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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91)화 (91/134)

91화

사회자의 활기 넘치는 손짓 뒤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후페이 노공이었다.

포마드로 단정하게 넘겨 빗은 올백 머리가 조명에 반들반들 빛났다.

등 뒤로 뒷짐을 지고서 허리를 꼿꼿이 편 노공이 무대 아래 관중들을 내려다보며 계단을 한 개씩 밟고 올라섰다.

“후페이 전 공작께서는 이런 공식적인 행사에 웬만해선 얼굴을 잘 비추지 않는 분이시기에 더욱 반가운 분인데요.

바쁜 손자의 빈자리를 할아버지라도 채워야 하지 않겠냐 시며 오늘 특별히 예선 심사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이어진 사회자의 소개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저분이 전대 후페이 공작님이구나.”

“핏줄은 핏줄이네. 한 대를 건너뛰었는데도 똑같이 생겼어.”

무대 위 앉아있던 로건이 뛰어나와 제 할아버지를 맞이했다.

손자가 앉아있던 의자에 다시 앉는 그를 향해, 나일부터 황제, 황후까지 세 사람 모두가 가벼운 인사와 눈웃음을 건넸다.

그가 로건에게 작위를 물려주었음에도, 뒷방 신세가 아닌 여전한 실세로 군림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

그때까지도 옆에 서 있던 동생분의 팔뚝을 잡아챈 것은,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로건을 보고 벼락 치듯 떠오른 어떤 생각 때문이었다.

“무대 위를 다시 봐줄래요?”

“후페이 공작님이요? 네. 다시 봐볼게요.”

“아뇨. 그분의 할아버지요.”

내렸던 망원경을 다시 얼굴로 가져가던 동생은 내 말에 잠깐 멈칫했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무대로 향해 있는 여자의 얼굴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자꾸만 치솟는 불길한 예감과 싸워야만 했다.

백 년처럼 느껴지는 몇 초가 지나자, 여자가 망원경을 내렸다.

시퍼렇게 질린 여자의 얼굴이 내 패배를 알려왔다.

“저 사람이에요.”

“….”

“그때 우리 언니를… 데려간 사람, 저 사람이 확실해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잊지 못했어요, 저 얼굴을.”

동생의 두 눈에서 굵직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우는 여자를 달랠 생각은 하지도 못 한 채, 무대 위 후페이 노공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대에 오른 예선 참가자들을 심사하며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따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전 치료제가 실종되던 날, 그녀를 데려갔던 사람은 후페이 전대 공작이었어.’

그녀가 단순 실종이 아니라 동생의 말처럼 살해된 게 맞다면.

원작에서 전 치료제는 전 후페이 공작에게 죽고, 이번 대 치료제였던 피비는 이번 대 후페이 공작에게 죽은 게 된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순히 전 후페이 공작이 황후의 사주를 받아서 그랬던 게 아닐까, 단순하게 넘겨도 되는 문제일까.

그게 아니라면?

전 치료제도 현 치료제도 죽여야 했던 다른 이유가 그들에게 존재했던 거라면….

자신의 조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무대를 내려갔던 로건의 모습을 급히 찾았지만, 어디로 사라진 건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파베라, 레나 못 봤어?”

“알레나? 오늘 종일 안 보였는데.”

“나 먼저 갈게! 동생 분 잘 부탁해.”

예선 참가자들을 심사하느라 한껏 집중한 나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자리를 떴다.

등을 돌린 순간, 그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는 사실 따위는 알지도 못 한 채.

*

궁으로 돌아왔을 때, 본궁을 포함한 황자궁은 쥐죽은 듯 괴괴했다.

늘 일정 이상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던 궁이니만큼, 인력 대부분이 행사로 차출되어 나간 지금.

궁이 적막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빠르게 발을 놀렸다.

휑하니 비어있던 복도를 깨우는 내 발걸음 소리가 알레나의 방 앞까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똑똑

“레나야!”

문을 두드렸지만 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참지 못 하고 거칠게 문고리를 돌리자, 달칵,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네?

