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82)화 (82/134)

82화

“공작 각하.”

다각 거리는 말 위에서 로건은 옆을 돌아보았다.

부기사단장이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뻔히 예상이 가는 권유를 하기 직전이었다.

“정말 안 가십니까?”

황자궁에서 일어났던 난데없는 마물의 등장.

그리고 동제국 변두리 마을에서 일어난 소규모 마물의 마을 습격 사건.

이 두 사건을 처리하고 로건은 황궁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돌아가는 길, 부유한 영지 한 곳에서 사건을 해결한 공작과 기사들을 위한 연회를 마련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사건이 있었던 마을이 속한 영지도 아니었고, 그저 빠르게 가는 길목에 있어 통과만 하면 되는 영지였다.

자신의 영지가 아니라 해도 제국민으로서 당연히 감사한 일이라나.

기사들은 연회에 참석해 아름다운 영애들을 만날 생각에 한가득 들뜬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로건은 별 관심이 없었다.

“네가 참석하면 된다. 난 바로 황궁으로 갈 거야.”

우두머리인 자신이 없어도 부기사단장 정도가 참여하면 영주의 면 정도는 세워줄 수 있을 것이다.

“각하, 황자 전하를 바로 뵈러 가실 생각이시겠죠?”

“….”

대꾸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말이었기에 로건은 따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일부러라도 영애들과 좀 즐기는 시간도 가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황자 전하와 각하께서 그런 사이가 아니냐는.”

“….”

로건의 싸늘한 눈빛에 부기사단장이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방금 자신의 발언이 선을 넘는 발언이었다는 것을 다행히 깨달은 모양이었다.

“황자 전하는.”

“….”

“황자 전하는 후에 동제국을 이끌어갈 분이시다.”

“….”

“그리고 내가 가장 아끼는 친우시기도 하지. 그런 황자 전하를 모시는 일이 방금 네가 입에 담은 그 불경한 말과 연관이 있나?”

부기사단장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실언했습니다.”

사죄의 말과 함께 그가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라도 영애들과 시간을?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내 시간을 써야 한단 말인가.

그에게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은 단 두 명뿐이었다.

자신을 길러주고 세상을 알게 해준 그의 친조부와 어렸을 때부터 형제처럼 자라 자신과 우정을 나눈 그의 친우 나일 리베르.

이 둘 외에는….

*

“귀한 분들이 앉으시기엔 집이 너무 누추해서….”

노인은 급하게 방석을 들고 나가 먼지를 털어냈다.

펑펑, 방석을 내려치는 소리를 들으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몇 명이 사는 집일까.

워낙 작은 집이었기에 시선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서서 개수대를 흘긋 쳐다보았다.

설거지 전의 그릇과 스푼이 담겨있었다.

수프 볼이 두 개, 스푼이 두 개.

개수대 옆 테이블에 앉아 수프를 먹는 두 사람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사는 사람은 노인과 중년 여성뿐인가.’

이곳 위치를 파베라에게 알려준 남자의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집 안 다른 곳을 둘러보아도 생활한 흔적은 두 사람 몫밖에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자자, 여기 앉으시지요.”

이미 조금씩 등이 굽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노인은, 제 몸을 신경 쓰지 않고 우리 앞에서 푹푹 허리를 숙여댔다.

그가 깔아준 방석 위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치료제라는 단어를 꺼냈을 때, 분명 노인의 얼굴 위로 피어오른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나이를 따져보면 치료제의 아버지가 아닐까 하는데.

그 반가움은 자기 딸에 대한 반가움이었을까, 우리가 자기 딸을 찾는 일에 대한 반가움이었을까.

“황제의 치료제였던 분의 아버지 되십니까?”

“예예, 제가 아비입니다.”

“반갑습니다, 어르신. 본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따님을 만나 뵙고 싶어서 여길 찾아온 겁니다.”

노인의 얼굴이 더 밝아졌다. 

“양이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양이요?”

딸을 만나고 싶다 말했거늘 양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내 되물음에 노인의 눈에 의구심이 서렸다.

“치료제의 피를 찾아서 오신 게 아닙니까?”

“….”

순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 노인에게서 튀어나와, 나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내 굳은 얼굴을 보는 노인의 얼굴에서 밝은 기색이 점점 사라졌다.

“그게 아니면 여길 왜.”

노인은 딸을 찾는다는 내 말에 아주 익숙하게, 그리고 아주 반갑게 피의 양을 물어왔다.

그렇다는 것은,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치료제의 피를 찾는 이들이 꽤 있었다는 소리였다.

“저는 그분의 피가 아닌 그분을 직접 만나기 위해 온 것입니다.”

“….”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앞에 두고 이쪽저쪽으로 요동치는 눈동자가 노인의 심경을 대변했다.

고민한다, 고민하고 있다.

치료제의 피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무슨 이유로 피를 구한단 말인가.

노인이 고민하는 사이, 나는 노인의 뒤로 보이는 집안 환경을 한 번 더 훑어보았다.

열악했다.

돈 때문이라고 결론 내는 것은 너무 단순한 판단일까.

“피….”

입을 열자 노인이 내게 다시 집중했다.

“직접 만나게 해주신다면 피를 구매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쳐 드릴 수 있습니다.”

치료제란 동제국 황가의 저주를 치료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 치료제의 피엔 어떤 신비로운 효능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미신과 마법이 넘치는 세계관이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사람들은 아픈 누군가를 위해 치료제의 피를 찾았고, 이 아비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제 딸의 피를 팔아온 게 아닐까.

거기까지가 내 추측이었다.

