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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79)화 (79/134)

79화

입술이 멋대로 술술 진실을 토해냈다.

“미안해요. 나….”

“….”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었는데… 숨겼어요. 생사를 알고 싶어 한다는 걸 안 후에도… 숨기기 급급했어요.”

눈가로 손을 올리자, 한 뼘 더 다가온 그가 나를 품에 안았다.

“아뇨. 빨리 알아보지 못해 내가 더 미안해요. 내가 바로 알아봤으면 되는 일인데.”

울지 않기 위해 시큰한 코를 마구 찡긋거리며 나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안 걸까, 도대체 언제부터 거짓말쟁이가 늘어놓는 거짓말을 다 알아채고 있던 걸까.

그러면서도 속이는 날 얼마나 뻔뻔하다고 생각했을까.

“미안해요. 어떤 마음인지 다 알면서 숨겨서 미안해요. 그게… 왜 그랬냐면….”

남자가 납득할 만한 변명을 지어내려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았다.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솔직히 말해준 걸로도 충분해요. 괜찮아요.”

내 등을 살살 도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그냥 이대로 있어요 우리.”

*

열어놓은 창을 통해 늦봄의 서늘한 밤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말간 밤바람이 상기된 양 볼을 식히자,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그의 어깨에 묻었던 얼굴을 뒤로 빼내자, 마치 중대한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진중한 얼굴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손수건에 냅다 코를 팽 풀었다.

“손수건이 있네.”

“네?”

“아닙니다.”

분위기가 어색했다.

조금 전의 실토로 우리의 사이는 황자 전하와 귀족 영애에서 몸을 의탁한 병사와 귀족 영애 그 어디쯤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가 내게 다시 존대를 사용하는 거로 보아 그리 해석해도 되겠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요?”

“그쪽이 그쪽인지?”

“네, 내가 나인 거.”

나일은 싱거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내가 그쪽을 정말 몰라 볼 거라고 생각 했다는 게 너무 황당하니까 그건 더 묻지 말아요.”

뭐에서 티가 나버린 건지 궁금했는데, 알려주기 싫다 하니 뭐….

괜히 뻘쭘해서 벽에 등이나 더 밀착시켰다.

그와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서로에게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한동안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상자 더미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제국은… 어때요? 처음 아닌가.”

“처음이죠.”

“….”

“구경한 곳이 많지 않아서… 수도는 아직 잘 모르겠고, 황궁은 정말 예뻐요.”

“그렇군요.”

우리는 또 말을 이어가는데 실패해서 방의 더운 공기만 들이마셨다.

그가 다시 말을 걸었다.

“동제국 요리는 어때요.”

“아… 요리! 동제국의 요리는… 정말 맛이… 없어요. 미안해요. 나 너무 솔직해요? 근데 음식 맛없는 건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던데 보니까.”

“미안할 거 없어요.”

“….”

말을 뱉고 나서야, 잘 하면 로맨틱한 분위기로 갈 수 있는 길을 내가 자꾸 팩트폭행으로 때려막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나는 조용히 깔고 앉은 카펫을 쥐어뜯었다.

“동감해요. 셀린가 저택에서 당신이 가져다주던 음식을 먹으면서 ‘이런 요리를 계속 먹을 수 있다면 동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 망할 침대는 비좁아서 다리가 저릴 지경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듣는 남자의 하소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갔다.

그가 몸을 웅크린 채 자던 하녀의 작은 침대가 떠올라, 나는 작게 킬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침대 이불도 진짜 싸구려였는데. 당신이 떠나고 나서야 알았거든요. 이불이 정말 얇고 별로라는 걸. 미리 알았으면 바꿔줬을 텐데.”

“이불도 별로였지만 혼자 놀라고 체스를 넣어준 게 가장 최악이었어요.”

“에?”

체스가 왜?

놀라 되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날의 일들이 이제는 2년도 더 지났던가.

그럼에도 하나하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라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벌써 2년이나 지난 과거가 되어버렸네요. 시간 참 빠르다.”

“빠르다구요?”

왜 반문하지?

남자의 반문에 그 의미를 몰라 눈썹을 들어올렸다.

나일의 검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피비.”

“….”

“하나도 빠르지 않았어요. 내내 당신을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내겐….”

그의 눈동자가 빈틈없이 내 시선을 쫓아 움직였다.

“내겐 현재예요. 나는 당신이 내 과거로만 남아있길 바라지 않아요.”

“….”

“내 미래에도 당신이 있길 원해요.”

“….”

“당신을 원하니까.”

난데없이 내게 고백을 갈기고서 나일은 달아오른 제 얼굴을 고개를 숙여 숨기려 했다.

그가 고개를 떨구는 타이밍에 맞춰 나도 얼굴을 숙였다.

아마 내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을 테니까.

우리는 둘 다 고개를 숙이고서 카펫에 그려진 무늬를 감상했다.

‘나일이 날 정말 좋아한다고? 진심이라고?’

두근대는 박동 소리를 느끼며 순간 로건을 떠올렸다.

나일 리베르의 짝은 로건 후페이잖아.

그런데 왜 지금 이 남자가 로건이 아닌 내게 고백을 하며 얼굴을 붉히는 거지?

사실 어쩌면 그가 정말 좋아하게 되어버린 대상은 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스치듯 하긴 했지만.

‘정말이라고?’

말라가는 입술을 축이며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카펫의 섬세한 꽃무늬를 벌게진 얼굴로 감상하고 있었다.

‘진심?’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떨궜던 고개를 다시 들어올렸다.

“자 질문 받을게요.”

“…무슨 질문이요?”

