는 천천히 꺼내려 했는데.
“그리고 조금 전에 황자 전하의 허락을 구해서 황족 전용 서고에 들어갔다 오는 길이거든. 그런데….”
전 치료제들에 관한 내용을 하나 발견했는데 말이야, 그게 아주 이상해.
치료 도중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치료제도 있고, 그것보다도 더 이상한 건.
“대부분의 치료제가 치료를 끝마치고 나서 다들 이상한 사건에 연루돼 있었다는 거야. 실종이라든지, 폭발사고라든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마지막 대목을 말할 때는, 또다시 도지는 불안감에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그러나 작게 한숨을 내뱉은 뒤 마주친 알레나의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덤덤했다.
오히려 너무 극심한 공포에 질리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황인 걸까.
“그러니까 네 말은….”
흩어진 조각들을 끼워 맞추듯, 내리깐 속눈썹 아래서 민트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치료가 끝난 후, 필요 없어진 치료제들이 모종의 이유로 의문사를 당하고 있다는 말인 거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무겁게 방 안에 깔리는 그녀의 한숨을 지켜보다가 비어있는 알레나의 손을 꼭 말아 쥐었다.
“떠나.”
“….”
“황자에게 치료가 다 끝났다고 발표해달라 부탁해놨어. 아마 지금쯤 말했을 거야.”
“….”
“만약 우리가 걱정하는 일이 진짜라면, 누군가가 널 찾아 나서겠지만 넌 이미 황궁을 떠난 후겠지.”
알레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남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럼 너는?”
“난 이곳에 있을 거야.”
“안전하지 않아, 너도 함께 떠나.”
그녀가 겹쳐진 손에 힘을 실어왔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네가 치료제로 알려진 상태로 계속 발견되지 않는다면 나도 안전할 거야. 입에 담고 싶지도 않지만 네가 누군가에 의해 해를 당한다면 네가 가짜 치료제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들은 진짜 치료제인 나를 찾아 나서겠지.”
“….”
“그러니까… 빌론에 꼭꼭 숨어있어 줘. 다행히 이 모든 게 그저 우리의 쓸데없는 망상과 걱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다시 만나자. 빌론에서든 이곳에서든.”
“제발, 그러지 말고 같이 떠나. 어차피 치료 다 끝나가잖아, 끝나고 같이 떠나면 되잖아.”
어찌나 세게 손에 힘을 실어 잡는지, 잡힌 손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이러다 손이 골절되겠다 말하며, 애써 웃으며 잡힌 손을 빼냈다.
“내내 가짜 치료제 뒤에 숨어 있다가 이제 와 정의로운 척해서 부끄러운데… 진짜 치료제도 아닌 네가 날 대신해서 위험에 처하는 거 나 보고 싶지 않아.
널 방패로 세우기보다 내가 치료제라는 걸 밝힐까도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면 멘데가가 가져가기로 되어있는 이득들이 어찌 될지 모르겠어. 네가 치료제로 분하면서까지 황궁에 들어온 이유가 없어지잖아.
그냥 네가 치료제인 채로 모습을 감추는 게 맞을 것 같아. 일단 빌론에 가 있어. 집에 편지해 둘 테니까.”
안심시키기 위해 웃으며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나 긴 설명에도 알레나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맞춰주지 않았다.
“응? 그렇게 해줄 거지?”
“내가 위험에 처하는 거 보기 싫다면서, 나한텐 네가 이곳에 혼자 남는 걸 보라고? 진짜 이기적이다, 너.”
“하하….”
겸연쩍게 웃어버렸다.
사실 나도 도망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나 그를 너무 좋아해. 떠나지 않을 거야.”
“….”
“그러니 내가 여기 남는 이유는 온전히 내 마음을 위해서니까… 그런 미안한 표정 지을 거 없어, 레나야.”
“….”
“조금 더 확실해지면 그에게 다 말하고 같이 해결해나갈 생각이야. 그도 나를 좋아해. 그러니 내 걱정은 마.”
말을 건네면 건넬수록 흔들리던 알레나의 눈빛이 그 순간 뚝 멈췄다.
나는 그것을 그 아이가 내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받아들이고서도 못내 불만스러운지 입을 굳게 다문 알레나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내 진짜 이름 피비야, 피비 셀린. 첫인상은 최악에,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나는 네가 좋아. 무사히 있어야 해.”
“…아니잖아.”
“뭐?”
들릴 듯 말 듯 작게 읊조린 덕분에 상대에게 닿지 못하고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린 그녀의 말을 되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여럿 중 하나잖아 나.”
“그렇지, 그러니까 대단한 거지.”
“하지만 너는 일 순위로 좋아하는 그의 곁에 남을 거잖아. 앞으로도 계속.”
“어허… 친구의 사랑을 질투하지 말고 일어나 어서.”
축제의 마지막인 3일 동안은 밤늦게까지 밖에서 노는 사람들로 인해 밤새 운행하는 삯마차가 차고 넘쳤다.
지금 궁을 나가도 장거리 운행할 마차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거다.
아니지, 레나가 말을 잘 탄다면 마차보단 말을 타는 게 훨씬 속도가 빠르긴 할 텐데.
아, 하지만 혼자 말을 타고 멀리 가는 건 너무 위험한가.
마차를 구하는 건 쉬워도 믿을 만한 호위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을 테니.
머릿속으로 지금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다 문득, 더 급한 이야기를 하느라 묻지 못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참, 아까 묻질 못했는데 차림새가 왜 그래? 남장하는 취미라도 있던 거야? 바지 차림이 도망치기엔 훨씬 더 적합해서 반갑긴 한데.”
내 물음에, 여전히 화난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조용히 눈을 떴다.
“…편한 복장으로 다녀올 곳이 있었어.”
“아, 그랬구나.”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하던 생각을 마무리했다.
그렇다면 역시 말보다는 마차로 구하고, 혹시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마차꾼에게 알레나가 목적지까지 무사하게 도착했다는 편지를 받고 나서 돈을 더 주겠다는 조건을 걸면, 적어도 가는 중에 딴생각은 안 하겠지.
“피비.”
“어, 잠깐만… 왜?”
“너 황자를 어디까지 믿어?”
“응? 당연히….”
“네가 그를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어. 그도 마찬가지지. 보면 알겠는걸. 하지만 사랑과 신뢰가 늘 함께하지는 않아.”
“좋아해, 좋아하고 신뢰해.”
단호한 대답에 말문이 막힌 듯, 알레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곧 하려던 말을 마저 꺼냈다.
“만약 치료제들이 모종의 이유로 제거되었다면, 황족이 개입하고 있을 거야.”
“….”
“네가 모르고 있는 사실을 나일 리베르는 알고 있을 거란 얘기야. 그리고 그는 너한테 이 이야기에 관해 아무 말이 없지. 그가 정말로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해?”
“너, 섣불리 의심….”
“섣부른 의심이라고? 희박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냐. 세상엔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하는 사랑이 훨씬 더 많다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하는 거야.”
“….”
“운이 아주 좋으면, 아주아주 좋으면 네가 그 특별한 경우가 될 수도 있겠지.”
“….”
“어때? 될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