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선물을 주면 좋아한다고?”
“좋아한다니까요.”
나일은 일단 선물부터 안기고 보라는 시종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가 얘한테 물은 게 과연 잘한 일일까?
하지만 다른 이에게 물어 보고 싶어도, 이놈 말고는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다.
“황자 전하.”
“어.”
“그 영애 분께 뭔갈 해주신 적이 있습니까?”
해 준거라….
그런 게 있었던가.
“없었지.”
나일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선 입을 앙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그녀에게 무언가를 주거나 해준 건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작은 방 구석에 쳐 박혀 병사 신분으로 숨어 지낼 때라 그럴 수가 없었다고!
“그럼 그분께 황자 전하의 능력을 보여드린 적은 아예 없는 거네요?”
“능력이야 굳이 뭘 보이지 않아도 내가 제국의 황자인데, 바보도 아니고 나를 능력 없다 생각할까.”
“후….”
당당하게 받아쳤는데 왜 시종의 입에서 저리 긴 한숨이 나온단 말인가.
나일은 좁아지려 하는 제 미간을 한번 들었다 놓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쪽 방면에 있어서는 제 시종이 자신보다 낫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너무 자기비하 아니냐고?
안타깝지만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연애 등신이었다.
원래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할 때 가장 멋있는 법이다.
연애 등신이면 잘하는 놈의 말을 들어야지.
“자…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그분께 선물을 받으면 어떨 거 같으세요?”
“선물? 그 여자가 나한테?”
“예.”
벤자민의 눈에 제 상관의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는 모양이 보였다.
벤자민은 이 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일단 그 영애가 전하께 선물을 하려면 전하를 관찰하기 시작할 겁니다. 필요하거나 원하는 걸 파악해야 선물을 정할 수 있으니까요.”
나일은 여자가 제 주위를 돌며 저를 관찰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저를 바라보는 호기심 가득한 녹색 눈망울을 상상하자, 나일은 서서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고 음, 선물을 브로치로 정했다고 칩시다. 그럼 브로치의 보석은 무슨 색상이 좋을까, 디자인은 어떤 게 좋을까 고민할 겁니다. 고민하면서 황자 전하의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겠죠. 잘생기셨으니 뭐든 어울리시지만 일단 선물하는 입장에서는 고민할겁니다. 또 전하께서 싫어하는 색이 있을까? 이런 것도 고려하겠죠.”
나일은 보석 진열대 앞에서 여러 개의 브로치를 살피며 저를 떠올리는 여자를 상상했다.
이게 어울릴까, 저게 어울릴까, 고민에 빠진 얼굴이 뚜렷이 그러졌다.
그런 고민 안 해도 되는데, 하… 난 다 좋은데.
그가 웃음이 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세상에 너무 귀여워.”
“그쵸 전하. 또 그 선물을 포장해서 전하께 드리러 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씨….”
선물을 받아든 내가 포장을 풀기 시작하면, 그 동그란 눈이 자신의 표정을 알기 위해 제 얼굴과 선물 사이를 열심히 오가겠지.
말도 안 나오네.
나일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브로치를 받으면 너무 좋을 것 같군.”
“그렇죠 전하? 그러니까….”
“하지만 벤자민, 넌 틀렸다.”
잘 흘러간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틀렸다는 말이 날아들어, 벤자민은 어디서 문제가 발생한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일을 쳐다보았다.
“브로치가, 그러니까 선물이 좋은 게 아니잖아. 네가 나한테 브로치를 주면 창밖으로 던져버릴지도 모르지.”
벤자민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제 가슴을 쳤다.
“누가 주는지가 중요하다고.”
나일이 그 말을 뱉고 뒷말을 잠시 망설이자, 벤자민은 또 저 입에서 무슨 답답한 소리가 나오려나 하는 심정이었다.
“내가 좋아야 내가 주는 선물도 좋겠지….”
막상 나온 소리가 안쓰럽기 그지없는 말이어서 벤자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긴, 2년 전에 이미 까였다고 그러셨지.
이미 한번 까인 데다가, 지금도 마음을 확신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니.
제 상관답지 않게 잔뜩 쪼그라든 저 모습도 이해가 갔다.
벤자민은 부러 더 밝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요.”
“….”
“그러니까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도 건네서 호감을 사야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밝은 제 목소리와 다르게, 상관의 얼굴엔 점점 그늘이 졌다.
선물로 호감을 산다는 게 영 와 닿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전하는 그분이 왜 좋으셨는데요, 아니 왜 좋으신데요.”
바닥으로 뚝 떨어져 있던 나일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벤자민을 향했다.
“모르겠는데.”
“악!”
친절해서 좋았다,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았다, 고운 말씨를 쓰는 사람이라 좋았다.
사람이 사람 좋아지는 수만 가지 이유 중에서 한 가지라도 나온다면, 전하도 그런 매력을 어필해 보자고 얘길 할 셈이었는데.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제가 무슨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벤자민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냥 좋은데.”
“그럼 2년 전에 함께 보냈던 시간 동안, 전하는 그분이 그냥 좋고, 그분은 전하가 그냥 싫었나보네요. 그럼 답이 없네요.”
“….”
열이 뻗친 뒷목을 문지르던 벤자민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전하 2년이 지나는 동안 뭐 달라진 점 있으세요? 없잖아요. 그럼 그분한텐 전하가 계속 별로겠네요.”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안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방금 전까지 없던 냉기를 풍기며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일이었다.
“내 시종이 왜 이렇게 말을 잔인하게 하지? 목과 상체가 분리되고 싶어서라고 생각하면 되나?”
