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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81)화 (81/134)

81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젯밤 나일은 거의 실신에 가까운 비몽사몽 상태였고, 축 늘어진 장신의 남자를 나는 안간힘을 써 방안으로 옮겼다.

방안으로는 어떻게든 옮겼지만, 침대 위로 들어 올려 눕히는 건 다시 태어나 새로운 근육을 얻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발코니 입구 앞에 길게 누운 남자 위로 이불을 가져다 덮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하고 방을 나섰다.

그 때문에 잠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옆방에서 들려온 시종의 비명에 이른 아침부터 잠에서 한 번 깨야 했다.

바닥에서 잔 것이 그리도 소란을 떨만 한 일인가, 아 맞네 저분 황자셨지. 생각하고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두 번째로 잠에서 깼을 땐, 해가 중천에 떴을 때였다.

그때까지도 피로가 풀리지 않아 무시하고 자고 싶었는데, 나일이 너무나 애타는 목소리로 방문을 두드렸다.

속으로 욕을 하며 문을 열자, 그는 몹시도 갈급한 표정이었다.

나는 지금 잠이 급한데 너는 무엇이 급하니.

그는 치료제인 나와 닿을 때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나른함을 느껴왔고, 심할 때는 깊은 잠에 빠지는 것 같다며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정신이 맑을 때 그 말을 들었다면, 미리 말했어야지 왜 이제서야 말 한 것이냐고 자존감이 하락할 뻔했다며 쏘아붙였겠지만 졸려서 그러질 못했다.

대신 나는 다 이해하노라, 그 점에 대해 전혀 화가 나지 않았으니 그만 자게 방을 나가주었으면 좋겠다고 얼버무렸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아 맞다, 내 정체와 우리의 변해버린 관계는 당분간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라는 말을 졸린 와중에도 꼼꼼히 덧붙였다.

나일은 날 좋아한다지만 로건의 마음은 여전히 확인하지 못 했으니, 확인하기 전까지는 우리 사이를 공개하면 안 된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나일은 알겠다며, 그런데 변해버린 우리 관계를 무어라 정의해야 하냐며 능글맞게 굴었다.

나는 실실거리는 남자의 몸을 돌려세우고 등을 떠밀어 방 밖으로 쫓아냈다. 바보….

다시 꾸물거리며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요즘 좀 피곤하네….’

이럴 땐 잠이 보약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다.

*

- 똑똑

‘누구지.’

- 똑똑

대답이 없자, 문밖의 누군가가 다시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렸고,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구세요?”

“피기 란셀롯 영애신가요?”

“네.”

그러자 방문 아래로 흰 봉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탁받은 편지 문 아래로 전달해 드렸습니다.”

나는 허리를 굽혀 편지를 집어 들었다.

“보낸 이가 누군가요.”

“저는 전달만 요청받았습니다. 그럼.”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에서 멀어져 갔다.

‘무슨 편지길래.’

나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흰 편지봉투를 개봉했다.

편지 발송인의 정체는 파베라였다.

- 네가 궁금해하던 것, 찾았어. 황실 언덕 내려와서 마차 보관소 알지? 거기서 기다릴게. -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고 좌우 방을 살폈다.

알레나는 방에 있었고, 나일은 5월의 여왕 축제를 위한 사전 점검을 나갔다는 게 시종장의 답이었다.

늘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는 시종장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레나를 데리고서 발을 돌렸다.

황궁의 언덕길을 내려가며 그녀의 옆모습을 살피자, 발갛게 부어올랐던 왼쪽 볼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레나야, 우리 전 치료제의 행방을 알고 싶어 했잖아.”

“응.”

“알 수 있을 것 같아.”

마차 보관소까지 내려와 주위를 두리번대자, 처음 보는 삯마차 한 대가 다가와 섰다.

삯마차 중에 이렇게 크고 비싸 보이는 마차가 있던가?

마차꾼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르니, 안에는 붉은 드레스로 잔뜩 멋을 낸 파베라가 앉아 있었다.

“우리 아가 좋은 아침. 멘데 영애도 있었네요? 근데 얼굴이 별로다?”

파베라의 거침없는 인사에 알레나가 무안한 얼굴로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파베라에게서 또 솔직한 발언이 나올까 싶어, 급하게 말을 건넸다.

“언니,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아냈어?”

며칠 만에 소식을 가져올 줄 예상하지 못 했는데.

놀란 표정으로 묻자, 파베라는 웃으며 딴소리를 했다.

“오늘 언니 오랜만에 멋 냈는데 칭찬 한마디 없는 거야?”

“언니 멋진 거 어디 하루 이틀이야?”

머리 높여 손뼉을 쳐주자 그제야 파베라는 흡족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알아냈냐면.”

파베라는 내게 부탁받은 직후, 곧장 수도에서 가장 큰 술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술집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술집 주인이 주문을 받으러 다가오자, 파베라는 일부러 보라는 듯 나무 테이블 위로 보석을 좌르르 꺼내 보였다.

시끌벅적한 술집에서도 보석 굴러가는 소리는 잘 들렸나 보다.

그곳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파베라의 테이블로 향했고,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좌중은 일동 숨죽였다.

- 주인장, 혹시 황제를 치료했던 치료제 말이야. 만나고 싶은데 어디다 의뢰를 하면 좋을지 알아? 사례금은 두둑이 줄 수 있는데 방법을 모르겠네.

