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아직 덜 마른 젖은 머리에 편한 차림을 한 남자가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다.
머리가 젖어서인지 검은 머리가 평소보다 더 새까맣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욕조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이 코끝에 달라붙어 왔다.
“….”
목적이 있어서 불렀을 것 아니니.
문 열어달라고 청한 놈에게서 들려오는 말이 없길래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밤이 늦었는데 무슨 일로.”
그가 닿아있던 시선을 사선으로 떨어트렸다.
“그렇지. 밤이 늦었지.”
“네. 그렇죠.”
“….”
그는 또 말 없이, 내 등 뒤로 살짝 열린 문 너머를 살폈다.
움직이는 까만 눈동자에서 도로록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알레나가 보일만한 각도는 아니었다.
“벌써 방 정리를 끝낸 건가?”
“정리할 게 많지 않아서요.”
“그렇군.”
방 정리 끝낸 걸 확인하러 오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방 정리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
“아….”
그렇군요?
그럼 하녀를 불러야지 왜 제 방문을, 이라는 눈빛으로 올려보자 그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리를 좀 도와줬으면 싶어.”
남자의 뒤로 보이는 복도에 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밤이었다. 이 밤에?
내 시선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그가 말을 덧붙였다.
“깔끔한 성격이라 정리가 덜 된 방에선 잠이 안 올 것 같아.”
“….”
이 늦은 시간에, 다시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라.
고민이 필요한 문제인가? 아니 내겐 고민이 필요 없는 문제였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남자의 핑계가 사실 반갑기도 했다.
내 방 안에 남겨진 이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차피 레나도 이제 곧 제 방으로 돌아갈 참이 아니었나.
내가 황자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는 걸 알면 알아서 눈치껏 옆방으로 건너가겠지.
내 뒤로 살짝 열려있던 문을 손을 뻗어 잡아 밀었다.
“좋아요. 도와드릴게요.”
*
문이 닫힌 내 방 입구에 서서, 남자가 제 방문 열기를 기다렸다.
복도는 조용했다.
그의 방 앞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할 경비병의 모습이 왜 보이지 않을까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남자의 방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생각을 하얗게 날려먹었다.
그전 생각이 날아가고 비어버린 자리에 새로운 생각이 날아들었다.
남자와 나는 이미 그의 방 침대 위에서 입을 맞춘 적이 있지 않나.
그러니 지금 저 방으로 함께 들어간다는 의미는 우리가 다시 입 맞추게 된다는 뜻일까.
세상에 그렇구나, 나 지금 키스를 앞둔 사람이구나.
아니 그런데 내가 양치를 했던가.
안 했어 젠장. 방 정리하고 레나랑 수다 떠느라 아직 못 했지, 어떡해.
“저기 잠시만요.”
다급하게 외친 후, 쪼르르 방안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았다.
심심할 때 먹던 레몬 캔디가 아직 남았을 텐데.
하녀들이 캔디 통을 어디에 정리해 둔지 몰라 있을만한 곳을 정신없이 뒤적거리며 알레나를 돌아보았다.
“안에서 들었지?”
“…여기서 기다릴게. 빨리 와.”
나 금방 안 돌아오면 안 될까.
“이제 잘 시간인데 뭘 기다려. 네 방 가서 자. 알겠지? 아 여깄네.”
“….”
책상 서랍 안쪽에 캔디 통이 보였다.
캔디 한 개를 입에 쏙 집어넣고 다시 방을 나서려던 순간, 짧게 고민했다.
야, 이거 너무 티 나지 않냐.
잠깐만요 하고 급하게 들어와서 입에 캔디를 물고 나오면 내 의도가 너무 투명하게 비치는 일 아니냐고.
“레나야, 음흉한 의도를 읽히더라도 텁텁한 입냄새보다는 레몬향이 천 배 낫겠지?”
그녀는 잔뜩 표정을 굳힌 채 말이 없었다.
“당연한 걸 뭘 묻냐고? 알겠어. 대답 잘 들었다.”
그래. 의도를 들키면 어때.
처음도 아니고, 전에 이미 한 번 했잖아.
나는 아예 캔디통을 품에 안고 문을 열었다.
그는 제 방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열린 문 옆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마주하자 점점 더 긴장이 올랐다.
“그건 뭐지?”
“레몬 사탕이요.”
남자가 내 품에 안긴 사탕통을 빤히 들여다본다.
아 내 시커먼 의도를 들켰다 들켰어.
“청소하면서 입이 심심할 수도 있으니까.”
“아….”
눈치챘나? 아 너무 티 나버린 거냐, 키스를 기대하는 게?
나는 슬쩍 나일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해도 괜히 시선이 입술로만 갔다.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럼 나도 한 개 먹을까?”
*
그의 공간으로 들어서자, 그에게서 실낱같이 풍기던 향이 정체를 드러냈다.
무겁지 않은 나무향이 방 전체를 지배했다.
남자에게서 나던 향이 공간 전체에서 나자, 마치 온몸이 그에게 안겨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이것들 정리하면 돼요?”
정신을 차리고 방 중앙에 놓인 나무 상자 더미를 가리키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 더미 중 꽤 큰 크기의 상자를 골라 들고 구석에 처박혔다.
묘한 긴장감으로 자꾸만 정신을 놓는 나를 위해 일단은 그와 거리를 벌리고 싶었다.
“….”
상자 뚜껑을 여는 내게 꽂히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구석에 가 앉는 거지?”
“구석이 방 한가운데 보다 안정감이 들거든요.”
“….”
그는 상자 더미 옆으로 스툴을 끌고 와 앉고, 나는 구석진 카펫 위에 앉아 상자를 열었다.
“정리를 도와 달라 하신 분은 전하시니, 사적인 물건을 보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얼마든지 봐.”
