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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85)화 (85/134)

85화

‘헉.’

마주쳐버린 로건 후페이의 눈은 삼백안에 가까웠다.

얇게 깔린 흰자위 위로 떠 있는 하늘색 눈동자가 이쪽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 위를 차양처럼 덮고 있던 은색 속눈썹이 꿈틀댄 순간.

‘자, 자연스럽게.’

나는 마치 할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와중에 눈이 마주친 것처럼, 자연스럽게 노공 쪽으로 눈동자를 이동시켰다.

널 보려던 게 아닌 네 할아버지를 보려던 거라고 제발 그리 이해해주겠니.

역시 티가 났겠지, 싶었는데 나를 잠시 응시하던 그가 다시 제 할아버지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흘렀을 때, 그가 가운데 좌석을 손가락으로 톡톡 쳐댔다.

안 들리고 안 보인다, 이야 할아버지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건 안 보인다는 표정으로 그쪽을 무시하려 했으나.

- 톡톡

볼 때까지 두드리겠다는 심산인가보다.

결국 흘낏, 그의 손가락을 본 후 팔을 타고, 어깨를 지나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내게로 검지를 까딱거렸다.

다르게 이해하고 싶었지만 분명 제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라는 의미였다.

할 말이 있는 건가, 싫은데.

“….”

자리를 옮겨 앉고 싶지는 않았기에, 좌석 손잡이를 꽉 잡고서 로건 쪽으로 몸을 천천히 떨어트렸다.

60도 정도 몸을 기울였을 때, 이제 네가 할 말을 하라는 뜻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을 망부석쯤으로 아는 건지, 내 쪽으로 조금도 몸을 기울이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 아니라고?’

흔들리는 내 눈빛을 읽었는지 이번엔 그가 고개를 세로로 끄덕였다.

“….”

원래의 성질머리 같아서는 할 말 있는 놈이 움직이라며 소리를 냅다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되지. 피비야 사람 가려서 행동해야지.

머쓱한 표정으로 몸을 바로 세운 나는 결국 엉덩이를 들어 옆좌석으로 옮겨 앉아야 했다.

그가 제 옆으로 이동해 앉은 내 귓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그렇게 못 볼 꼴이라도 봤다는 듯이 흘끔거리지?”

“….”

“흘끔거리면서 훔쳐보지 마.”

“….”

“기분이 더 더러워지면 그 녹색 눈알을 파버리고 싶어질 테니까.”

“하핳….”

“…?”

사람이 너무 두렵거나 어이가 없으면 실성하게 되는 법이니까.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들어본 욕 중에 ‘눈알을 파버리겠다.’는 류의 것은 없어서, 나는 그 신박한 욕설에 그만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평범하고 무난한 협박 표현인 죽여버리겠다, 등의 사망 선고를 했으면 무섭기만 했을 텐데, 왜 하필이면 눈알을 파버리겠다고 해서….

내 헛웃음에 심기가 더 언짢아진 모양인지 그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이 자식 얼굴은 티 한 점 없이 생겨놓고서, 성격은 아주 만신창이네 그냥.

허나 놈의 성질머리와 그 성질머리를 지체 없이 실행하고 마는 높은 행동력을 생각했을 때, 정말 눈이 파이기 전에 상황을 수습하는 게 옳았다.

“말없이 파버릴 수도 있었는데 파버리기 전에 언질 해 주셔서 얼마나 감읍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미리 알려주셔서 감사하고, 그럼 다시 떨어져 앉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들며 원래 자리로 이동하려 했을 때였다.

“하하, 우리 손자 녀석이 처음 보는 아가씨한테 귓속말을 하고, 아가씨가 웃으며 받아주는 모습을 다 보다니. 죽음을 앞둔 늙은이의 단 하나 남은 걱정이 오늘 사라질 것 같구만.”

후페이 노공은 나란히 앉은 로건과 나를 보며 껄껄 웃었다.

이 장면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할아버지에게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정쩡한 눈웃음을 보여준 뒤 엉덩이를 떼려는데, 옆에 앉은 남자에게서 쑥 뻗쳐 들어온 두꺼운 팔이 내 다리를 짓눌렀다.

