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80)화 (80/134)

80화

짝이라니?

쪽이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가까이서 들려온 찰진 마찰음에 슬며시 눈을 뜨자.

“어…?”

눈앞에 보이는 건, 적나라한 손자국이 새겨진 나일의 한쪽 볼이었다.

“왜 지금… 왜 자기 볼을….”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어버버하는데, 그가 몹시 괴로운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실은 졸려서 잠들 것 같습니다.”

“예?”

그럴 리가 없어. 이건 꿈이야.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니 귀라도 후벼판 후에 다시 말해달라 요청하려는데, 그가 약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아직 카펫 위에 앉아 있는데 졸리다며 혼자 일어나? 하던 걸 이렇게 끊어먹고?

분노의 눈길로 올려보자 나일은 잔뜩 죄책감 서린 표정을 지었다.

“아… 이게.”

“….”

“일단 찬 바람을 좀 쐐야겠어요. 설명할게요. 같이 발코니로 나가죠.”

목을 뒤로 젖히며 기지개를 켠 그가 여전히 앉아 있는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툭 불거져 나온 입을 집어넣으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

바로 옆방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나의 방 구조는 아주 달랐다.

커튼을 한쪽으로 밀어내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발코니의 입구가 드러났다.

그가 나를 발코니에 마련된 철제의자로 이끌었다.

“나만 앉아요?”

랜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날 따라 옆자리에 앉을 거라 예상했는데 나일은 난간에 기대 찬 바람을 맞았다.

“지금 옆에 앉으면 응징당할 게 뻔한데 앉겠어요?”

아, 들켰다.

하여튼 눈치는 빨라가지고.

테이블 아래서 몰래 손을 풀던 나는 머쓱해져 손을 허벅지 위로 가지런히 했다.

나일은 여전히 망할 잠에서 깨기가 힘든지, 연신 목을 젖혀댔다.

잔뜩 눈에 힘을 주고 째려보던 내가 그와 눈이 마주친 건, 그가 왼쪽으로 고개를 꺾었을 때였다.

고개를 가로로 꺾은 채, 날 바라보며 남자는 마치 네 속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어찌나 어설픈지 졸음이 쏟아지는 걸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

아무렇지 않은 표정, 그래서 뭐 어쩌라는 표정으로 일관하려 했지만.

좋아하는 남자에게서 너 키스 못 해서 잠이 다 오더라, 라는 말을 듣는데 그게 되겠냐.

난간에 팔을 걸친 남자가 당황으로 일그러지는 내 얼굴을 열심히 뜯어보길래, 나는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자기는 뭐 얼마나 잘 했다고….”

“다 들려요.”

“들으라고 하는 말이니까 들리겠죠.”

킥킥거리며 나일은 내 앞으로 와 한쪽 무릎을 굽혔다.

“어디에요?”

“뭐가요.”

올려다보는 시선을 맞받아치며 묻자 그가 대답했다.

“당신 몸에서 치료제의 문양이 있는 곳.”

내가 치료제라는 것까지 알아냈단 말이야?

침을 삼키며 한 박자 대답을 미루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시간을 끄는데, 정작 날 바라보는 나일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다 알고서 묻는 것 같은데 뭘 고민하고 있나.

“왼쪽 발목이에요.”

“보고 싶어요. 봐도 돼요?”

마침 딱 보기 좋게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였다.

좀 전까지 수면제 취급을 당해 심기가 좀 까칠했기에 말이 비딱하게 나갔다.

“황자 전하시니 하명하면 되는 일 아닌가요.”

“당신이랑 있을 때까지 황자일 필요는 없잖아.”

싱긋 웃으며 답한 그가 내 긴 치맛자락 끄트머리를 손에 쥐었다.

“싫으면 말해요. 멈출 테니까.”

“….”

내 대답을 기다리는 시선을 피해 다른 곳을 쳐다보자,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치맛자락을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무릎까지 올라온 남자의 손길이 무릎 바로 아래까지 신겨진 내 반 스타킹을 살살 잡아당겼다.

왼 다리를 감싸고 있던 스타킹이 힘없이 돌돌 말려 벗겨져 발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

맨발을 잡아 쥐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살짝 움찔거렸다.

