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남자들을 수습하느라 넘어진 의자를, 술집 안으로 들어선 검정 부츠가 옆으로 슥 밀어냈다.
은발에 잘 어울리는 눈부시게 하얀 제복을 갖춰 입은 로건은, 들어서자마자 나를 발견하고 미간을 세로로 좁혔다.
“….”
바라보는 눈빛이 ‘네가 또 왜 여기 있는 거지?’라고 묻는 듯했다.
“각하.”
다가온 제누스의 말에 그가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제보가 맞았습니다. 두 명 다 검거 완료했습니다.”
로건은 포승줄에 둘둘 감긴 채, 기사 세 명에 둘러싸여 있는 남자 둘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가볍게 까닥이자, 기사 셋이 묶인 둘을 술집 뒷문으로 끌고 나갔다.
“한시라도 가만있는 성격이 못되나 봐? 오늘도 땅을 보러 동분서주하는 중인가?”
카운터 쪽에 가만히 서 있던 내게로 다가온 그가 괜한 시비를 걸었다.
“….”
괜한 시비에 ‘뭐, 어쩌라고.’ 반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난 여전히 파란 눈동자의 그가 무서웠다.
내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숨죽이고 있자, 상황을 지켜보던 제누스가 날 거들었다.
“각하, 란셀롯 영애는 이곳에서 친구분과 약속이 있다 하셨습니다. 영애, 친구분이 곧 도착하십니까? 혹 어제의 그 붉은 머리 분이신가요?”
“예. 기사님.”
“아 그렇다면 실례되지 않는다면 저도 합석을….”
말끝을 흐리며 제누스가 은근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대답이 들려온 쪽은 그의 상관이었다.
“제누스.”
“옙.”
제 이름이 불리자, 그가 깍듯한 경례와 함께 미련이 그득 담긴 눈빛을 칼같이 거두어 갔다.
내게도 예를 갖춰 인사한 제누스가 제 동료들이 사라진 쪽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로건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어제 도둑맞은 물건을 찾아 주셨는데 감사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럼 저도 이만.”
“….”
감사는 개뿔, 내가 너한테 감사하겠냐.
허나 약자된 자는 억울한 일에도 그저 감사하다는 표현 밖에 못 하는 거지.
무서운 걸 어쩔 거야.
별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대로 조용히 물러날 수 있겠군 생각했다.
“어째 제국의 공작인 나보다도 더 바빠 보이는군.”
숙였던 허리를 펴며 그를 살폈다.
내려다보는 눈빛이 마치 ‘네까짓 게 뭐길래 그리 빨빨거리며 바쁘다고 하는 거지?’라고 묻는 것 같았다.
참으로 거만한 눈빛.
‘후…,’
그 눈빛이 내게 두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는 당장 그가 있는 이곳에서 사라지고 싶게 만드는 두려움이요, 나머지 하나는 남을 업신여기는 그 오만한 태도가 불러일으킨 짜증이었다.
너는 동제국의 질서를 수호하느라 당연히 바쁘겠지만, 질서 따위 수호하지 않는 일개 하급 귀족 영애도 나름 바빠. 이해 못 하겠지만.
“예, 바쁩니다. 그럼 저는 각하의 말씀대로 또 동분서주하러. 동제국 지킴이 으쌰!”
무표정한 그의 얼굴 앞에다 두 주먹을 들어 올려 보인 후, 그대로 몸을 돌렸다.
끝에 덧붙인 말은 비꼰 말이었는데, 못 알아들었을 거다.
저런 거만한 자들은 아랫사람들이 자신을 상대로 말장난을 칠 수 있다는 것조차 상상 못 할 테니.
어휴 재수 없어.
소설 속에서 나일에게 집착하던 그의 모습은 참 매력적이었는데.
하긴, 원작에서 나일한테 말고는 개싸가지였잖아 원래?
“이봐 너.”
낮은 음성이 날 불러 세웠다.
아닌가? 알아먹었나? 방금 행동이 내 목숨줄을 깎아 먹은 걸까?
나름 빈정거려 속이 시원하다는 생각을 1초 만에 뒤엎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로건은 입매를 사선으로 틀어 올렸다.
“날 싫어하는 거 충분히 알겠는데 말이야.”
“….”
예, 사실 모르면 머저리겠죠?
라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겁대가리를 하얗게 상실하기 전이었기에 속으로만 말했다.
