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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76)화 (76/134)

76화

멘데 공작의 서재를 빠져나온 알렉스의 시선이 빈 복도를 훑고 지나갔다.

서재 앞은 지나치리만큼 조용했다.

멘데 공작이 제 둘째 아이를 서재로 끌고 들어갈 때면 언제나, 아버지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하는 소리가 서재 앞 복도를 울렸기에.

사용인들은 혹여 제게도 그 불똥이 튈까, 두려움에 떨며 의도적으로 서재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

알렉스의 시선이 서재 문 바로 옆 벽에서 멈췄다.

옛 멘데 왕국의 궁에는 서재 벽에 작은 자국이 있었다.

아래쪽 벽에, 손톱으로 긁어 칠이 벗겨진, 이 저택엔 없는 자국을 알렉스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자국의 주인인 멘데 공작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멘데 왕이었던 시절에 공작은 주로 알렉스의 머리를 때렸다.

평판이 두려워 얼굴엔 손을 대지 않았다.

아비의 두툼한 손이 눈앞을 휘휘 날아다니고 나면 두개골이 울렸다.

어린 알렉스는 산발이 된 제 작은 머리통을 부여잡고 서재를 나서곤 했다.

그러면 언제나, 문 옆에 주저앉아, 아이가 아비에게 폭행당하는 소리를 손톱으로 벽을 찍어 누르며 감내하던 그 시절의 멘데 왕비가 알렉스를 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 내 아이야 이리오렴.

제 어미의 부러진 손톱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알렉스는 공작부인의 품으로 가 안겼다.

‘저는 형과 같은 남자인데 왜.’ 언제부턴가 알렉스는 질문하지 않았다.

제 어미가 손톱을 부러트려가며 인내하고 있지 않나.

내가 해야 할 일은 질문하는 것이 아닌 참는 것이다.

어미는 자신을 품에 안고, 산발이 된 머리를 손으로 빗기곤 했다.

뭉개진 어미의 손끝이 멍든 두피에 닿을 때면 따가웠지만, 알렉스는 아무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그의 속을 상하게 하는 것은.

- 내 아이.

어머니마저 더는 자신을 제 이름인 알렉스로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멈춰 서서 과거를 회상하던 알렉스가 걸음을 뗐다.

2층에 있는 제 방을 들렀다 황궁으로 갈 생각이었다.

“알레나?”

1층으로 내려오던 멘데 공작부인과 계단 중간에서 눈이 마주쳤다.

흔적이 남아버린 알렉스의 뺨을 발견한 공작부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누구한테 맞은 거니?”

“….”

“거기 누구 있어? 얼음찜질하게 얼음을 가져와!”

공작부인이 사용인이 있을만한 장소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우리 딸 얼굴이 이게 뭐야. 무슨 일이니, 어미에게 말해보렴.”

“….”

“얼음 안 가져와!?”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른 공작부인이 알렉스의 손을 잡고 그를 1층으로 이끌었다.

소파에 그를 앉힌 공작부인이 다정하게 그 앞에 마주앉았다.

하녀 한 명이 달려와 내민 얼음주머니를 그녀가 잡아채듯 빼들었다.

걱정 어린 얼굴로,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가 알렉스의 뺨에 얼음주머니를 가져다 댔다.

“어머니.”

“그래. 얘기할 생각이 든 거니? 도대체 네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 알렉스라고… 제 이름으로 한 번만 불러주세요.”

“응? 알렉스가 누구니? 네 이름이 왜 알렉스야.”

정녕 무슨 말인 줄 모르겠다는 의아한 얼굴로 공작부인은 되물었다.

볼에 닿는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알렉스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어머니 저 알렉스잖아요. 어머니의 둘째 아들, 알렉스 멘데.”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굳어 있던 공작부인의 눈가에 설핏 주름이 잡혔다.