그렇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주겠다는 내 말에 노인은 예스라고 외칠 것이다.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안 됩니다.”

그러나 노인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내 딸은 황제를 치료했습니다. 그런 내 딸을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당신들이 얼마나 지체 높으신 분들인지 몰라도 내 딸은 못 만납니다.”

나는 당황해 외쳤다.

“피를 구매할 수 있다는 건, 그분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계신단 말 아닙니까? 저는 어르신의 딸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일단 제가 따님을 만나려는 이유부터 듣고 다시…!”

그러나 노인은 막무가내였다.

테이블에서 일어선 노인은 위협적으로 팔을 저으며 우리를 집 밖으로 몰아세웠다.

“피를 살 거면 사 가고, 아니면 얼씬도 말라고!”

“….”

- 쾅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파베라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덩굴로 휘감아서 좀 매달아 놓을까? 그럼 돈 안 줘도 만날 수 있어.”

아, 이런 제안은 고민 없이 거절해야 하거늘.

죽거나 어디 다치는 일 없이 겁만 좀 주면….

답을 미루고 고민하던 나는 그때까지도 밖에서 일하던 중년 여성과 눈이 맞았다.

“언니, 잠깐만.”

잠깐만 있어 봐.

아직 원만하게 해결할 방법이 남은 것 같거든?

흘깃흘깃 내 쪽으로 자꾸 시선을 주는 중년 여성에게 다가갔다.

노인이 치료제의 아버지라면 이 여자분은 치료제와 무슨 관계일까.

자매? 아니면 이 집의 며느리라든가.

“저… 안녕하세요.”

“….”

여전히 겁먹은 표정이네.

“아까 인사했지만.”

나는 머쓱하게 웃음 지었다.

“밖에서 안의 대화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현 황제의 치료제를 찾고 있습니다.”

“….”

주머니에서 작은 보석 한 개를 꺼내 여자의 손에 쥐여 주었다.

“꼭 전대 치료제분을 만나고 싶어요. 수도에 있는 제 거처를 알려드릴 테니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연락해주세요.”

보석을 쥐여 준 이유는 이들의 생활이 너무나 궁핍해 보였기 때문이다.

내게 연락하기 위해 수도까지 사람을 보내거나 직접 온다고 해도 돈이 들어갈 테니, 보석은 혹시 그 비용이 없어 연락하지 못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봐요.”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내 드레스를 잡았다.

그러고는 나와 집 안을 번갈아 보았다.

“만나야 할 이유가 뭔데요.”

목소리를 낮춰 물어오는 여자의 눈빛에는 아까 전까지는 찾아볼 수 없던 의지가 담겨있었다.

“왜냐하면.”

“….”

“세상에서 제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 황자의 치료제가 되었거든요.”

바로 저요.

그러나 알레나는 내 말을 오해했는지 놀란 눈이 되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런 오해는 나쁘지 않지.

나는 굳은 표정의 그녀를 향해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사람이 잘 해나갈 수 있도록 전 치료제를 만나 도움을 받고 싶어요.”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엇이 저 여자를 갈등하게 만드는 걸까.

그러나 다행히 갈등은 곧 끝났다.

결심한 듯 일어서는 여자의 눈동자에는, 미약하게만 보이던 의지가 뚜렷이 자리해 있었다.

날 따라 일어선다는 것은 이야기할 마음이 생겼다는 소리겠지.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조용히 따라와요.”

그리고 나는 여자에게서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아버지가 있는 집 쪽을 힐끗거리며 조심조심 나를 따라온 중년 여성은, 마차에 앉은 후로도 한참을 망설였다.

낡고 때가 묻은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여자의 입에서 천천히 말이 흘러나왔다.

“제 언니예요. 황제의 치료제.”

그 대사로 입을 뗀 여자는 마주 앉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황자의 치료제가 되었다는 분의 가족이신가요?”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죠.”

여자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럼 그분이 치료제가 되었을 때 기쁘셨겠군요. 알아요. 저도 언니가 치료제라고 했을 때 기뻤거든요.”

찢어질 듯 가난한 집이었다.

큰딸인 언니가 어느 날 몸에 희한한 문양이 나타났다며 그 무늬를 보여주었을 땐, 자매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걱정했다고 한다.

몸에 큰 병이 난 것은 아닌가, 나쁜 일이 생길 징조는 아닌가.

수만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하나같이 나쁜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곧 그 나쁜 생각은 환희로 바뀌었다.

황자의 치료제라니!

거액의 보상금이라니!

언니는 황자를 치료하고 큰 보상금과 함께 돌아온다며 떠났다고 했다.

동생아, 이제 더는 고생하지 않아도 돼. 언니가 네게 예쁜 새 드레스를 사줄게.

떠나는 언니는 동생의 손을 잡고 약속하듯 말했고, 동생도 그 약속을 믿었다.

언니의 그 말은 정말이었다.

황자의 기색이 날로 좋아진다는 말이 들렸고, 언니는 사람을 보내 비싼 것들을 보내왔다.

돈일 때도 있었고,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도 있었다.

아버지는 신이 났고, 동생도 그것들을 팔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행복했다.

시간은 흘렀고, 흘러가는 시간을 타고 이상한 소문들도 흘러 다녔다.

황자가 황자비보다 치료제를 더 사랑한다더라.

치료제가 희대의 악녀라 치료제 이상의 것들을 바라고 요구한다더라.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언니를 욕하는 말을 들을 때면, 동생은 배불리 먹는 일이 더는 즐겁지 않게 여겨졌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언니가 집에 왔다.

황자의 치료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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