“우리는 한편이다.”
“우리가 한편이라뇨?”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그의 말을 그대로 질문으로 되돌려 주었다.
“그래, 한편.”
“한편이라는 말을 저는 같은 편이라는 뜻으로 쓰고 있는데요?”
“….”
그의 표정이 굳어지길래 나는 바로 긍정 어린 답변을 내놓았다.
“마, 맞죠, 한편. 우리 모두 동제국 사람이니 같은 편, 네. 한편 중에서도 각하는 좀 센 편이고 저는 약한 편이지만.”
로건은 술집 안의 사람들이 신경 쓰인다는 듯 내게 몸을 밀착시켜 목소리를 낮췄다.
“같은 편이라니까, 우리. 너… 황자 전하의 옆 방을 쓰고 있잖아?”
“….”
황자 전하의 옆 방.
그가 그 의미를 어디까지 파악한 건지 속으로 가늠하느라 바로 대답지 못하고 말을 아꼈다.
로건이 내 귓가로 제 얼굴을 더 들이밀었다.
“왜 나일이 말을 아끼는지 그 점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우린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야. 나일의 눈빛만 봐도 그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단 말이다.”
“….”
“네가 나일의 여자라면 우리 사이가 나빠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좋아야 하지. 우리 둘 다 황자 전하의 힘이 될 사람들일 테니.”
들켰다.
나일의 마음의 내게 향해있다는 사실, 이 망할 놈이 눈치채버렸어.
그 부하나 상관이나, 잔인한 놈이 눈치까지 빨라 버리면 너무한 거 아닌가?
나일의 입단속만 시키면 될 거로 생각했던 내가 안일했던 거다.
“어제는 미처 몰라봤군. 알았다면 더 사근사근하게 대했을 거야. 내 사과하지. 그러니 그렇게 무섭다는 표정으로 내뺄 거 없어. 우리는 한편이니까.”
입을 가로로 다물고 아무 말이 없자, 로건은 비뚜름한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왜 잘 지내보자는 말에는 아무 대답이 없지? 난 미래의 황태자비가 될 사람과 잘 지내고 싶은데 말야.”
미래의 황태자비.
그 단어에 놀라 아마 눈을 동그랗게 떴을 거다.
크게 뜬 눈, 살짝 벌어진 입, 깜짝 놀란 내 기색을 기민하게 읽어낸 그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표정을 보아하니 설마 하급 귀족이라 황태자비는 꿈도 못 꿨던 건가? 혼인 장사는 푼돈이 아쉬운 장사치들이나 하는 거야. 리베르 황가도 황가지만… 후페이 공작가가 함께 하는 한 그런 싸구려 혼인 장사는 고려치 않아. 나일은 자신이 원하는 여성과 혼인할 거고 우리 모두는 그걸 지지할 거야.”
“….”
자기편으로 살살 구슬리는 듯한 이 말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저 말들을 그대로 믿어도 되는 걸까? 아니면 내 마음을 놓이게 해서 방심한 틈에 목을 쓱싹하려는?
“말만 잘하던 여자가 갑자기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됐는지 모르겠군.”
친절해진 그의 태도와 말 안에 숨겨진 의도를 찾기 위해 숨을 죽이고 그를 노려보았다.
새파란 시선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내리꽂혔다.
“하….”
참았던 숨을 티 나지 않게 노력하며 내쉬었다.
내 마음을 놓이게 해서 방심한 틈에 목을 쓱싹하려 한다고?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능력이라도 가졌었나? 그는 로건 후페이다.
호수에서 봤잖아, 이 능력자라고.
나같이 아무 능력 없는 여자 한 명 죽이는 일은 개미를 짓이기는 일만큼이나 그에겐 쉬운 일일 텐데, 살살 구슬려 속일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죽이려 마음먹는다면 로건은 날 언제든 죽일 수 있다.
이렇게 장황한 말 늘어놓을 필요 없이.
“내가 갑자기 황태자비라는 너무 먼 이야길 꺼내 이리 입을 다물게 된 건가? 무튼 이해했으리라 생각해. 시간을 많이 지체했으니 난 이만 자리를 뜨지.”
그가 내게서 가볍게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멈춰 서서 한 마디를 더 물어왔다.
“아 맞다.”
“….”
“알레나 멘데와 친한 사이지? 얼마나 오래된 사이지?”
그가 술집 문을 반쯤 민 덕에, 열린 문틈으로 바람이 불어닥쳤다.
