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래서?”
말 위의 남자가 꼿꼿한 자세로 날 내려 보았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
“이봐, 너.”
로건의 목소리가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진지한 표정으로 제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우습다는 듯, 그의 입매가 한쪽으로 치솟았다.
“그래. 넌 내게 부탁한 적이 없지. 그리고 네가 어떻게 부탁했든 결과는 같아.”
“….”
“네가 마차를 뛰쳐나와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호소를 하는 이유는, 네가 부탁했다면 내가 들어줬을 거라고 생각해서겠지? 오만하기 짝이 없군.”
그가 입술을 비죽이며 눈웃음쳤다.
“내가 지킨 대상은 너 하나 따위가 아니라 도둑놈을 살려뒀을 때 또 나올 피해자와 동제국의 질서다.”
“….”
“그러니 건방 떨지 말고 마차로 돌아가서 할아버지 일어나시면 알량한 말주변으로 재롱부리면서 황궁으로 돌아가도록 해.”
그 말을 끝으로 말을 돌려 달려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제국의 공작인 그가 마차꾼을 어떻게 처리하든 처음부터 내게 간섭할 권한 따위 없었으니.
나일이라면 달랐겠지만, 그는 로건 후페이니까.
“하하….”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무서운 것도 잊고 용기 내 말 했건만, 남은 건 없군.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마차에 타 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알레나가 마차에서 나와 팔을 잡아끌었다.
“뭘 말려?”
“하나 마나 한 말이었으니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저런 자들한텐 하나 마나 한 말이라고. 더군다나 너 그 사람을 무서워하면서 왜….”
이미 한바탕 무시당하고 스스로도 잘 알고 있던 사실을 꼬집히자 속에서 짜증이 일었다.
“내가 공작을 무서워한다는 걸 그렇게 잘 알면서 그 옆자리만 남겨두니?”
“그건….”
그게 사람이든 신념이든 자기가 지키는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무 가치도 두지 않는 인간.
나는 속으로 로건 후페이를 그리 정의 내렸다.
고개를 돌리니 마차꾼의 시체를 기사들이 수습하고 있었다.
힘없이 늘어져 질질 끌리는 시체 뒤로 붉은 선혈이 궤적을 남기는 모습에 나는 가늘게 눈살을 찌푸리다 고개를 돌렸다.
‘확인해야 한다.’
지금 가려고 하는 길이 안전한 길인지 가기 전에 알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저 꼴이 나는 건 나라고 다르지 않겠지.
“앞자리에 앉아서 공작과 마주 보는 자리보다 옆이 나을 거라 생각했어. 생각이 짧았다.”
괜한 내 화풀이에 알레나는 할 필요 없는 변명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진 마음에 입술을 깨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찌 됐든 간에 로건 후페이, 그가 드디어 돌아왔다.
잘 된 거야, 잘 된 거라고 생각하자.
언젠가는 반드시 그를 확인하고 넘어가야 했으니까.
저 은발 남자의 마음의 향방을 확인하지 못하면 나는 행복을 코앞에 두고도 내내 이렇게 불안에 빠져 있어야 할 테지.
*
한 달 내내 5월의 숙녀들은 황궁과 수도를 오가며 꽃을 날랐고, 5월의 여왕을 뽑는 행사만을 앞두고 있었다.
5월의 숙녀들이 가슴에 품고 돌아다녔던 노란 튤립처럼, 그녀들을 보는 제국민들의 마음속에도 과연 올해 5월의 여왕은 누가 될지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났다.
동제국의 수도는 축제의 피날레를 즐기려고 모여든 제국민과 타국민들로 발 디딜 곳 없이 북적였다.
그만큼 저주에 잠식돼 잊혔던 황자의 부활을 알리기엔 최적의 때와 장소였다.
나일은 5월의 여왕을 뽑기 위해 준비된 무대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무대 위에 황제와 함께 올라 황권의 건재함을 알릴 생각이었다.
“저기 황자 전하 아니야?”
“치료제가 나타났다고 했잖아. 이제 보이시는 거 아닐까?”
“꺄아 너무 멋있잖아.”
무대 아래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군중의 시선이 무대 위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화, 황자 전하!”
군중 속에서, 귀족 영애 한 명이 불쑥 질문을 건넸다.
“이제 시력을 되찾으신 건가요?”