테이블 위 보석을 보며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고, 파베라는 말했다.

그 후 파베라는 그곳에서 여유롭게 점심을 먹었다.

점심 후엔 가볍게 맥주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파베라가 술집을 나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기가 치료제가 사는 곳을 안다며, 으슥한 골목으로 유인해 여인의 재물을 빼앗으려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파베라는 그분들에게 사지 중 한 곳 이상의 골절, 이라는 합당한 보상을 해주었다 말했다.

파베라가 슬슬 다른 곳에 문의해야 하나, 라고 생각하던 어제 저녁,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가 찾아왔다.

남자는 치료제는 모르겠지만, 치료제의 가족이 사는 곳은 안다며. 가족의 위치만 제공해도 사례금을 받을 수 있냐 물었고.

파베라는 그곳에 다녀온 후, 진짜 가족이 맞다면 보상하겠다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탄 삯마차의 마차꾼의 손에는, 파베라가 받아온 약도가 들려 있었다.

“황자 전하가 잘 치료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만날 필요성이 현저히 줄긴 했지만.”

전 치료제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무지 진전이 없었던 치료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였으니.

“그래도 이왕 찾은 거, 만나서 나쁠 건 전혀 없잖아. 가자.”

내 말에 알레나와 파베라가 동의의 눈빛을 보냈다.

*

한참을 달린 마차가 수도를 막 벗어났다.

수도를 벗어나자 창밖의 풍경은 빠르게 변했다.

화려한 번화가와 상가, 큰 건물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작은 농가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보상금으로 땅을 산 건가.’

여기서 더 들어가면 작은 농가가 아닌 큰 땅을 일구는 부농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곳은 소규모의 농가밖에 없는, 수도와 대지주 사이의 애매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가야겠군, 이라고 생각을 마쳤을 때 마차가 멈춰섰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꾼이 문을 열며 소리쳤다.

이곳은 가난한 지역이었다.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는데 왜 가족의 집이 이런 곳에 있다는 거지.

마차에서 내리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 맞아요?”

“예. 맞습니다.”

마차꾼이 경쾌하게 대답했다.

“어디 보자… 바로 저 집입니다. 녹색 지붕 보이시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이 아니라 내가 발로 차도 쓰러질 것처럼 생긴 집이 서 있었다.

“그럼 나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네.”

치료제가 아닌 치료제 가족의 집이라 했지.

치료제였던 분이랑 가족들이랑 사이가 나빴나 보네.

보상금의 한 푼도 가족들에겐 쓰지 않은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다가가니 집 앞에 작은 마당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엔 중년의 여성이 쪼그려 앉은 자세로 약초처럼 보이는 풀들을 말리고 있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

여자의 태도는 경계하는 모습이 확연했다.

여자의 시선이 나를 빠르게 훑어 내린 후, 내 뒤에서 양산을 들고 도도하게 서 있는 파베라와 알레나에게 닿았다.

둘 다 장신에 빡세게 생긴 인간들이라 첫 만남에 상대방이 겁을 집어먹을 확률이 높았다.

그녀가 몸을 살짝 움츠렸다.

혼자 올 걸 그랬나.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왔는데요. 그냥 몇 가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거니, 너무 긴장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여자는 긴장하지 말라는 말에 오히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래, 마음 편히 먹으라고 한다고 어디 마음이 편히 먹히던가.

나라도 웃자.

나는 좋은 인상을 신경 쓰며 다시 말을 걸려 했다.

“얘, 대화를 그렇게 시작하면 안 되지. 사례금이 있다는 말부터 꺼내야 거기 여자분도 대화할 기분이 들지 않겠어?”

“아 언니….”

돈부터 꺼내놓고 시작하려는 파베라를 뒤로 밀며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황제의 치료제로 황궁에 계셨던 분과 가족….”

나는 말을 다 끝마치지 못했다.

황제라는 말을 꺼냈을 때, 치료제라는 말을 했을 때, 내 말을 듣는 상대방의 표정이 시시각각 험악해졌기 때문이었다.

험악이 아닌가?

여자는 겁먹은 듯한 두려운 눈빛으로 우리에게서 한 걸음 발을 물렸다.

그때, 문이 열리며 집 안쪽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사람보다 먼저 나온 것은 코를 찌르는 술 냄새였다.

저게 사람이여 술이여.

인두겁을 쓴 술병인가?

“누구슈.”

아 말을 하는 것 보니 술병이 아니라 사람이 맞는가 보다.

이번엔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었다.

그가 한 손에 든 술병을 흔들면서 우리를 훑어보았다.

“안녕하세요. 황제의 치료제였던 분의 가족들이 사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는데요.”

이 반응은 뭘까.

중년의 여성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치료제 이야기를 듣자마자 노인의 입꼬리가 대놓고 올라갔다.

숨기려 했지만 숨겨지지 않는 듯했다.

그가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내 딸을 찾아오셨구만?”

치료제의 아버지였다.

그가 살가운 몸짓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귀한 분들께서 오신 것 같은데,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노인이 손을 흔들었다.

나와 파베라, 알레나는 눈빛을 교환 후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우리의 모습을 좇는 중년 여성의 눈빛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소득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우리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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