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말을 걸어온 자는 비교적 가벼운 갑옷 차림으로 말 위에 올라탄 남자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난 멋쟁이 기사입니다.’라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남자는 곤경에 빠진 여인 둘을 지나치는 일은 죄악이라는 듯 사명감에 차오른 얼굴을 하고서 우리 쪽으로 말을 몰았다.
이제 되었구나, 살았다.
무면허 마차에 타게 될까 봐 겁에 질려 있던 나는 기사님의 사명감을 자극할 수 있도록 한껏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사님….”
“예, 무엇이든 이 제누스에게 말씀하십시오.”
말에서 멋지게 뛰어내린 그가 삯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어찌하여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마부석에 앉아 그 고운 손에 거친 말고삐를 쥐고 계신 겁니까? 아무리 봐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마차꾼이 금품을 훔쳐 달아나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오가는 마차도 마차꾼도 구할 수가 없어서 그만.”
“저런. 그래서 직접 마차를 몰려 하셨던 겁니까? 이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가 마부석에 앉은 파베라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친절하기도 하셔라.”
순순히 제누스라는 기사가 건넨 손을 잡고서 파베라는 마부석에서 내렸다.
기사가 뒤따라 내리는 내게도 손을 내밀었다.
그 손 위로 손을 얹으려는데, 저 앞에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황족들이나 탈법한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최고급 사륜마차였다.
“예, 각하!”
멋쟁이 기사에겐 곤경에 빠진 여인도 중요하지만, 제 상관의 부름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그가 내민 손을 빠르게 회수해 마차 쪽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나는 어기적거리며 혼자 마부석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커튼이 쳐진 마차 창 너머로 기사와 주인 되는 자의 짤막한 대담이 오갔다.
사명감 충만해 보이는 기사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우리를 돕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조금 전과 다르게 이 상황이 반갑지 않았다.
사륜마차에 타고 있을 기사의 주인이 누구인지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목소리, 최고급 사륜마차, 각하라는 호칭.
“오랜만이네.”
옆에 선 파베라가 조용히 읊조렸다.
“마차 안에 있는 사람 누군지 알겠어?”
“호수에서 나랑 힘겨루기 했던 걔 아니니?”
맞아. 로건 후페이야.
분명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와 각하라는 호칭을 듣자마자 나는, 사륜마차에 대문짝만하게 조각된 흰 독수리를 어디서 본 것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5월의 숙녀 첫 행사 날, 내 이마에 닿았다 떨어진 경비병의 잘린 팔, 그 팔을 잘라낸 장검을 집어넣던 검집. 그 검집에 조각된 흰 독수리가 사륜마차의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
피범벅을 하고서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던 내게로 꽂히던 남자의 무감한 시선과 잘려나간 경비병의 팔이 바닥을 구르던 장면이 생생히 되살아나자, 목 뒤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떨지 말자, 떨지 마.
안타깝지만 나는 저 괴물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어버렸잖아. 내뺄 수 없다.
“후….”
자꾸 차오르려는 공포심을 긴 한숨으로 내리눌렀다.
황궁을 떠나있던 로건 후페이가 돌아왔다.
*
얘기를 마쳤는지, 제누스라는 기사가 다시 우리 쪽으로 돌아왔다.
“시종 중에 마차를 몰 수 있는 이가 있습니다. 각하께서 그를 가져다 쓰고 저더러는 아가씨들을 목적지까지 잘 호위하라 명하셨습니다. 목적지가 어디십니까.”
사륜마차 뒤에 매달려 있던 시종 한 명이 마차에서 내려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를 내려준 마차가 가던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했는데 당장 마주치는 일은 피한 건가, 나는 친절한 기사를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등 뒤로 사륜마차가 천천히 스쳐 지나가자 얕은 먼지바람이 일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저희는 수도에 르낭 주택가를 들려 황궁으로 갈 겁니다.”
“그러시군요.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이번엔 마차에서 잘 내리라는 의미가 아닌, 마차에 잘 올라타라는 의미로 기사가 내게 손을 내밀었지만, 이번에도 나는 기사의 손을 잡지 못 했다.
등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멈추어라.”
중후하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었고.
“목적지가 황궁이라면 같이 가자꾸나.”
그 말에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돌려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주위에 무뚝뚝한 사내놈들만 가득해 내 재미가 없던 차였는데, 목적지가 같다면 함께 가는 게 좋겠어.”
“….”
“대답이 느린 아이로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지.”
사륜마차의 앞좌석과 뒷좌석.
그곳엔 은발과 벽안을 나눠 가졌지만 다른 세월을 가진 두 남자가 느긋이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게 말을 건 사람은 뒷좌석에 앉은 나이가 지긋이 든 할아버지뻘의 남자였다.
“피기 란셀롯이라고 합니다.”
“하하 이거 촌에서 올라온 아이구나, 모르는 것투성이라 반응이 그리 느린가 보구만.”
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귀여운 어린아이를 본다는 투의 말투였다.
로건 후페이와 무슨 관계지, 아버지라기엔 너무 늙었는데, 할아버지인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 눈알만 굴리고 있는데 뒤에서 마차 문이 열리고 사람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멘데 공작가의 알레나 멘데입니다. 후페이 노공께서 도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 알레나 멘데라면 이번 대 치료제 중 한 명이구만.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아주 반가운 사람을 만났어. 하하하.”
은발의 노공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를 틈타, 곁으로 다가온 알레나가 내게 속삭였다.
“후페이 전대 공작이다. 무조건 웃고 박수 쳐.”
무조건 웃고 박수 쳐? 그렇게까지 비위를 맞춰야 하는 사람인 거야 저 할아버지가?