부는 바람에 제멋대로 흩날린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대답했다.
“각하와 전하의 사이에 비한다면 한없이 얕은 사이겠지요.”
“그래?”
눈을 찡그렸다 뜨느라 내 대답을 듣는 로건의 표정을 보지 못 했다.
그가 웃고 있었던가? 아니… 어떤 표정이었지.
“그건 왜 물으시죠.”
“아… 내 취향이 너무 아니라서 말야. 아, 걱정하지 마. 넌 내 취향이니까. 나일이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지 그 녹색 눈동자를 보면 알 것 같기도 하거든.”
“…아마 각하도 알레나의 취향은 아닐 거라는 데 제 눈을 걸죠.”
“아~ 친하게 지내자니까 그러네.”
로건은 그 말을 남기고 술집을 나갔다.
*
무대의 가장 상석은 황제와 황후의 차지였다.
황제는 제 왼편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의 왼편엔, 무대 아래 제국민들을 향해 그럴싸한 국모의 가면을 쓰고 웃음 짓고 있는 황후가 앉아있었다.
‘정말 꼴도 보기 싫군.’
대신 황제는 제 오른편으로 자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저주를 떨치고 일어나 건강을 되찾은 그의 아들 나일이, 자신과 똑 닮은 잘생긴 얼굴로 제국민들의 환호를 받고 있었다.
그는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 손잡이에 팔을 올리고서 턱을 괸 자세로 흐뭇하게 자식놈을 바라보았다.
‘누굴 닮았는지 정말 멋들어지게 웃는군.’
“나일.”
“예, 폐하.”
친근한 표현을 내버려 두고 딱딱하게 불러오는 호칭에 그는 살짝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평소 쓰지도 않던 폐하는 무슨.”
“공식적인 자리인지라.”
주변을 의식한 것인지 아들놈이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한 바퀴를 둘러본다.
황제는 나일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며 살갑게 말을 건넸다.
“들리지도 않는다 이놈아. 난 황제이기 전에 네 아버지다. 아니냐? 섭섭하게 굴지 마라.”
“예. 아버지.”
쑥스럽게 대답해 오는 나일을 보며 그는 다시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자궁에 찾아가도 볼 수 있는 것은 실의에 빠진 얼굴뿐이었는데, 지금 나일의 얼굴 위로 꽃핀 감정은 저주를 끝내고 찾은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과 환희였다.
제 자식놈에게 찾아든 그 감정이 반갑고도 기뻐서, 젊은 황제는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
“예. 아버지.”
“이제 미뤄두었던 황태자 책봉도 곧 하면 되겠구나. 미룰 것 없이 바로 하자. 책봉도 하고, 그래 황태자비도 바로 맞이하고.”
황태자비라는 단어에 눈에 띄게 반응하는 아들의 반응을 아버지 된 자가 모르고 지나칠 리 없었다.
그 단어만으로도 설레는지, 살짝 상기된 나일의 얼굴을 보며 황제가 물었다.
“아들 너… 설마 언제? 아니지?”
잠깐 머뭇거리던 나일의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직은… 아직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곧….”
건강을 되찾은 게 바로 직전인데 언제 누군가를 마음에 들였단 말인가.
‘요망한 녀석.’
아파서 골골대고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아비 몰래 할 건 다 하고 있었구만?
황제의 눈에 비친, 아비 앞에서 솔직하기 어려워하는 아들의 모습은 귀엽기만 했다.
건강도 되찾고, 사랑도 찾았으면 경사로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아들 주변에 그의 환심을 살만한 영애가 그 사이에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밝기만 했던 황제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지자, 나일이 제 아비를 보며 의아한 얼굴을 한다.
“아들 너….”
“예?”
“치료제 세 명 중 한 명은 아니겠지?”
“….”
- 입궁하는 치료제들과 친분을 쌓지 말거라.
나일은 아비의 물음에 그가 과거에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살이 닿다 보면 그런 마음이 생길 수 있으나, 안 된다. 치료제들에게 정을 주지 마. 쓰고 버릴 존재라 여겨라.
치료제 세 명 중 한 명이라.
이걸 맞다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 전에 왜 치료제는 안 된다 말씀하시는 걸까.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치료제와 어머니가 얽힌 나쁜 기억 때문인가.
“그 세 명 중 한 명, 아닙니다. 아버지.”
“그래.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