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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88)화 (88/134)

88화

우리는 꼭, 할 건 하면서도 해놓고서 자주 말을 잃곤 했다.

이런 순간마다 그를 관찰해보고 얻은 결론인데.

나일은 주로 일단 저지른 후에, 뒤늦게 찾아오는 쑥스러움을 감당하는 타입이었다.

머쓱한지, 제 목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먼저 적막을 깼고, 나는 반갑게 대답했다.

“참, 문양이 흐려지지 않았어요?”

“문양이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발목에 문양이 살짝 연해졌다고 느끼던 차였다.

“당신 덕분에 내가 거의 건강을 되찾았기 때문이에요. 저주가 사라지면 발목에 문양도 없어져요. 우리 자주 닿아서 아마 많이 흐려졌을 것 같은데, 맞아요?”

그렇구나.

모르던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 연해졌다고 느끼고 있었어요. 그럼 당신 몸에 있는 문양도 같이 사라지나요?”

나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양이 사라지는 쪽은 치료제 쪽 뿐이에요. 아버지 몸에도 아직 남아있을 거예요.”

오늘 씻으면서 본 발목을 떠올렸다.

그가 시력도 되찾았고, 몸 상태가 좋아진 게 너무 확연히 보였기에 거의 치료가 끝나가고 있겠구나,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혹시… 내가 모르고 있을 만한 거, 더 알려줄 거 있어요?”

“음….”

내 요청에 그가 잠시 뜸을 들였지만, 나일은 이내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

“방금 말한 게 다일 거예요. 그 외에는 나도 알고 당신도 익히 아는 것들.”

“….”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뜻하지 않던 수확이었다.

그럼 적어도 로건은 치료제의 몸에 문양이 있는 한, 치료제를 죽일 수 없게 된다.

치료를 다 끝내지 못하고 치료제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나일도 다시 원상 복귀되고 말 테니까.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요.”

“나일.”

“…?”

“내게 선물 주고 싶다 말했던 거 아직 유효해요?”

“당연히, 얼마든지요.”

무엇이든 들어줄 것 같은 남자의 표정이 나를 안심시켰다.

“아, 그리고 이건 제안인데. 치료는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으니, 축제 첫날인 내일 당신이 완쾌되었다 발표하는 건 어때요? 어차피 이번 축제의 목적 중 하나가 제국민들에게 황자의 건강한 모습을 알리는 거니 더 좋지 않을까 해요.”

그가 다행히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잘 해요. 무대 아래에서 응원할게요.”

내일 바쁠 테니 일찍 잠들어야 한다 말하며, 빙긋 웃고 서 있는 그의 등을 떠밀었다.

*

5월의 여왕을 뽑는 3일 동안 치료제들은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황자를 건강하게 되돌려놓은 세 명의 치료제가 누구인지 제국민들이 궁금해 할 법도 한데.

황실에선 치료제들을 꼭꼭 숨겨놓자는 분위기라, 3일의 축제 동안 치료제들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정은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괜히 치료제들을 만인 앞에서 공표했다가, 누군가한테 노려지는 일이라도 생기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이 기간에 치료제가 자유로웠던 건 원작도 마찬가지라, 피비는 이때를 틈타 다시 서제국 첩자와 접선한다.

동제국 황실도 첩자 색출에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었기에, 피비와 연락을 주고받던 서제국 첩자가 한 번 잡혀가는 일이 발생하고, 연락을 기다리던 그녀와 새로운 서제국 첩자가 다시 접선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니까 3일 동안, 피비 대신 첩자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축제 인파 속에 섞여서 첩자와 만날 것이라는 얘기였다.

“진짜 아름답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축제 퍼레이드를 위해 만든 수십 개의 꽃 울타리를, 행사용으로 제작된 열린 마차를 탄 5월의 숙녀들이 비싼 생화를 뿌려가며 퍼레이드 중이었다.

관광객들의 머리 위로 색색의 꽃잎이 흩날렸다.

“퉤.”

하늘하늘 내려와 벌어진 내 입속에 안착한 꽃잎을 뱉어냈다.

매년 하는 축제지만 특히나 올해는 그 규모가 더 크다 했나.

건강한 황자의 모습을 몇 년 만에 드러내, 황가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한 올해의 축제는 유달리 돈을 많이 쓴 티가 났다.

나는 무대 위에서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중인 나일을 올려다봤다.

황제와 황후 옆, 한 자리를 차지한 그의 모습은 건강하고 신뢰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황후와는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네.’

간간이 즐거운 얼굴로 말을 주고받는 황제와는 다르게, 나일은 황후와는 단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마치 황제와 황후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놓인 것처럼,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서로가 있는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다만 나일만이, 제 어미가 앉은 자리를 가끔 확인할 뿐이었다.

순간, 나일이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숨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내 앞에 서 있던 덩치 큰 남자의 뒤로 몸을 숨기고서 빼꼼 무대 위를 살폈다.

이쪽을 한 바퀴 돌아본 그의 시선이 건너편으로 옮겨가 있었다.

‘지금 몇 시지.’

오늘의 핵심은 황제와 황자 부자가 함께 펼치는 이 능력이었다.

퍼레이드도 멋지지만 다들 기대하고 있는 행사는 그 순서겠지.

원작에서 피비가 갔던 장소를 확인하고 그때까지는 돌아와야 했다.

머리 위에 떨어진 꽃잎을 털어내고서 자리를 떴다.

*

대낮부터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꽃을 든 여인들의 행진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이미 술집의 야외 테이블은 만석이었다.

‘붉은 달.’

행진이 지나가는 중심 거리의 가장 큰 술집, 붉은 달.

