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저기요! 세워주세요!”
마차는 황궁을 향해 착실히 달리는 중이었다.
눈에 들어온 장면이 달리는 마차에 의해 점점 가까워졌다.
보이는 것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는 급하게 마차꾼을 불러 세웠다.
“…?”
영문을 모르는 알레나를 뒤로 하고 나는 마차 창문에 매달려 밖을 살폈다.
저 멀리, 황궁을 오르는 언덕길이 시작되는 광장이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그 중앙에 솟아있는 무대 위, 내가 요즘 맨날 보고 사는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일….’
무대 위 길쭉한 두 남자가 끈적하게 엉겨 붙어 있는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일은 제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은발 남자의 등을 후려 패는 중이었는데, 누가 봐도 공에게 붙잡혀 앙탈을 부리는 수처럼….
“뭘 그렇게 몰래 보는 거야.”
옆으로 다가온 알레나가 나와 같은 모습으로 창에 매달렸다.
“먼저 가더니 저기 가 있네.”
그녀는 무대 위 둘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 감흥도 일지 않는지 덤덤하게 말했다.
“너는 저 장면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어?”
“저 장면? 음… 둘이 되게 친한 사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사내들이 우정을 저렇게 끈적한 스킨쉽으로 나누는 장면을 나는 비엘에서 밖에 보질 못 했는데.
“사내놈들이 저렇게 부둥켜안고 있는데?”
“…사내놈들 저렇게 잘 부둥켜안고 그래.”
“그래?”
“…그럴걸, 친하면.”
“….”
그래, 저건 우정의 포옹일 수도 있다.
포옹이 사랑에게만 허락된 건 아니잖아.
누구든 원하면 언제든 자유롭게 포옹할 수 있지.
‘사이 엄청 좋아 보이네.’
로건이 나일의 어깨 위로 두른 팔은 퍽 자연스러웠다.
함께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차갑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일에게로 향해 있는 그의 푸른 눈은 정겹기 그지없었다.
똑같이 사람 보는 눈빛인데 저렇게 다를 수가 있나.
- 아직도 기억나요. 회색 로브 안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던 푸른 눈이.
그 순간, 전 치료제 동생의 말이 떠올랐다.
푸른 눈일 뿐, 그건 로건 후페이가 아니다.
그때의 그는 아주 어린 아이였을 테니, 푸른 눈이란 건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자꾸만 그 말이 생각나는 건지.
“이제 가죠.”
나는 뒤로 밀려나는 둘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
늦은 밤, 나일은 축제 때 입을 새로 맞춘 의상을 봐달라며 내 방을 찾았다.
쑥스러운 얼굴로 방문을 밀고 들어온 그도, 알았다며 문을 열어준 나도.
옷이 아닌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둘 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저 눈이 마주치자 잠깐 시선을 어그러트리며 웃음 지을 뿐이었다.
“옷이 왜요? 어디 잘못됐어요?”
“전체적으로 이상한 부분 없는지 한 번 봐줄래요?”
검은색 옷감 위로 같은 계통의 검정 장식들이 세세히 들어간 예복은 고급스러웠다.
장식들이 많이 들어간 옷이었지만 소재만 다를 뿐 같은 검정 계열이어서 조화로웠다.
오히려 한 가지 색이라 너무 단조로울 수 있는 느낌을 눈에 띄는 은장식들이 지루하지 않게 받쳐 주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지는 때인지라 상의는 사르르 흘러내리는 실크 소재였는데, 축 늘어지는 소재인 만큼 그의 예쁜 골격이 잘 드러났다.
‘너무 잘 어울려서 만점 주고 싶은데….’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굳이 꼽자면.
“답답하지 않아요? 움직일 때마다 목이 졸릴 것 같은데.”
단추가 왜 이렇게 많아.
카톨릭 성직자들이 입는 신부복의 로만칼라처럼 목 중간까지 올라온 셔츠 깃이 영 답답해 보였다.
많이 간소화했다곤 해도 예복으로 만들어진 옷이라, 여기저기 갑갑하게 단추를 채워놓은 탓이었다.
“조금만 풀면 좋겠어요.”
그가 가만히 있자, 나는 맨 위 단추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한두 개만 풀고 말 예정이었는데, 단추를 풀어나가는 내 손길에 긴장한 듯 상체가 굳어가는 나일을 보자 장난기가 도진 것은 내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번째 단추를 풀 때부터 그가 당황해 내 손길을 저지할까.’
속으로 그 생각을 하며, 벌써부터 웃음이 나려는 입을 꽉 물고 단추를 풀어나갔다.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풀린 단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만큼 얇은 셔츠는 단추를 푸는 족족 아래로 축축 쳐졌다.