그녀가 애써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레나야, 이 어미가 염려하는 걸 생각해서 말을 돌리려는 네 착한 마음은 알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농담은 좋지 않단다.”

기대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제 어미는 지금 아프니까. 아픈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제 둘째 아들을 삭제하였으니까.

이 안쓰러운 여자는 자신을 딸로 굳게 믿고 있으니까.

“페이!!”

서재 안쪽에서 공작의 고함이 들렸다.

남편에게서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공작부인은 생각도 필요 없는 일이라는 듯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가요!”

그녀가 들고 있던 얼음주머니가 알렉스의 발치를 굴렀다.

방을 옮긴 첫날이 다 지나가도록 알레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녀들이 귀중품까지 손대서 정리한 건 아니었기에, 정리가 덜 된 물건들을 살피며 옆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건만, 내내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없었다.

‘내가 못 들은 거야, 아직도 안 온 거야?’

답답한 마음에 방을 뱅글뱅들 돌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옆방 벽을 두드렸다.

- 똑똑똑

“….”

답이 없었다.

제 방을 찾아와야 만나서 대화라도 하지 정말, 대체 어디서 뭘 하느라 아직도 오지 않은 걸까.

놀라서 그만 그녀의 얼굴에 손을 데고만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이 뵈질 않는데 뭐 어쩔 것인가.

알레나의 방 벽을 한 번 흘겨보고는 정리를 계속해 나갔다.

분주하게 손을 놀리던 나는 이번에는 반대편 벽을 째려보았다.

나일 리베르의 방이었다.

이놈도 마찬가지다. 오늘 만난 거라곤 낮에 잠깐 마주친 게 다였다. 

- 내 수면제. 잘 부탁한다고.

아니 잘 부탁한다며.

부탁한다는 그 말의 뜻은 이번엔 졸리지 않게 재미나게 잘 해보자는 말 아니었냐고.

내심 부르리라 기대했는데 지금 밤이라고.

‘그날 밤, 아주 조금이지만 마음이 닿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만 그런 거였나.

이제 보인다며.

그럼 자기랑 입 맞춘 사람이 눈코입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지 않나? 자세하게 보고 싶지 않아?

아주 그냥 눈 뜨면 봐야지 생각했던 게 수백 가지 되나 봐.

코빼기도 안 보여.

“조금 기대했는데….”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문 가까이 가 묻자, 건너편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이 돌아왔다.

“나….”

내방 문 앞에서 나라고 짤막하게 대답할만한 인간은 이 황궁에서 두 명뿐이었다.

알레나였다.

문을 열자, 왼쪽 뺨을 손으로 가린 그녀가 딱 봐도 끌어올리기 힘들어 보이는 입꼬리를 올리려 애쓰며 서 있었다.

원래 계획은 무슨 일이냐며 차가운 얼굴로 맞이해주려던 것이었는데.

죄 지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그녀를 보자 차마 그리는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와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알레나가 내게 작고 납작한 단지를 내밀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와.”

“응.”

한 손 위에 놓인 단지와, 그때까지도 손을 올리고 있던 왼쪽 뺨을 바라보며 대답하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들어왔다.

테이블에 앉는 알레나에게서 단지를 건네받자, 그것은 고체 형태의 연고였다.

‘왜 연고를.’

내가 때린 왼쪽 뺨에 생채기라도 생겼나? 덧난 건가?

손등 위로 덜어낸 연고를 문질러 녹이며 물었다.

“어디에 발라줘.”

내 물음에 그제서 알레나의 왼손이 가리던 부위를 드러냈고,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와락 구겼다.

“…너 뺨이 왜 이 모양이야?”

왼쪽 뺨은 타노스한테 맞은 것처럼 부풀대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아무리 봐도 며칠 전 내 손찌검으로 이리 되었을 것 같진 않지만,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설마 내가 때려서 아직도 이런 거야?”

알레나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럼 누구한테 맞았어.”

“….”