멀리서 가게 간판을 확인하고 발 디딜 틈 없이 늘어선 야외 테이블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지나쳤다.

피비는 여관을 겸하고 있는 이 술집의 안쪽 2층 방에서 첩자와 접선했다.

접선 후, 그녀가 첩자로부터 배운 것은 독약 제조법이었다.

제조 후 한 시간 내에 사용해야만 효과를 발휘하는 독약이었기에 미리 반입해 숨겨 두었다가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대신 그 독약은 은 식기를 변색시키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었고, 나일은 아무 의심 없이 독약을 마신다.

‘바보 같은 피비.’

피비의 의도는 제 사랑의 방해꾼인 로건을 없애는 것이었지만, 서제국은 순진한 그녀를 속인다.

원작에서 서제국은 피비에게 해독제라고 속여서 나일의 잔에도 독을 타게 한다. 피비는 자신이 해독제를 타 나일을 구했다고 알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워낙 다양한 독에 내성이 있던 터라 나일이 금방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피비를 대신하는 첩자가 있다면 몰래 누군지만 알아가면 돼.’

어차피 독약은 동제국 황족에겐 그리 위험한 물건도 아니니까.

술집 문을 밀고 들어가자, 가장 큰 술집답게 안쪽에도 빈자리 하나 없이 사람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일단 주인장에게 가서….

“저 아니라고요!”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이 소란스러웠다.

지척에 다가온 주인장을 앞에 두고 남자의 고성이 들리는 계단 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냥 술을 먹으러 왔을 뿐이라고 안 합니까! 으아악!!”

바락바락 소리 지르던 남자의 목소리가 이내 비명으로 바뀌었다.

우당 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긴 비명을 내지르며 남자 하나가 계단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나를 비롯한 술집의 모든 시선이 계단을 굴러 바닥에 처박힌 남자에게로 모였다.

“아니라고?”

아마 남자를 2층 계단 앞에서 발로 차 떨어트렸을 거라 예상되는 이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가 계단을 천천히 밟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제누스?’

어제의 그 기사?

어제완 확연히 다른 사나운 얼굴을 한 자는, 로건 후페이의 명을 받들던 제누스라는 기사였다.

그가 검은 구두 굽으로 굴러 떨어진 남자의 머리를 짓밟았다.

“술을 먹으러 왔을 뿐이라고? 그럼 이것도 술인가? 마셔봐 그럼.”

제누스의 손에서 떨어진 작은 약병 하나가 남자의 머리 근처를 굴렀다.

제 머리 근처를 구르다 얼굴 앞에서 멈춰선 약병을 보고서 남자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마시면 술로 인정해주지.”

제누스의 권유에, 두 눈을 감은 남자는 바닥에 얼굴을 묻고 이를 악물 뿐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는데, 남자를 포박하며 날 발견한 제누스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역경에 처했던 어제의 그… 란셀롯 영애 아니십니까?”

방금까지 지었던 살벌한 표정을 싹 날려 먹은 그는 어제의 친절한 기사로 변해, 웃는 낯으로 날 바라보았다.

“또 뵙네요. 기사님.”

“어제는 안전하게 잘 들어가셨습니까? 각하께서 안전하게 황궁으로 모시라 명하셨는데, 중간에 내리시는 바람에 명을 끝까지 완수할 수 없어 신경 쓰였습니다.”

“아… 기사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인가 봅니다. 아무 탈 없이 집에 들렀다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거든요.”

“하하하, 다행입니다. 다행. 이제야 이 제누스의 마음이 편안해지는군요.”

호쾌하게 웃는 그를 따라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가, 방금까지 사람의 머리를 짓밟던 그의 까만 구두를 무심결에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어떤 역경에 처해 계신 겁니까. 오늘도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요.”

내가 따라 웃지 않자 그는 금방 웃음을 멈추었다.

그저 기사도에 불타는, 친절한 기사의 이미지만 갖고 있었는데 이 사람….

‘눈치가 엄청 빨라.’

“여기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이라고 하더군요.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역경에 처하지 않았답니다.”

“하하, 그런가요? 저의 괜한 걱정이었군요.”

“그런데 무슨 큰일이 있는 건가요? 만나기로 한 장소가 너무 어수선해지면 장소를 바꿔야 할까 봐요.”

내 물음에 그는 가볍게 손사래 쳤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평민들이 마시는 술이지만 이 집 술과 음식이 나름 괜찮으니 오늘 오신 김에 마음껏 맛보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제 동료들이 곧 정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명 무슨 큰일이 난 거냐, 일의 정황 설명을 요청했는데.

기사는 내 질문의 요점은 쏙 빼고서 능구렁이 빠져나가듯 답을 하며 미소 지었다.

“제누스! 가자.”

2층 계단에서 나타난 또 다른 기사가 제누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 기사의 손에는, 주먹으로 얻어터진 것인지 딱딱한 구둣발에 차인 것인지 얼굴과 몸이 만신창이가 된 중년 남자의 멱살이 들려있었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작은 약병과 제 동료를 확인한 중년 남자는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저 중년 남자… 궁에서 본 적이 있어.’

본궁에서 스치듯 몇 번 얼굴을 본 기억이 있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서제국 첩자와 피비를 대신하는 동제국의 첩자란 말인가?

2층에 있던 기사들이 이 둘만이 아닌 건지, 2층 계단에서 같은 복장을 한 기사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 네 명의 기사들이 이미 얻어맞아 짐짝처럼 늘어진 두 남자를 수습했다.

“다 끝냈나?”

술집의 문이 열리며 그들의 상관, 로건 후페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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