그 사이로 그의 가슴팍이 보이기 시작하자, 도리어 민망해져 버린 것은 나였다.
‘아니 왜 반응이 없어….’
아 너무 열었는데.
이쯤이면 그만 풀라며 쑥스러운 듯한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이기나 해봐 그래.
얼굴로는 민망해하면서도 손길은 멈추지 않고 쭉쭉 아래로 내려갔다.
“…어? 안녕… 눈이 마주쳐 버렸네.”
“….”
결국 나는, 나를 보고 웃는 남자의 배꼽을 만나고서야 나쁜 손길을 멈출 수 있었다.
하하 이런. 네가 안 말리니까 여기까지 풀어 버렸잖여 이눔아.
“하하핳… 배꼽 미남이셨지 참. 예전에 붕대 감을 때 봤었는데 까먹을까 봐 확인했어요.”
“푸흡, 뭘 확인했다구요?”
“배, 배꼽… 아, 아니에요.”
창을 타고 들어온 바람이 그의 셔츠 안으로 숨어들었다.
셔츠가 창에 매달린 커튼처럼 펄럭거렸다.
배꼽까지 훤히 드러난 남자의 가슴 앞에서 혼자 장난치다 혼자 부끄러워하는 나를 보며 나일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단추를 배꼽까지 열고 다니는 게 마음에 듭니까?”
“….”
“이 정도면 거의 벗고 다니라는 거 아닌가. 가슴을 이렇게 내놓고 다니면 나 큰일 납니다.
영애들이 가만 안 둘 텐데.”
“….”
“막아줄 자신이 있나 봐요?”
장난쳐서 죄송합니다. 시정 할 테니 그만 놀려요.
“자신 없어요. 생각 보다 너무 많이 풀었어요. 다시 잠가 줄게요.”
배꼽 근처부터 시작해 단추를 다시 잠가나갔다.
아, 풀 때는 잘만 풀렸는데 잠그려니 잘 안 잠겼다.
“내가 할게요.”
허둥거리는 내 손 위로 그가 제 손을 겹쳤다.
단추 하나를 잠그기 위해 두 사람의 손이 애를 쓰다가, 그가 자신의 심장 부근에서 내 손을 꾹 눌렀다.
“….”
번져오는 따듯한 체온 위로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뛰고 있는 그의 심장을 손바닥으로 움켜쥔 느낌.
“잘… 뛰네요. 내 덕분에.”
“네, 덕분에 잘 뛰고 엄청 빨리 뛰죠.”
“그런가….”
“그런가라뇨. 여기서 더 빨리 뛰면 그건 위험한 상황이라구요. 이 여자 정말 만족을 모르네.”
만족을 모르긴 야.
창피해서 그렇지.
잡힌 손을 빼내자, 나일은 웃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눈길이 그의 체온만큼이나 따듯했다.
싱긋 미소를 지은 그가 나머지 단추를 다시 잠가나갔다.
“제안은 고맙지만 이런 노출 없이도 전 충분히 섹시하기 때문에, 단추는 목 아래 두 개만 푸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배꼽까지 풀고 나가면 리베르 황가 최고의 경박한 황자로 기억될지도 몰라요.”
“풉.”
최고의 경박한 황자라니.
그 말에 입에서 실소가 터져나갔다.
그는 본인이 우스운 소리를 내뱉었다는 걸 모르는지, 말을 이어나가는 표정이 꽤 진지했다.
“음험한 시선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 단추를 많이 풉니까, 오늘도 무대 위에서 얼마나 꺅꺅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왜 다들 아는 걸 그대만 모르는지 참. 나 어디다 뺏겨도 괜찮아요?”
“….”
아… 오늘 무대 위에서.
나일은 분명 농담조였는데 그 말을 나는 농담조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로건과 둘이 무대 위에서 너무나 다정해 보이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나가다 봤어요.”
“무대 위에 있을 때요? 언제?”
“알레나랑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에요. 공작님과 둘이서 온갖 환호성을 받았잖아요. 봤어요.”
나일은 내 말에, 그렇다면 어떠냐며.
나를 다른 위험한 여자들로부터 보호해야겠다는 경각심이 좀 들지 않았냐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방금까진 나 역시도 장난스러운 기분만 가득했는데.
슬금슬금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그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글쎄요. 그래야 하나…. 후페이 공작님 인기가 더 좋은 것 같던데.”
“음, 성질은 더러워도 겉은 뭐, 봐줄 만하니까… 근데 이봐요. 내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피비 셀린 양. 나는 지금 당신 칭찬에 목마르다구요. 다른 남자 얘긴 꺼내지도 마요.”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피비 셀린 양이라니.
그 표현이 곤두박질치던 내 기분을 구해냈다.