“그냥 있어. 그리고 웃어.”

그가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어허, 젊은이들이 귀도 잘 안 들리는 노인을 앞에 두고 귓속말이라니. 아이야, 우리 손자 녀석이 네게 무어라 하더냐.”

그저 얼굴을 좀 흘끔거렸을 뿐인데 장님으로 만들어 준다는 협박성 멘트요.

라고 했다간 정말 옆에 앉은 남자가 자신의 경고를 실천하려 들겠지.

추측이긴 했지만 로건은 제 할아버지의 오해를 그대로 두고 싶은 듯했다.

“녹색 눈이 예쁘다 칭찬해주셨습니다.”

“….”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예상외의 대답이었는지, 옆얼굴이 뜨거웠다.

남한테는 살짝만 봐도 눈을 파버리겠다는 놈이 사람을 저렇게 대놓고 쳐다보다니.

그 불공정한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도 모르게 내리꽂히는 시선을 받아치고 말았다.

“그렇죠? 공작 각하.”

“…그래.”

그렇게 물을 수 있었던 연유는 원작의 공이 제 혈육을 끔찍이 위한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묘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마주 보던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호… 정말 그렇구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빛깔을 가졌어.”

노공의 눈길은 인자했다.

그때까지 파베라가 꺼낸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며 앞좌석엔 별 관심이 없던 그는, 관심의 대상이 내게로 옮겨왔는지 대뜸 다른 질문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아가씨들 셋이서 왜 이런 후미진 곳에 왔지?”

그 질문에 파베라와 알레나, 둘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적당히 둘러댈 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는 눈빛들이었다.

“땅을 보던 중이었습니다.”

“땅을?”

“축제 기간에 보니까 수도가 미어터질 것 같더라구요. 이 정도면 곧 수도확장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근처 땅을 둘러보던 중이었습니다.”

전 치료제를 만나러 왔던 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내 말에 후페이 전대 공작은 어리숙한 처자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피기 란셀롯이라 했나, 한창때의 아가씨가 축제를 마다하고 땅을 보러 다닌다니. 그만큼 가문이 어렵다고 봐야 할지, 남다른 관심이 있는 건지… 뭐든 재미있는 아가씨로구만.

좋아, 이 늙은이가 야망 있는 아가씨를 위해 하나 알려주자면 말이지. 수도의 상황을 보고 수도확장을 떠올린 건 영리한 생각이었어.

하지만 동제국 황실은 수도를 확장할 생각이 전혀 없다네. 이전이라면 모를까 확장은 하지 않을 거야, 정보가 부족해서 잘못 짚을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귀한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페이 노공 각하.”

그의 말에 고개 숙여 답하자, 노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가득 퍼졌다.

“엄한데 투자를 하려고 하질 않나 마차꾼한테 도둑질을 당하질 않나. 아주 엉성한 처자구만 그래. 하하하.”

대화가 종결되었다 여겨 아무 말도 하질 않자, 그가 말을 이었다.

“혹 엉성하다는 이 노인네의 표현에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겠지?”

물어오는 표정엔 아무 의도가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대답하면 큰일 날 것이란 사실은 여기 앉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귀한 정보를 주신 덕에 큰 손해를 막아주셨으니 기분이 상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왜 나는 한 마디에서 말을 끊지 못하고 꼭 두세 마디를 덧붙여야 속이 시원할까.

“이번에 실패를 겪지 않은 이유는 제 능력 때문이 아닌 노공 각하의 도움 덕분이니, 저는 실패에서 오는 경험치를 쌓지 못했고, 그렇다면 오늘 해야 했을 실패가 뒤로 미뤄진 것뿐이라 더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입니다.”

등받이에 푹 묻혀 있던 노공의 상체가 앞으로 조금 기울었다.

“아가씨는 실패에도 경험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실패의 경험치를 쌓으면 무엇에 좋지?”

