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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90)화 (90/134)

90화

시리도록 눈부셨던 5월 말의 하늘이 차츰 저물어 갔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지자, 수도의 일꾼들이 하나둘 인공불빛을 밝히기 시작했다.

마나 전구에서 흘러나오는 형형색색의 불빛과 저무는 태양의 천연 빛이 뒤섞여 저녁 시간대의 나른함을 불러일으켰다.

낮 시간대의 아리따운 여인들의 행진도 사람들이 기대하는 볼거리였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오늘 황궁을 오르는 언덕길 앞 무대로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리베르 황가의 이능 쇼였다.

“아빠, 황제 폐하의 불꽃이 어떤데? 설명해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축제 구경을 나온 어린 남자아이는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커다란 불길이 허공을 춤추듯이 날아다녀.”

“그게 얼마나 커다란 건데? 춤은 무슨 춤인데에~”

남자가 궁금해하는 제 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양팔 벌려 크기를 설명하고 엉덩이를 씰룩쌜룩 흔들어 댔지만.

“대써. 그냥 내 눈으로 볼게.”

아이는 흐물거리는 아비의 몸짓이 영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무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키가 짤막한 아이로서는 키 큰 어른들로 가득 찬 시야가 영 갑갑할 뿐이었다.

냉정하게 고개를 돌린 제 아들의 뒤통수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던 남자가 제 어깨 위로 아이를 들어 올렸다.

아비의 목마를 타고 신나서 손을 흔드는 남자아이를 바라보며 나도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베르 황제와 황자 부자가 일어서서 이야길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더 어두워지길 기다리고 있는 건가.’

황제의 이능인 불꽃도 나일의 이능인 전기도, 해가 쨍한 낮보다는 밤에 더 그 효과가 잘 보일 것이다.

해마다 제국민들을 위해 이 무대에 섰던 황제와 달리, 나일에게는 오늘의 무대가 제 이능을 드러내는 데뷔 무대나 마찬가지였다.

전혀 긴장한 티 없이 서 있는 그의 아버지와 달리, 나일은 조금은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열심히 몸을 풀어대는 그가 보였다.

‘아?’

저기서 여기가 보인다고?

목을 돌리던 그가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 먼 거리에서, 바글바글한 인파 속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 너.

라고 말하는 듯, 그가 몰래 손가락으로 나를 콕 찍어 가리켰다.

‘치료되니까 무슨 시력이 괴물 같네.’

사람 시력이냐고.

그렇다면 내 표정도 보이겠지.

비록 나는 그의 자세한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날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껏 환하게 미소 지었다.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는 나일의 얼굴이 내게 답하듯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팡.

거대한 폭죽을 신호탄으로.

- 팡, 파팡, 팡, 팡.

오색빛깔 폭죽이 저녁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높이 솟았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불빛을 바라보며 황제가 무대 중앙으로 이동했다.

“우와아… 아빠!”

목마 탄 아이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온 건 그때였다.

높이 든 황제의 팔이 불길에 휩싸이더니 그 손아귀에 거대한 용이 만들어져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용이 허기진 듯 하늘을 맴돌았다.

불의 용은 제국민들을 잡아먹을 듯 그들의 바로 머리 위를 저공비행 하다가도 괴로운 듯 몸을 비틀며 다시 하늘로 솟아오르길 반복했다.

“와, 아빠 표현력이 정말 부족하구나!”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외치는 남자아이의 목소리에, 그 아비가 어깨를 위협적으로 흔들자 아이는 즐겁게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아니 이곳에 모인 모두에게서 제 눈앞에서 펼쳐지는 경이를 환호하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굉장하네.’

나일이 손에 작게 일으킨 청백색 스파크도 보았고, 로건이 얼음을 다루는 모습도 보았지만.

‘황제는 황제인가.’

아니 이벤트 용이라 더 화려하게 발휘한 건가?

확실히 단 한 번의 능력 사용만으로도 제국민들의 마음속에 동제국의 안녕과 번영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심어줄 만 했다.

황제가 살짝 무대 뒤로 뒷걸음쳤고, 그 앞으로 나일이 나섰다.

그의 등장에 나는 목을 길게 뺐다.

‘나일….’

황제가 나섰을 때보다도 술렁이는 소리가 조금 더 컸다.

리베르 황자의 첫 이능을 감상하는 순간이었으니.

나일이 한 발 더 앞으로 움직이자, 크게 술렁이는 소리들이 이내 쥐죽은 듯 가라앉았다.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들릴 듯한 적막 속에서 그가 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나일의 손바닥 위에서 처음엔 푸른 불꽃처럼 보이던 작은 구체가 청색 스파크를 일으키며 점점 범위를 넓혀가더니, 일순간 사과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가 팔을 휘두르자, 구체는 나선형의 회오리를 일으키며 긴 창처럼 하늘로 뿜어져 나갔다.

푸른 창이 그때까지도 허공을 배회하던 불의 용의 배를 가르자, 붉은빛과 푸른빛이 뒤섞여 별빛처럼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의 입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와, 나는 급하게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서제국에 아무리 마법사가 많아도 동제국을 당해내진 못할 거야.”

“아무렴, 방금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나. 리베르 황가의 능력을.”