당신도 내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답니다.
“다른 남자가 아닌 로건 후페이 공작님이잖아요. 당신과 제일 친한. 막역한 사이잖아요? 형제나 다름없는.”
나일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위해 목숨도 버릴 친구죠. 나도 그렇고. 내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에요.”
그렇다면 만약,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당신은 어쩔 건가요. 나를 선택할 건가요, 나일.
“….”
당신의 마음이 원작과 달리 내게 온 것처럼, 로건의 마음도 원작과 달라져 있길 바라요.
그래서 당신이 유일한 친구도 나도 잃지 않았으면 해요.
하지만 그의 마음의 방향이 당신이라면 난 어쩌죠.
그래서 원작처럼 온전히 당신을 얻기 위해 날 제거하려 든다면 나는.
‘이 사람을 포기하고 어딘가로 도망쳐야 하는 걸까.’
‘이 사람을 포기해? 이 사람을 더 못 보게 된다고?’
‘싫어….’
팔을 뻗어 나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내 행동에 놀란 그가 살짝 움찔댔으나, 남자는 이내 크고 단단한 팔로 날 감싸 안아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요”
“아니요. 아무 생각도. 그냥 당신과.”
“당신과?”
당신과 이대로 계속 아무 생각 없이 장난치는 날들이 계속되길.
“그분이 마음에 둔 상대는 따로 없나요.”
내 말꼬리를 붙잡고 있던 나일은 내게서 다른 질문이 나오자 의아한지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곧 그는 제 표정을 갈무리했다.
여느 때와 같은 미소로 그가 답했다.
“없어요. 아마 다음 생 정도면 생길지도 모르죠. 아주 마음이 바싹 메마른 악독한 놈이거든요.”
“하나뿐인 친구에 대한 평가가 너무 신랄하잖아요.”
로건 후페이에 대한 신랄한 평가 속에서, 나일이 얼마나 그를 아끼고 신뢰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아직 로건이 나를 헤칠 거라는 증거 따위는 조금도 없어.
그런데 갑자기 ‘당신의 유일한 친구가 나를 헤칠지도 몰라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걸.
조급한 건 사실이지만, 천천히.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좋으니 무언가를 확인한 후에 행동해도 괜찮을 거야.
유일한 친구를 아무 증거도 없이 의심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내가 원하는 건 그가 나도, 제 친구도 잃지 않고 행복해지는 일인걸.
나일이 갑자기 내 이마 위 가지런한 앞머리를 흐트러트리는 바람에, 그의 가슴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친구 얘기는 됐어요. 내 얘기 물어봐 줘요.”
“나는….”
“이 감정이 질툰가?”
“네?”
나일은 조금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설마 내가 로건한테 질투를 느낄 줄은 몰랐는데….”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려 애쓰는 듯, 나일은 눈을 가느스름히 좁혔다.
“진짜 옷만 보이고 가려고 했는데.”
“…?”
눈앞으로, 남자의 까만 정수리가 내려온다 싶더니.
-툭
힘없이 끊어진 얇은 목걸이 줄의 끝부분이 앞으로 끌려 나오며 살을 간지럽혔다.
나일이 입에 문 목걸이를 바닥으로 뱉어내자, 목걸이 줄에서 도망친 보석이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덕분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내가 놀란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어 저기….”
황실 세공사가 지금 휴가 중이란 말이에요.
그러나 내 말은, 그가 인중이라고 해야 할지, 윗입술이라고 해야 할지, 그곳을 무는 바람에 발음이 다 뭉개져서 나와야 했다.
“황슬 스공사가 지금 흐가 증….”
“푸흐흐흐.”
“….”
아니, 남의 인중 물고 웃지 말라고요.
나일이 살짝 물고 있던 인중을 놓아주며 말했다.
“먼저 다가와 주기를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라는 걸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갑자기 깨물리는 바람에 깜짝 놀란 인중을 위로 차, 손으로 내 입술을 꾹 누르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인중을 이렇게 무는 걸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이건 협박 같은데.”
“….”
그가 제 이마를 내 이마에 콩, 부딪히고는 소곤거렸다.
“나 질투하는 거… 싫어요.”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짤막하게 붙였다 떼고서 희미하게 웃음 짓자, 나일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빨리 당신의 애정을 아무 불안함 없이 느끼고 싶어요.
내 안에 깔린 고요한 불안과 의심이 언제 요동칠지 몰라, 당신의 애정을 느끼는 이 순간을 충분히 만끽할 수 없어서 아쉬운걸요.
불안을 잠재우려 나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뒤로 이어질 행동에 놀라지 말라는 듯, 바르르 떨리는 숨결이 먼저 소식을 알려왔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입안으로 숨을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