나일은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조금은 심통 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얼마나 둔감한 사람인지 빌론에서 절절히 깨달았으니까요. 지금도 분명 반은 알아듣고 반은 또 못 알아들었겠죠. 상상이 안 되지만 아예 딴소리로 알아들었거나.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네가 좋아서 돌아버릴 것 같고, 그래서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는데. 네가 미치게 둔한 사람이라 혹시 아직까지도 내 말을 이해 못 하고 있다면, 이해가 될 때까지 나는 네가 좋다고 설명해줄 생각이니까 질문을 하라는 말입니다.”

“….”

치사하게 마무리는 존대로 끝내는 거 뭔데.

여기서 이해를 못 했다고 손들면 바보 인증이잖아.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린 그의 폭력적인 고백에,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얼굴에 닿은 손바닥이 정말 시원하게 느껴졌다.

“뻔한 질문을 해도 화내지 않을게요. 물어봐요.”

그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방금 제대로, 아니 사실은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여기서 질문하면 바보인 걸 알면서도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럼 하나만 할게요.”

“해요.”

“후페이 공작님은요?”

내 입에서 나온 친우의 이름에, 나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후페이요?”

“네, 후페이 공작님.”

“…?”

“실례되는 질문인지 모르겠는데, 공작님과 연인 사이라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하하….”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다 그런 황당한… 아 뭐, 그래요. 그럴 수 있지. 친구라고는 그 자식뿐이니.”

나는 시선을 떼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들었다면, 남 말하길 즐기는 멍청이들이 퍼트린 소문일 뿐이니 무시해요.”

“….”

“또 말하지만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이해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완전히 이해했어요. 당신은 나를 좋아해요.”

“그래요. 나는 당….”

무심코 내 말을 따라하려던 나일이 순간 말을 멈췄다.

방금까지도 좋아한다는 말을 몇 번 씩이나 반복해 놓고서, 그는 민망한지 상기된 얼굴로 내게서 눈길을 돌렸다.

‘진짜야.’

그가 완연한 진심을 내보였다.

붉어진 우리의 볼 만큼이나 남자가 전해온 진심은 따스했다.

그리고 나 역시, 외면하려 했지만 지금을 원해왔다는 사실을 비소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맞아요. 당신은 나를 좋아해요.”

“….”

“그리고 나도 당신을 좋아하죠.”

상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나일의 두 눈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순식간에 남자의 두 눈에 들어찬 그것은 곧 뭉쳐져 액체가 되어 흘러내렸다.

나는 손을 뻗어 나일의 셔츠 맨 위 단추를 잡아 뜯듯 풀어냈다.

볼과 입술을 지나쳐, 턱과 목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려 쇄골에 도달한 눈물을 입술로 찍어 눌렀다.

예상 못 했을 내 행동에 그가 옅게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이 예뻐서 나는 도드라진 뼈를 살짝 깨물었다.

카펫 위에 널브러져 있던 남자의 큰 손이 눈에 들어왔다.

마디가 굵은 긴 손가락이 느릿하게 안으로 오므라들었다.

‘나도 이 사람이 좋아.’

여기서도 인정하지 않고 발을 뺀다면 허기에 굶어 죽을지도 모르지.

남자의 턱에서 목까지.

나는 도장을 찍듯 입을 맞추며 위로 올라갔다.

이제까지 당신의 진심을 알면서도 내내 솔직하지 못 했던 나를 용서하라며.

사죄하듯 조심스럽게, 용서를 빌 듯 신중하게 입을 맞추며 볼에서 눈으로 입술을 옮겼다.

작아진 상태로 입속을 굴러다니던 레몬 사탕의 신맛과 눈물의 짠맛이 뒤섞여 혀에 감겼다.

마침내, 감긴 그의 눈꺼풀 위에 마지막으로 입 맞췄을 때. 

나비의 날갯짓처럼 그의 얇은 눈꺼풀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예쁘게 우는 남자를 또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가 천천히 제 가슴께로 손을 들어 올렸다.

쇄골에 난 잇자국을 손가락으로 훑어 확인하는 그의 얼굴은 열기에 차 있었다.

“우는 게 예뻐요.”

“….”

“고백하자면 저번에 울 때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어요.”

“하.”

어이없다는 투의 가벼운 실소를 터트린 그의 긴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예고 없이 쑥 들어온 남자의 손이 뒷목에 감겼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번엔 내가 몸을 떨었다.

“….”

내가 그에게 했던 것처럼, 눈물에 젖어 축축한 입술이 내 목덜미를 누볐다.

남자의 입술이 목덜미에 떨어졌다 다시 붙을 때마다, 그의 머리카락이 내 귓속을 들락날락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귀에 난 솜털과 얽힐 때마다 나는 진정할 수가 없어, 입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살을 가볍게 무는 고통이 목선을 타고 올라왔다.

귀 아래서 몰아친 더운 숨과 함께 끝날 줄 알았던 그의 행동이 귓불로 옮겨 붙었다.

나는 귀에 생겨난 그의 잇자국을 상상했다.

“왜 내 행동을 따라 하는 거죠.”

간지러움을 닮아 있는 그 자극을 참지 못하고 약간은 투정하듯 말하자, 그때서야 나일은 귀에서 입을 뗐다. 

“내가 먼저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따라는 무슨, 복숩니다.”

복수였구나.

그렇다면 앞으로도 많이 많이 잘못할 테니 내일도 모레도 해주세요.

코끝이 서로 맞닿았을 때 나일이 제 고개를 비틀었다.

기우는 남자의 턱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

저기요~

그냥 들어오시면 되는데요. 문 열어놨어요.

분명 코앞까지 배송된 걸 보았는데 감감무소식이길래, 눈을 떠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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