나일은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오래도록 저주에서 헤어 나오지 못 하는 황자로 인해, 리베르 황가의 존립이 위협받고 있다는 불신을 종식해줄 필요가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제 건강해지고, 평화로워진 자신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전하 그럼 이제 곧 황태자로 책봉되시고 황태자비도 맞이하시는 건가요?”
미소로 대답해주는 나일을 보고 다른 제국민도 용기를 냈다.
무대 위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름 모를 사람을 향해 경비병이 긴 창을 내려 앞을 가로막았다.
나일이 경비병을 향해 손짓했고, 경비병은 창을 거둬들였다.
다소 무례한 질문이었지만, 나일은 인상을 구기지 않았다.
질문의 내용이 사실이기도 했고 황태자비라는 단어에서 자연스럽게 그녀를 떠올리자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렇다.”
짤막하지만 호쾌한 대답에 군중 속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기뻐하는 그들을 나일은 흐뭇한 기분이 되어 바라보았다.
“나일.”
익숙한 목소리에 나일이 뒤를 돌았다.
말을 탄 은발의 사내가 그가 있는 곳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건이었다.
“살아났네?”
무대 위로 뛰어든 그가 나일을 반갑게 껴안았고, 미남 둘이 얼싸안는 눈부신 광경을 목도한 주위 사람들의 입에서는 비명에 가까운 고성이 터져 나왔다.
“야 떨어져. 이러니까 오해가 생기는 거 아냐.”
피비의 질문이 생각 나버린 그가 엉겨 붙어오는 제 친우를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밀어냈다.
“치료제를 찾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이었군.”
로건은 찌푸린 나일의 눈동자를 찾아 시선을 맞췄다.
늘 비켜 나갔던 나일의 눈동자가 제 눈동자를 찾아 시선을 맞춰온다.
살아나갈 마음이라곤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던 표정도 눈에 띄게 밝아져 있다.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가.
치료된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로건은 더없이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만면에 퍼진 기쁨 아래, 로건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꾸물꾸물 몸을 펴기 시작했다.
한숨 고르고, 그가 입을 열었다.
“완전히 치료가 끝난 건가?”
“아직.”
“얼마나 남은 거야?”
“곧.”
이미 무대로 관심이 옮겨간 나일이, 완성되어가는 무대 장치를 살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로건이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자, 나일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왜. 붙지 마라.”
“셋 중에 누구야.”
“….”
“진짜 치료제는 한 명이잖아. 누구야 진짜는.”
별 고심 없이 나일의 입이 열렸다.
“진짜는….”
“….”
“알레나 멘데 영애.”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고 그녀가 요청했으니까.
어째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해결되면 말을 해주겠지.
괜히 제가 해결해 주겠다며 알려 달라 물어도 답을 안 해줄 것이 뻔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 생각하며 나일은 로건의 질문에 답했다.
“알레나 멘데라고….”
로건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답한 멘데 영애의 이름을 되뇌었다.
왜 저래.
개인적인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지, 그럴 리는 없고.
“멘데 공작가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아니다.”
말을 급하게 마무리하는 모양새가 어째 미심쩍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일이 있다면 알아서 하겠지.
“그런데 왜 가짜 치료제 둘은 그대로 황궁에 남겨둔 거야?”
“아….”
나일은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실리.”
“실리?”
“감히 황궁에 가짜를 만들어 보낸 두 곳에 은근슬쩍 가짜라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흘려 넣었더니 알아서 저자세로 나오더군.”
괘씸한 자들을 응징하느냐, 그들이 자신들의 명예를 지켜주는 대가로 보내올 이득을 취하느냐.
그 두 선택지 중에서 나일은 후자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매는 때릴 때보다 들고 있을 때 효과적이지. 마음 바뀌면 언제든 때릴 수도 있고.”
제 선택을 설명하며 나일은 가볍게 웃고서 어깨로 시선을 내렸다.
아직도 로건의 손이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가 제 어깨를 털어내듯 슬쩍 기울였지만, 마치 접착제로 붙여놓은 듯 로건의 손은 그의 어깨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떼라고.”
“…건강해진 친우의 어깨를 느껴보고 싶은 게 잘못된 일인가?”
“…뭐가 됐든 내게서 느끼려 하지 마. 징그러우니까.”