아 그래. 나완 다르게 이 아이는 잘 때를 빼고는 늘 문을 잠그지 않고 사용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내버려 뒀으니까.

방 안으로 들어섰지만 찾는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하필 사라진 둘이 로건과 알레나라는 사실이 나를 불안에 떨게 했다.

알레나의 침대 위로 풀썩 주저앉아서 방 안을 살폈다.

침대 위, 테이블이나 책상 위.

혹시라도 그녀가 행선지를 쪽지로 남겼다면 두었을 만한 장소를 눈으로 훑었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애가 탔다.

알레나는 아침부터 사라져서 지금까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중인 걸까.

“후우….”

주인 없는 방에 우두커니 앉아 홀로 불안을 삼키던 나는 참지 못 하고 결국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가는 물밀 듯 밀려드는 나쁜 상상에 잡아먹힐 것 같았으니까.

‘별일 없겠지.’

당장 찾을 방법이 없다면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자.

그리고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대로 방을 빠져나와 황실 서고로 향했다.

*

바삐 걸음을 옮기는 내 수중에는 나일에게서 받아 두었던 브로치가 들려 있었다.

- 받고 싶은 선물이 있어요. 황족 전용 서고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

원하는 건 무엇이든 알려달라는 말에 황족 전용 서고를 외치자, 나일은 아주 의외의 대답이라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 황족 전용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하지 거기 별거 없는데? 정말 중요한 문서는 황제 폐하가 따로 보관하셔서 거기는 음….

- 찾는 게 있다기보다 황족밖에 갈 수 없는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랄까, 그래요.

- 그럼 축제만 마무리하고 같이 가요. 3일 동안은 정신이 없을 거라서. 급하진 않죠?

- 급하진 않은데, 사실 전에 알레나와 도서관에 갔었는데 황제 폐하께서 도서관에 오는 걸 별로 달갑지 않아 하시는 것 같아서… 조용히 들어가 보고 싶어요. 어려울까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나일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 어려울 리가. 아마 치료제랑 함께여서 그랬던 것 같은데….

경비병에게 얘기해 둘 테니, 이걸 보여주고 들어가라며 나일이 내민 것은 황가의 인장이 새겨진 자그마한 황금색 브로치였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여유롭게 내일 가려 했지만, 예정과 다르게 지금의 나는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서고 앞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말없이 브로치를 내밀자.

“황자 전하께 명 받았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그가 앞서 들어가 황족 전용 서고의 자물쇠를 풀었다.

“그럼.”

꾸벅 인사하는 경비병에게 살짝 고개를 까닥이고는 전용 서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리베르 황가가 꽤 오랜 시간 동제국의 황가로 군림해 온 만큼, 서고의 규모가 클 것이라 예상했는데, 들어선 황족 전용 서고는 아담한 크기였다.

게다가 책장이 책과 문서로 꽉꽉 들어차 있지 않고 군데군데가 텅텅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보관하고 있는 서적과 문서의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아 보였다.

양이 적으면 원하는 정보를 더 빠르게 찾을 수 있을 테니 좋지.

책장은 집권해 온 황제 순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리베르 12세, 리베르 12세… 여깄다.’

아직 한창 집권 중인 황제라 그런가?

현 황제인 리베르 12세의 칸은 겨우 몇 권의 책과 한 개의 두꺼운 서류뭉치가 끝이었다.

‘아니지, 황족 전용 서고인 만큼 중요한 정보 중에서도 정말 중요한 것들만 추린 것일 테니 이것도 많은 분량일지 몰라.’

긴장된 마음으로 맨 앞에 꽂혀있던 책을 꺼내 펴들었다.

그리고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책에 쓰인 것은 구불거려 알아보기 힘든 글씨가 가득한 어린아이의 일기장이었다.

- 꿈에서 양치기가 되어 밤새 양을 몰았더니, 아침에 이불에 싼 쉬가 양 모양이었다. 양 모양 쉬를 싸다니! 나는 그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멋지지 않나? -

현 황제가 어렸을 때 무슨 모양 쉬를 싸며 그것을 어찌 여겼는지는 단 한 톨도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질색팔색하며 거칠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읽던 책을 제자리에 놓고, 이번에는 맨 뒤쪽에 꽂힌 책을 꺼내 들었다.