그리고 그와 나는 각자 조용히 물건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상자 안에 든 물건을 하나씩 살펴보며 슬쩍슬쩍 그의 옆모습을 살폈다.
나일이 손에 작은 노트를 들고 슬며시 미소 짓고 있었다.
뭐길래 저리 웃는 걸까.
나도 같이 보고 웃었으면 싶은데.
그러나 그는 나와 웃음을 공유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쉽지만 뭐 어때.
추억이 묻은 물건들을 정리하며 미소짓는 그를 훔쳐보는 일은 내게도 은근한 미소를 짓게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상자 안에서 고급스러운 천에 쌓인 물건이 나왔다.
‘뭐지?’
만져보니 푹신푹신했다.
묶인 천을 풀자, 귀를 길게 늘어트린 연보라색 토끼 인형이었다.
별 생각 없이 이 인형이 버리는 물건인지, 방에 둘 물건인지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더니.
그가 붉어진 귀에 동그랗게 놀란 눈을 하고선 나를 보고 있었다.
“아, 아니 그게 왜 거기에….”
아….
이거 뭔지 알겠다.
나는 얼굴에 음흉한 미소를 걸었다.
“토끼님, 바로 당신이 황자 전하의 첫사랑, 애착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가 다가와 내 손에 들린 토끼 인형을 냅다 빼앗아 갔다.
애착인형이야 누구나 다 어렸을 때 가졌던 물건인데, 뭘 저리 남사스러워 한담.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세요. 알겠어요. 안 놀릴게요.”
“아주 어릴 때 잠깐 놀고 안 보여서 버린 줄 알았는데 여기에 있었네.”
그러더니 자연스레 내 옆자리에 털썩 자리를 틀었다.
“자리로 안 돌아가세요?”
“자리?”
“네.”
그가 원래 앉아 있던 자리를 턱짓하자 나일은 고개를 저었다.
“이 방이 다 내 자리인걸.”
“아, 예.”
그러시구나.
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려 했지만 영 신경이 쓰이지 않는가.
바로 옆에 붙어 앉아 사람을 빤히 보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저 이거 황자 전하의 방 정리인데요. 저만 일하고 있네요.”
“난 황자 전하잖아. 일을 시키는 사람.”
“아, 예.”
그래요. 제가 을 아니겠습니까.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상자 안으로 손을 넣자, 그에게서 조금은 유쾌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꼼꼼한 성격이니까, 잘 정리해 주겠지.”
어쭈. 그냥 본인이 하기 싫은 거면서 그렇게 포장할래?
잔뜩 떫은 표정으로 맞받아치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제가 뭐가 꼼꼼해요. 제가 꼼꼼한지 어떤지 보신 적 없으시잖… 아요.”
없지? 동제국에 와서 꼼꼼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을 그에게 보인 적이 있던가.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 일하기 귀찮아진 걸 아무 말이나 막 해서 포장하는구만.
“…있을 걸?”
“…?”
“왜 없어. 있어. 생각해 봐.”
바로 답하지 않고 한 박자를 쉬었다.
내가 놓친 게 있나? 뭘 꼼꼼하게 했지?
“글쎄요.”
나일은 제가 원하는 대답이라도 있는지,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나를 언제까지나 빤히 바라볼 요량인 듯싶었다.
“정말 모르겠는데….”
“….”
결국 모르겠다는 답을 내놓고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는 괜히 상자 속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 만지작거리며 웃고 있었다.
왜 저렇게 혼자만 답을 알고 있다는 신나는 표정인거지.
“아 뭔데요.”
“….”
또 대답 없이 쓱 보더니 웃는다.
누가 봐도 뭔가가 있는 표정이다, 저건.
“말 하면 화내지 않을 건가? 사실 나도 참기가 힘들긴 해.”
나는 정리하던 물건을 손에서 내려놓고 그의 시선에 눈을 맞췄다.
확실히 이제 잘 보이는 게 느껴졌다.
그가 어딜 보고 있는지 정확히 알겠으니까.
“저한테 뭐 잘못하셨어요?”
“음….”
“….”
“지금 말하면 아마 잘못하는 일일지도 모르지.”
아 뭐길래, 답답해 죽겠다 마.
“하세요 잘못. 답답해 죽는 것보다 낫겠어요.”
내 말에 그가 만지작거리던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눈치채 버려서 미안해요.”
“….”
“그리고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말끝에서 남자가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
‘눈치채서 미안하다니, 뭘 눈치를 챘다는… 설마.’
말문이 막혀 입을 벌린 채 나일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분명 시선처리에서 혼란스러움이 느껴지겠지.
들킬까 무서워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사실 고민을 많이 했는데, 밧줄로 꽁꽁 동여매서 이곳에 계속 머물게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
“내 소망은 나 혼자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왜 그가 갑자기 내게 말을 높인 건지, 그리고 뭘 눈치챘다는 건지.
예상가는 한 가지가 있었지만, 나는 명랑한 표정으로 빙긋 웃으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를 대야 하지? 아니 일단 그래, 부정부터 하자.
떠보는 것 일수도 있으니까….
“저기….”
잡아떼기 위해 시선을 들어 올리자, 나일은 자못 단호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계속 부인하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 난 상처받을 지도 모릅니다.”
“….”
“지금도 날 상처주려고, 거짓말을 생각하는 중인가요.”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던 그의 표정이, 말을 마쳤을 땐 어째서인지 서글픈 표정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 변화가 잡아떼려던 내 목구멍을 꽉 틀어막았다.
아, 눈물 날거 같다.
기분이 왜 이렇지.
남자가 벌써 상처를 잔뜩 받았다는 애처로운 얼굴로 쳐다보기 때문일까.
면목이 없어진 거짓말쟁이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