나일은 발을 쥐고서 발목에 난 문양을 한참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똑같이 생겼죠?”

“네. 정말 그렇네요.”

치료제니까 같은 문양이지.

그 당연한 사실이 뭐가 그리 신기한지 그는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걸기도 했다.

발목을 빤히 들여다보는 그를 보고 있자니 쑥스러움에 목 위로 붉은 열이 올라왔다.

얼굴이 터져나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손부채질로 달아오른 볼을 식혔다.

‘엄청 오래 보네….’

고개 숙인 그의 이마를 보다가, 왠지 쳐다보는 내 시선이 스스로 민망해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내방 열린 창으로 흰 커튼이 밖으로 하늘거리고 있었다.

‘자고 있겠지?’

시간이 꽤 지났으니 제 방으로 건너 가 자고 있겠지.

맞은 뺨이 오늘 바른 연고만으로 괜찮으려나….

무심결에 알레나를 떠올리던 나는 복숭아뼈에 닿는 생소한 느낌에 고개를 내렸다.

“…!”

눈을 감은 채 복숭아뼈에 그가 입 맞추고 있었다.

“아… 저기….”

감은 눈 위로, 부는 바람에 남자의 까만 앞머리가 흔들렸다.

복숭아뼈를 시작으로 발목 위, 종아리를 타고 남자의 입맞춤이 천천히 올라왔다.

입술이 들러붙었던 자리로 밤바람이 달아오른 살을 식히고 지나갔다. 

무릎을 마지막으로 입술을 뗀 그가 눈을 떴다.

잔뜩 풀어진 검은 눈이 보였다.

날 바라보는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그가 무엇을 참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어, 어떻게 반응을 해야….

“어설프다는 말은 농담이었어요.”

“….”

“세상에서 당신이랑 닿는 일보다 기분 좋은 일은 없을걸.”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그렇다고 말 해줘야지.

아니, 말로만 하는 건 조금 촌스러운가…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아 역시 닿으면 또….”

아래로 기우는가 싶던 남자의 얼굴이 무릎 위로 철퍼덕 떨어졌다.

“…?”

“….”

“저기요~”

이렇게 또 잔다고? 

우리에게 2세는 없는 건가?

*

알렉스 멘데는 멘데 왕국의 둘째 왕자였으나 왕녀로 자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드레스를 입고 컸다.

“어머니, 저도 검이 갖고 싶어요.”

“레나야. 이건 가문을 위한 일이란다.”

“제가 드레스를 입는 일이요?”

알렉스가 6살이 되던 해, 형인 데이빗이 크게 아팠다.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도 데이빗의 건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중한 첫째 아들이었다.

멘데 왕은 용하다는 점쟁이를 불러들였다.

“첫째의 기운을 둘째가 다 가져갔어. 첫째의 기운이 계속 둘째에게 흘러나가잖아. 이 왕국을 유지하려면 첫째가 살아야 해.”

점쟁이의 말대로 멘데 왕은 그의 둘째 아들, 알렉스를 여장시켜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첫째 아이와 왕국을 위해서였다.

“저 드레스 입기 싫어요 어머니. 저도 형처럼….”

“미안해, 우리 아가. 엄마가 미안해.”

6살 난 작은 아이는 제게 입혀진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발등까지 내려오는 긴 드레스 자락 덕분에 키가 작은 알렉스는 자주 치맛자락을 밟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알렉스는 울지 않았다.

그저 까진 콧등과 볼을 손등으로 쓱 문질러 닦아낼 뿐이었다.

넘어지는 바람에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는데, 뒤편 연무장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형인 데이빗이 검술 선생과 대련 중 엉덩방아를 찧고 엉엉 울고 있었다.

‘멍청이.’

그깟 넘어지는 일이 뭐가 아프다고.

내가 검을 쥐면 더 잘할 수 있는데.

알렉스는 형의 손에 들린 연습용 목검을 주시했다.

“와, 알레나 왕녀님은 정말이지 이 재능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렉스가 형의 옷을 훔쳐 입고 나와, 형의 검을 들고 형의 검술 선생과 칼을 부딪친 날이었다.

검술 선생의 눈빛에 놀라움이 담겼다.

그의 눈빛에 깃든 놀라움이 알렉스에게도 보였다.