“아니요, 전하.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시 말을 해볼 테니 목은 남겨주십쇼.”
벤자민은 나일에게 다시 고민해보라 제안했다.
좋아하는 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분명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물건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데.
“…빵.”
“….”
“빵을 엄청 좋아하던데. 빌론에서도 빵 맛있게 먹는 모습 많이 봤어.”
“빵이요?”
“응.”
빵 같은 소리 하네 진짜.
“그분 가난해요? 백작가 영애라면서요. 그분 빵 사먹을 돈 없어요?”
“아니, 있지….”
고민으로 얼굴이 눅눅해져가는 나일을 바라보며 벤자민은 닫았어야할 입을 또 다시 열고 말았다.
“왜 전하가 그 잘생긴 얼굴과 몸으로도 환심을 못 사고 거절당하셨는지 알겠어요. 진짜 전하 정도면 기본만 지켜도 일이 쉬운데.”
“나는 네가 얼마나 싸가지 없게 말하는지 알겠는데.”
“죄송합니다.”
빠르게 사죄의 말을 내뱉은 벤자민은 조용히 제 상관을 쳐다보았다.
나일은 테이블에 앉아, 마주잡은 두 손을 이마에 대고 고뇌하는 중이었다.
정말 똑똑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선생으로 온 자들마다 침이 마르도록 수재라 칭찬하지 않았었나.
아니 똑똑한 분 맞지.
이 문제만 빼고.
“그 여자한테 없는 거….”
“….”
“그 여자한테 필요해 보이는데 없는 거는….”
“….”
“나밖에 없는데.”
제 말이 황당한 말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아는지, 말을 뱉고 나서 나일이 그답지 않게 시종의 눈치를 살폈다.
벤자민의 입에서 별 말이 돌아오지 않자, 괜찮다고 여겼는지 나일의 입꼬리가 또 스멀스멀 위를 향하기 시작했다.
“나를 준다고 하고 싶다.”
지금 당장 줄 수 있는데.
그가 들릴 듯 말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이자,
참….
벤자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
그때 나일의 뇌리에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황궁 호수에서의 일이었다.
“손수건이 없나봐.”
“예?”
“전에 보니까 나 눈물 닦아주는데 그냥 맨손으로 코를 닦아주더라고.”
“정말요?”
맨손으로 코를….
벤자민이 놀란 눈으로 나일이 한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맨손으로 코를 훔치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이란 말인가.
“전하, 정말 이상한데요?”
“뭐가.”
“그분이 전하한테 관심 없는 거 맞아요? 코를 맨손으로 닦아줬으면 사랑 아닌가요?”
사랑…!
희망 가득한 단어가 들려오자 나일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희망에 부풀 수 없었다.
여자가 제게 품은 감정이 사랑이라면, 왜 2년 동안이나 자신을 찾지 않았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여자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저주가 풀리면 사라질 계획인 듯싶으니.
흑색이 되어가는 제 상관의 표정을 확인한 벤자민이 중얼거렸다.
“그럼 도대체 그분이 전하께 갖는 감정을 뭐라고 봐야 할지….”
벤자민이 머리를 싸매고 감정을 유추하는 동안, 나일은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가 섰다.
신경 써서 잘 먹고 잘 잤더니 혈색이 좋았다.
거울 속의 남자는 그야말로 그림 같은 얼굴이었다.
미려한 얼굴선,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만 두 눈동자, 독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눈밑 점까지.
쓸데없이 다른 선물을 고민하는 것보다 역시 나를 선물로 주는 게 가장 확실한….
‘아니지. 얼굴이 먹힐 거였다면 2년 전에 차이지 않았겠지.’
“하….”
고개를 푹 숙였던 나일이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근데 이 얼굴에도 멀쩡한 여잔데 어떤 선물이 먹힌단 말인가?
그런 물건이 세상에 존재하긴 하나?
그런 나일의 뒷모습을 벤자민은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 나일 리베르 황자 전하를 모시는 일에 늘 자부심을 갖고 임해 왔건만, 오늘 왜 이렇게 저분이 없어 보이는 것일까.
벤자민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전하.”
“뭐? 뭔데.”
“동정이요, 동정. 대상을 딱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
지금 제가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2년 동안 별 관심 없다가 저주가 심각해졌단 말 듣고 오신 거 아닐까요. 맞는 거 같은데요. 동정.”
벤자민이 예상했다는 듯,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물건을 여유롭게 피했다.
*
- 똑똑
들려온 노크 소리에 나와 알레나의 고개가 동시에 문을 향해 꺾였다.
“네.”
문 너머를 투시할 수도 없는데, 문 뒤에 서있는 자가 누구인지 왠지 예상이 갔다.
“방에 있나?”
예상대로 나일의 목소리였다.
방에 있으니까 방에서 대답을 했겠지.
방에 있나가 뭐야, 방에 있나가.
문을 열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 문뜩 방금까지 대화 중이던 알레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불편한 눈빛으로 방문을 보고 있었다.
“왜 온 건지 물어보고, 웬만하면 방에 들이지 않을게.”
저 얼굴로 다른 이의 시선을 받고 싶지는 않을 테니.
알레나는 소파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기 전, 거울 앞으로 다가가 내 상태를 살폈다.
이제 그는 앞이 어느 정도 보이니까.
헝클어진 머리를 급하게 몇 번 빗어 내렸다.
“나갈게요.”
문을 살짝 열어 잽싸게 밖으로 빠져나가자, 예상에 딱 들어맞는 남자가 문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