알레나는 입을 가로로 굳게 다문 채 그저 나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누가 널 이렇게 때렸냐고.”

“….”

“말 안 해?”

“나 볼 따가워. 약 발라주라.”

어디서 쳐맞고 와서 약 발라주는 건 나한테 해달래.

당최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 안 할 거면 보이질 말든가, 후….

손끝에 묻은 연고를 붉게 튼 볼 위로 살살 펴 바르자, 따끔거리는지 알레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디서 뭐하다 지금 온 거야.”

“집에 다녀왔어.”

“집? 삼일 내내 집에 가 있었어?”

“아니, 황궁에 있다가 집에 왔다가라는 연락을 받아서 오늘 잠깐 다녀온 거야.”

집이라는 말에, 그녀가 이제껏 내뱉었던 집과 관련한 숱한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들을 연상했다.

알레나는 집에서 맞고 왔구나.

그녀의 가족이 그녀를 때렸구나.

“오빠? 아님 아버지야?”

“….”

알레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둘 중 한 명이 그녀의 뺨을 이리 만들었으리라.

“많이 아팠겠다.”

“….”

뒤통수를 팔로 감싸 안으며, 그녀의 얼굴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 아이, 아마 가족에겐 사과 받지 못 했겠지.

가족의 얼굴을 이리도 무참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과연 사과는 할 줄 아는 사람들일까.

“그날 때려서 미안.”

“아니.”

작게 읊조리며 알레나가 서 있는 내 허리를 부둥켜안으며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괜찮아. 네가 약 발라줬잖아.”

“….”

“살 것 같다 이제.”

*

혹시 몰라 얇게 한 겹 더 연고를 펴 바른 후, 우리는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치료제로 황궁에 머무는 일이 끝나면, 널 따라 빌론으로 갈래.”

빌론? 날 따라서?

갑작스러운 선언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소파 위에 편히 늘어진 내 손을 그녀가 만지작거렸다.

“뭘 그렇게 놀라 해. 나 민망해.”

“어… 그게 아니라….”

빌론으로 오겠다는 알레나의 말이 잠깐의 여행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가문을 나오려고 해. 질렸거든.”

“정말?”

그녀가 민트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조금 놀란 내 마음은 금세 반가움으로 들어찼다.

알레나는 가문에서 제명당하는 일에 결심을 굳힌 듯 보였다.

가문의 이득을 위해 딸을 가짜 치료제로 밀어 넣을 때부터, 그녀의 가족의 실체를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나와 살겠다 결심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괜히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섣불리 종용하는 것이 될까봐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이렇게 먼저 알레나의 입에서 가문을 나오겠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그만큼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겠지.

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당분간은 네게 거취를 부탁해도 될까.”

“물론.”

어렵지 않지.

혹, 그녀가 기죽는 모습을 보기는 싫었기에 부러 밝고 힘차게 대답했다.

나도 좋은 걸, 너는 내가 이곳에서 만든 유일한 친구란 말이야.

다만 한 가지 생각이 나를 잡아끌었다.

그래, 알레나의 말대로 치료는 곧 끝나고 그럼 나도 이 황궁을 떠나게 되겠구나.

애초에 계획이 그러했으니까.

떠나면 까만 머리의 남자를 나는 많이 그리워하게 되겠지.

뭐… 그리워하며 살면 되지, 얼마나 가겠어.

‘하지만 혹시라도 그가 나를….’

아, 아니다,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 

내 얼굴에 떠오른 쓸쓸한 기색을 기민하게 읽은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응? 무슨 생각해?”

“별거 아냐. 너랑 같이 빌론의 시골 정취를 만끽할 생각.”

벌건 볼에 두텁게 연고를 올리고서 알레나는 푸시시 웃었다.

“너한테 말할 게 하나 더 있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지, 늘 하고 다니던 반지를 매만지며 입을 우물거리던 그녀가 첫마디를 떼었을 때였다.

-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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