저마다 제가 본 광경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나일을 올려다봤다.

제 손아귀에서 나간 푸른 스파크가 별빛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가 조금 비틀거렸다.

놀라 튀어 나가려는데, 무대 옆에 자리해 있던 로건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황제와 함께 그를 부축했다.

‘건강해졌지만 아직 완전히 저주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니.’

몸에 무리가 있을 테지.

두 남자의 부축 속에서 나일은 이쪽을 바라보았다.

힘들었지만 잘 해내지 않았냐며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챈 나일 양옆의 두 남자의 시선도 이곳을 향했다.

‘이능력자들은 다 시력이 괴물 같은가.’

두더지가 땅굴로 숨어 들어가듯, 급하게 몸을 수그렸다.

이래서는 가까운 좋은 자리 내버려 두고 멀리서 본 보람이 없잖아.

고개 숙여 자리를 약간 이동한 후 다시 그들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나일은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진 않은지, 다시 황제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나와 또 닿으면 괜찮을 테니까.’

그런데 왜 안 오는 거지?

부자의 이능력 쇼가 끝나면 바로 심사인데.

“피기!”

저 멀리, 사람들을 헤집고서 다가오는 붉은 머리의 여자가 보였다.

*

“파베라!”

사람들에 파묻힌 붉은 정수리가 손을 흔들어 댔다.

꾸역꾸역 헤치며 나아가자, 파베라가 내가 오늘 오전, 급하게 데려와 달라 부탁했던 여자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안 늦었지?”

“어 이제 막 황제와 황자 차례가 끝나서, 심사가 있을 거야. 딱 맞춰 왔어.”

“휴 다행이다. 그래도 축제라고 이것저것 볼 게 은근히 있다? 하긴 세월이 몇 년이 흘렀는데 축제가 예전이랑 똑같겠어? 보면서 오다 보니 늦을 뻔했네.”

뒤로 축제를 진행하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5월의 여왕을 뽑는 3일 중 첫날인 오늘은, 수많은 5월의 숙녀 중 딱 20명만을 뽑는 예선 심사가 있는 날이었다.

그 심사위원들이 무대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급하게 불렀는데 와줘서 고마워요.”

그때까지도 별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파베라의 옆에 민망한 듯 서 있던 여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언니의 이야길 하며 목 놓아 울던 중년 여성은, 파베라가 샵에 데려갔다 온 모양인지 화사한 얼굴과 옷차림을 하고서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아뇨.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도 오고 싶었어요. 누군지 확인할 수 있다면… 그래도 여전히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그때 보았던 용기 있는 눈빛을 내보이는 여자는, 전 치료제의 동생이었다.

- 황제 폐하를 만났을 때랑은 다른 반응이었죠. 언니가 매우 어려워했어요. 그래서 그를 유심히 쳐다봤습니다. 아직도 기억나요. 회색 로브 안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던 푸른 눈이.

‘그래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거 알아. 알면서도….’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푸른 눈의 남자가 언니를 데려갔다던 동생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닐 거야,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더 생각나지 않게 깔끔하게 확인하면 되는 거다.

세월이 많이 흘러버렸지만 전 치료제의 동생분은 아직도 로브 아래로 반쯤 드러난 그 얼굴을 기억한다 했다.

그러니 직접 보게 하고 확인하면 되는 일이야.

“망원경 챙겨왔어?”

“응.”

나는 파베라가 품에서 꺼낸 망원경을 동생의 손에 쥐여 주었다.

무대 위, 심사위원은 총 넷이었다.

가장 왼쪽에 앉은 황자를 시작으로 그 옆 황제, 황후, 그리고 맨 오른쪽에 로건까지.

“무대 잘 보여요? 얼굴도 보이나요?”

“네, 잘 보여요.”

“그럼 맨 오른쪽에 앉은 남자를 확인해줘요. 그가… 맞나요?”

전 치료제였던 당신의 언니를 죽인 남자가 로건 후페이인가요.

말이 되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서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눈에 망원경을 대고서 내가 가리킨 쪽을 꽤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얼굴에서 망원경을 내린 동생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

입은 열었는데 제대로 말을 뱉진 못하는 그녀의 표정은 몹시 이상했다.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분도 푸른 눈이군요.”

“네.”

“어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어려워하지 마시구 느낀 대로만 얘기해 주세요. 당신의 이야길 듣고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할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이 이야기가 당신 입에서 나왔다는 말은 아무 곳에서도 들을 수 없을 거예요.”

바닥으로 내리깐 여자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 하고 흔들렸다.

“제가 한 말이 그의 귀에 들어갈까 봐 망설이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왜….”

“비슷… 해요.”

“비슷해요?”

“네.”

제가 기억하는 그 푸른 눈의 남자와 너무 비슷합니다. 

눈매도 입매도 너무 비슷해요.

하지만 무대 위의 저분은 너무 젊기도 하고, 정말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확신은 들지 않아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래,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어. 내 불안이 만들어 낸 망상인 거지.’

그땐 꼬맹이였을 거잖아. 로건 후페이도.

그때,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립니다. 후페이 공작 각하께서 급한 용무가 생기셔서 심사를 보지 못 하고 자리를 뜨게 되셨습니다. 아쉬우신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더 멋진 분과 함께 하게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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