나일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제야 로건은 웃으며 제 손을 내렸다.
먼지 털듯, 제 어깨를 툴툴 털어내는 나일을 보며 로건이 말했다.
“아직 끝난 건 아니라고 했지, 치료가 다 끝나는 건 언제쯤일 거 같아?”
“곧 끝날 거라니까.”
“끝나면 알려줘.”
집요하게 물어오는 로건을 나일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바로 축하해야지.”
일축하며 로건이 다시 양팔 벌려 나일을 부둥켜안았다.
“뭐 하는 짓이냐. 끔찍하다.”
나일이 버둥거리며 제 등을 팔꿈치로 찍어 누르는데도 로건은 그를 안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주위 곳곳에서 두 남자를 향한 비명과 탄성이 섞여 들려왔다.
놓아주면 점점 굳어가는 제 얼굴을 친구에게 들킬지도 모르니까.
“좋아서 그런다. 내 친구가 건강해져서.”
“후페이 공작. 놔라.”
“….”
“야 진짜 놔봐! 빨리!!”
*
원래는 파베라만 거처에 내릴 예정이었지만, 후페이 노공이 불편했던 우리는 거처에서 모두 내린 후 새로운 마차를 잡아탔다.
“별일 아니잖아?”
“응?”
그녀가 건넨 말의 의미를 몰라 되묻자, 알레나는 가볍게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
“네 표정이 너무 어두워서. 전 치료제를 말하는 거야. 누구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수 있어. 물론 찾던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기분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넌 지나치게 침울해 보여.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마차꾼의 일도.”
“아….”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뻐금거렸다.
“뭘 그리 걱정하는지 모르겠는데, 그 동생이라는 여자의 망상일 확률이 커. 그리고 실제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알레나가 목소리를 죽였다.
“황후가 시킨 짓이라고 해도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 전대에서 끝난 일.”
“응….”
바싹 메마른 입술을 축이며 대답했다.
알레나는 원작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르니 저런 반응인 게 당연했다.
그렇다면 원작을 아는 나의 이 불안은 당연한 건가?
괜한 불안으로 모든 걸 연결 지어 보려는 걸지도.
“너는… 황자는 혼자잖아. 질투에 눈이 멀어 널 죽이라 사주할 사람 같은 거, 네겐 없다고. 뭘 걱정하느라 그렇게 어두운 표정인 거야.”
마차 안 건너편 자리에 앉아 알레나는, 이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말이 스미듯이 천천히 이해됐다.
“너 어젯밤에 언제 네 방으로 돌아갔어?”
“…내 친구가 목적하던 바를 이루는 걸 다 듣고 난 후에.”
그 말에 목부터 얼굴까지가 열로 확 달아올랐다.
친구한테 민망한 장면을 생중계하다니.
“하 이거 참… 동제국 황실 방음이 영 별로네… 부실공사 어떡할 거야.”
조금 남사스러운 마음에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아마 얼굴이 새빨개져 있겠지.
괜히 창밖을 내다보며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 질을 해댔다.
“그래서 황궁으로 들어온 거잖아 너. 무슨 사정으로 여태껏 황자에게 정체를 속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
“이제 황자가 다 아는 거지?”
“응….”
작은 목소리로 쥐어짜 내듯 대답했다.
알레나는 그녀가 앉은 쪽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처음엔 별거 아닌 감정이라고 부인하더니….”
“….”
“거짓말쟁이.”
창밖에서 들어온 햇살이 내게서 고개를 돌린 그녀의 왼쪽 볼을 비췄다.
아직 자국이 다 사라지진 않았구나.
레나의 옆모습이 너무나 쓸쓸해 보여 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거짓말쟁이라니… 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뭐….”
어제 그녀는 충분히 슬픈 일에 마음 아팠으니.
괜히 그녀에게 일어난 불행의 총량만큼이 내게 기쁜 일로 일어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말없이 창밖만 보던 알레나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도와줄게.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언제든 내게 부탁해.”
그녀의 맑은 민트색 눈동자가 저녁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났다.
“당분간은 내 정체에 대해 지금처럼 함구할 생각이야. 그도 그러기로 했고.”
“그래.”
“고마워.”
“….”
“이 넓은 황궁에 의지할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 게 위안이 돼.”
저녁노을처럼 푸근한 미소를 보인 그녀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