알레나의 조언에 일단 알겠다는 의미로 눈을 크게 깜빡인 후, 목소리가 들려온 손자 쪽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마차가 좁습니다.”
“이놈아, 너랑만 있다가 숨 막혀 죽는 것보다 비좁아 죽는 게 낫겠다! 하나 있는 손자놈이 이렇게 무뚝뚝하고 정이 없구나.”
“….”
후페이 전대 공작이 마치 마음 넓은 너희들이 이해해주렴, 하고 이해를 구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완만하게 호선을 긋고 올라가는 입가 주위로 자연스럽게 주름이 패었다.
이 사람, 많이 웃고 산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된 일을 많이 겪고 살아 찡그린 주름이 아니라 많이 웃어 패인 주름이었다.
서글서글하고 인자해 보이는 인상의 나이든 대귀족.
그러나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두 눈동자만은 나이가 들지 않았는지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손자의 그것과 같이 서슬 퍼렜다.
“어서들 들어와. 갈 길이 바빠.”
노공이 눈짓했고 대기하고 있던 시공이 마차 문을 열었다.
방금 기름칠한 듯 눈앞에서 부드럽게 열리는 마차 문이 마치 지옥문 같다고 생각하며, 이 일의 원흉이 된 도둑놈을 떠올렸다.
‘마차꾼 잡히면 가만 안 둔다.’
*
할아버지와 손자를 번갈아 보던 파베라가 제일 먼저 마차위로 올라섰다.
로건을 비딱한 시선으로 보던 그녀는 냉큼 할아버지 쪽 좌석에 자리를 잡았고, 그 뒤로 올라탄 알레나도 파베라 옆에 앉았다.
잠깐만 이렇게 되면….
사륜마차는 앞좌석 셋, 뒷좌석 셋의 총 6인용 마차였는데, 순방향의 뒷좌석 셋이 쪼르르 눈앞에서 팔려버린 터라 내가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로건 후페이의 바로 옆자리와 그 옆자리뿐이었다.
사람의 잘린 팔을 내게 날려버린 놈이랑 나란히 궁둥이를 붙이고 앉는 일은 절대 사양하고 싶었기에, 나는 슬그머니 마차에 올라 마차 문 바로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흐하하핫.”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공이 별안간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휑하니 비어있는 제 손자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젊은 놈이 이 할아버지보다 인기가 없어서야 원.”
“예. 좋으시겠습니다.”
대답하는 후페이 공작의 말과 얼굴은 딴판이었다.
“그리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으니 아무도 네놈 옆자리엔 안 앉으려는 게 아니냐.”
할아버지의 비웃음에도 로건은 별 반응이 없었고, 그저 이 상황이 불편한 여자 셋만이 어색한 웃음을 짓기 바쁜 상황이었다.
거기까지만 말했으면 그냥 좀 보기보다 주책맞은 할아버지구나, 라는 생각에서 멈췄을 텐데.
이 할아버지 끝까지 말 한마디를 더 보태고 만다.
“어린 영애들 있는데 표정 좀 풀면 어디가 덧 나냐 이놈아. 저 영애 앉은 꼴을 봐라. 아주 마차 벽에 뽀뽀할 기세구나.”
아 할아버지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 저한테 왜 그러세요 정말.
그러자 그때까지 내게 전혀 관심이 없어, 이쪽으론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던 로건 후페이가 물끄러미 고개를 돌렸다.
그가 제 옆에 비어있는 자리를 먼저 보고 나서 반대쪽으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은 내 얼굴을 노려보더니.
“내가 병균이라도 되나?”
허어어업.
마치 그 눈빛이 살인 예고장처럼 느껴진 터라, 말라가는 입술을 깨물면서 입을 열었다.
“제, 제가 나, 낯을 많이 가려서요….”
“….”
그 한마디를 힘겹게 내뱉고 입을 다물자, 다들 티 나게 그를 어려워하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더 이상의 말은 걸지 않았다.
이후의 대화를 주도해 나간 건 파베라였다.
후페이 노공과 파베라는 은근히 죽이 잘 맞아 보였다. 둘 다 노인이라 그런가.
아니지, 아니야.
잘 들어보면 후페이 노공의 옛날이야기를 파베라가 잘 받아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긴, 할아버지라 해도 90살도 안 먹었을 텐데 900살 파베라에 비하면.
후페이 전대 공작은 젊은 아가씨가 옛날이야기를 어찌 그리 잘 아냐며 그녀를 신기해했다.
크고 묵직한 고급마차라 그런가, 우리가 타고 온 삯마차에 비하면 승차감이 비교도 안 되게 편안했다.
나는 흘낏 왼편을 쳐다보았다.
옆옆자리에 앉은 로건 후페이가 제 할아버지와 파베라가 대화 나누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파베라가 취향에 맞는 이야기를 빵빵 터트려주는 덕분에 후페이 노공은 연신 웃음 띤 얼굴이었다.
제 조부가 웃을 때마다 그의 얼굴에도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이 좀 신기하고 이질적이어서 자꾸 남자의 옆모습을 훔쳐보게 되었다.
상상 속의 그는 날 죽인 살인마였고, 실제로 한 번 마주쳤을 때의 모습도 신체 훼손쯤은 쉽게 하는 놈이었기에.
제 혈육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짓는 모습이 참으로 생경했기 때문이었다.
‘나일도 원작과 달라졌으니.’
어쩌면 이 남자도 달라졌지 않았을까?
물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하는 건 기본 옵션이라 원작과 차이가 없는 듯한데, 어찌 되었건 내 목숨만 위협하지 않으면 되는 문제라서.
내게 남은 가장 큰 해결과제를 곱씹으며 그를 바라보는데….
“…?”
시선을 느낀 남자의 얼굴 방향이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