마지막 권은 청년기 때인지 아주 정갈해진 글씨체를 감상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황제의 일기일 뿐이었다.

황족 전용 서고라 하길래 황족들끼리만 공유하는 기밀 자료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황족 전용 추억의 방일 줄이야.

이름만 그럴듯하지 별거 없다는 나일의 말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래서는 아무 소득이….”

없구나.

방에 가서 알레나를 기다리든, 알레나가 갔을 만한 다른 곳을 찾아보든 해야겠다 생각하며 별 의미 없이 페이지를 넘길 때였다. 잠깐만….

마지막 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 6대 치료제 : 황자를 치료하는 도중 정신이상 발생, 치료를 끝내고 본가로 귀환. -

- 5대, 4대…. -

- 1대 치료제 : 본가로 귀환 후 서북부 폭발사고에 휘말려 사망. -

현 황제의 치료제가 7대였으니 6대면 그 전대고, 1대 치료제면 리베르 6세를 치료했던 초대 치료제를 가리킨 것이었다.

‘미치거나 사망했어?’

치료제나 저주에 관한 내용을 더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다른 책장도 뒤졌지만, 더 나오는 내용은 없었다.

대충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한 후 그곳을 떠났다.

*

심사위원들 앞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예선 참가자들이 각자의 모습을 뽐내며 지나갔다.

나름 심사위원이랍시고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으므로, 나일은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긴 채, 그녀들이 매력 어필을 한답시고 저를 바라볼 때마다 의무적인 시선을 던져주었다.

‘언제 끝나냐.’

지겹다 지겨워.

아직 남아 있는 참가자들이 몇 명인지 알기 위해 아래 깔린 서류를 들췄더니.

‘아직도 이렇게 많이 남았어?’

내 나라가 크긴 크구나. 미인대회 출전자 수가 이렇게나 많다니.

동제국이 거대한 제국이라는,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도 새로운 참가자가 예비 황태자 앞을 지나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억.’

그녀의 찡긋거림에, 덕망 있는 황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해 애써 유지하고 있던 나일의 온화한 표정에 금이 갔다.

어디서 황자한테 함부로 추파질이야, 쟤 어디 누구야? 몇 번이야?

나일은 제게 눈을 찡긋해 보인 참가자의 서류에 거침없이 10점을 써 갈겼다.

어차피 이미 한 번 거친 내부 심사에서 본선 진출자가 대충 가려진 상황이었기에, 현장 심사가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평온한 마음으로 모든 참가자에게 공평하게 50점씩을 주고 있었는데….

나일은 피비가 머물렀던 저 멀리로 시선을 던졌다.

또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가 황제와 함께 능력을 쓸 땐 저 자리에서 자신을 지켜봐 주더니.

온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니 그때만이라도 자신을 지켜봐 준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나일은 어젯밤 그녀의 방을 떠나기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누군가에게 기대기보다 스스로 해결하려 하는 사람이라는 거 잘 알고, 그런 당신을 좋아하지만…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내가 옆에 있다는 거, 힘든 일이든 기쁜 일이든. 함께 하고 싶은 내가 있다는 거 기억해줬으면 해요.

그리 말했을 때, 어쩐지 여자는 달가워하기보다는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아무 일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못내 그의 마음을 서운하게 했다.

‘그 여자는 예전부터 그랬었지,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그래서 오늘 그는 더 무리했다.

완쾌되지도 않았고, 몇 년 만에 이능을 제대로 쓰는 일이었기에 원래는 좀 더 살살해야 했지만, 나일은 일부러 더 많이 능력을 방출시켰다.

여기 있는 나를 좀 봐 달라고. 마치 어린아이 투정 같다는 걸 알면서도, 우습게도 그런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자신이 충분히 능력 있고 기댈 수 있는 사람임을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욕심이 날로 커지는군.’

좋아한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그 한마디만 듣고 나면 세상에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는데.

그가 조금은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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