‘이거 봐.’

엄마, 아빠.

저 이렇게나 잘할 수 있는 걸요.

형보다 제가 더 잘해요, 그러니까.

“알레나!”

검술 선생에게 들었던 칭찬이 제 부모의 입에서도 나올 거라 기대하며 알렉스는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낸 부모에게로 달려갔다.

안겨야지. 칭찬의 말을 그득히 들으면서 따듯한 품에 폭.

“이놈이!”

그러나 돌아온 것은 머리가 왕왕 울리도록 강하게 내려치는 손찌검이었다.

“아버….”

훅 꺾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아이는 저를 때린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나를 이리도 모질게 폭행한 자가 어찌하여 내 아비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가.

나를 따듯한 품에 품어줄 아비는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아이는 남자를 앞에 두고 제 아버지를 찾아 두리번댔지만, 방금까지 연무장에 있던 제 아비의 모습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머니께 가자.

어머니께 가서 내 아버지의 행방을 물어야겠다.

“어머니.”

알렉스는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멘데 왕비가 질투심에 불타는 첫째 왕자를 달래고 있었다.

“데이빗 괜찮단다. 넌 날로 더 발전할 거야.”

“어머니….”

알렉스가 부르는 소리에 멘데 왕비가 둘째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알레나. 그 옷은 네 옷이 아니잖니. 가서 네 옷으로 갈아입고 오렴.”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는걸요.

저는 알렉스지 알레나가 아니잖아요.

제가 형보다 더 잘하는데 왜, 다쳐서 아픈 건 전데 왜.

왜 저보다 형을 더 가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세요 어머니.

“알레나.”

알렉스가 대답하지 않고 서 있자, 멘데 왕비가 아이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갈아입고 올게요.”

마지못해 대답하자, 그제야 왕비가 첫째 왕자를 감싸고 있던 한 팔을 풀어 알렉스에게로 뻗었다.

“역시 사랑스러운 우리 알레나는 이 어미의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이리 오렴.”

“….”

이 따듯한 품에 안길 수 있는 건 알렉스가 아닌 알레나 뿐이구나.

알렉스는 어미의 품에 안겨 우선순위를 생각했다.

소중한 건 다 가질 수 없는 거구나.

우선순위를 정할 수밖에 없어.

나는 이 품속이 제일 소중하니까, 다른 건.

다른 건 어쩔 수 없어.

그때까지도 손에 쥐고 있던 목검을, 알렉스는 땅바닥으로 떨어트렸다.

*

그러나 본래의 성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은 그가 커가면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알렉스를 괴롭혔다.

귀족가 아이들은 그를 다 알레나로 알았지만 왕국민들은 달랐다.

알렉스는 몰래 남성의 옷을 입고 나가 평민 친구들과 어울렸다.

숨이 트였다.

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멘데 왕국은 동제국에게 잡아먹혔다.

남성 복장을 한 알렉스가 급히 왕성으로 돌아왔을 땐, 기사들이 이미 왕성을 점령한 후였다.

동제국의 젊은 황제가 이능력으로 일으킨 불길은 왕국을 집어삼켰다.

“네가! 네가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야!”

6살 아이였을 때보단 훨씬 컸지만, 그때도 어렸던 그는 왕국이 불탔다는 사실보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뺨을 맞았다는 사실이 훨씬 더 슬펐다.

“어머니 죄송해요. 이제 반항하지 않을게요. 여자로 살게요.”

내겐 세워놓은 우선순위가 있었는데.

그걸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제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남겨진 것들마저 잃을 생각은 없으니까.

미움받는 건 싫으니까.

알렉스는 어미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울었다.

그러나 멘데 왕비는 등을 돌려, 알렉스를 늘 폭행하던 남자의 품으로 달려갔다. 

*

바람이 두 사람이 내는 소리를 성실하게 실어 날랐다.

열린 창문 아래서 알렉스는 숨을 죽였다.

너도 그 남자를 선택하는 거야?

너도 빼앗겨야 한다고?

미움받기 싫어서, 더는 빼앗기기 싫어서 이렇게 살아왔는데.

그렇다면 그냥 미움 받을래.

그때까지도 가라앉지 않은 볼이 더욱 욱신거린다고 알렉스는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