관심 있는 주제라는 듯 기울어진 상체가 눈에 들어왔지만 내가 할 대답은 별 것 아닌 내용이었다.

“그저… 자신이 평범한 인간 중 한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장점이 있다면 자잘한 실패를 미리 경험한 사람은 큰 실패가 왔을 때 적어도 한 번에 고꾸라지는 일은 잘 없다는 것이겠죠. 자잘한 실패로 실패에 대한 내성이 생겼을 테니까요.”

“한 번에 고꾸라진 다라….”

내 대답의 일부분을 노공이 되뇌었다.

“그래. 그렇게 조금씩 실패와 원치 않는 일에 익숙해졌어야 했는지도 모르겠구나.”

회한이 서린 목소리였다.

제 손자를 쓸쓸히 바라보던 노공의 얼굴에서 즐거웠던 기색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할아버지 나름의 사연이 있는 거겠지.

더 물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 이후로도 몇 가지 주제로 대화에 열중하던 노공은 급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는지 색색거리며 졸기 시작했다.

그때, 안 그래도 대화 상대해주기 피곤했는데 노공이 조용해져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던 파베라가 입을 열었다.

“어? 저기 도둑놈 지나가네?”

마치 우연히 옆집 사는 사람을 발견했다는 듯 평이한 말투였다.

그냥 눈에 보여 말했을 뿐, 잡아달라거나 어떻게 해달라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파베라를 알고 있는 내게는 그리 들렸다.

그러나 그녀를 오늘 처음 본 남자에게는 그리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워라.”

낮은 목소리로 로건이 입을 열었다.

마차꾼은 으리으리한 마차가 옆에 서는 것을 힐끔 보고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아마 저 두툼한 자켓 속에 들었을 보석주머니의 주인들이 마차에 타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겠지.

그가 걷는 속도는 마차를 발견하기 전이나 후나 변함이 없었다. 

마차 창 너머로, 마차에서 내린 로건이 제 부하와 몇 마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마차꾼이 훔쳐간 주머니를 다시 우리에게 찾아줄 의도이겠거니, 그리 생각하며 창밖을 구경했다.

꾸벅, 로건에게 고개 숙였던 기사가 등을 펴고 말에 올랐다.

마차꾼은 등 뒤의 상황을 알지 못했고, 그저 바삐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마차 안에서 마차꾼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에휴, 불쌍한 아저씨.

한순간의 욕심으로 황궁 옥살이 신세가 되었구나.

그 한번을 참고 넘겼으면 손이 큰 파베라가 알아서 마차 삯을 두둑이 쳐주었을 텐데.

“어?”

그러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말을 타고 마차꾼에게 빠르게 가까워진 기사는 주저 없이 긴 장검을 검집에서 꺼내 들었다.

검집에서 몸을 빼내는 날붙이의 소리를 듣고 놀란 마차꾼이 허겁지겁 뒤를 돌았을 땐, 이미 기사의 장검이 하늘 높이 솟구친 뒤였다.

솟구친 칼날에 반사된 빛에 마차꾼이 눈을 찌푸렸고, 기사는 망설임 없이 장검을 아래로 그었다.

제 가슴을 가로지르는 긴 자상을 보며, 마차꾼이 자켓 속에 품고 있던 보석주머니를 떨어트렸다.

검 끝으로 주머니를 들어 올린 기사가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마차 곁으로 가까워졌다.

“받아.”

마차문 아래 계단을 밟고 선 로건이 내게로 끈적한 핏물이 밴 주머니를 건넸다.

차마 그 주머니로 손을 뻗지 못하고 있자, 그가 내 발치로 주머니를 던졌다.

굴러 떨어진 주머니가 구두 끝을 적셨다.

“먼저 황궁으로 가겠다. 안전하게 모시고 오도록.”

마차 밖에서 부하들에게 명하는 로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끝에 차이는 주머니를 밀어내고 마차 문을 열고 나갔다.

“공작 각하.”

막 출발하려던 로건 후페이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저를 부른 이를 돌아보았다.

“저는 물건을 빼앗겼다 말했지 죽여 달라 부탁드리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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