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그는 버틸 자신이 있었다.
내 눈으로 다시 여자를 담을 수 있게 되는 순간만 온다면, 이는 큰 인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설레는 기다림이었다.
오히려 나일은 자꾸 기대감으로 들뜨는 제 마음을 짓눌러야 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제 마음이 자꾸 확신하려 들었다.
매분 매초 마다 기대감이 차올랐다.
이리 부푼다면, 원치 않는 결과를 맞이했을 때 절망도 그만큼 크겠지.
그것이 두려워 자꾸 그는 기대감을 억눌렀다.
아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직 저 갈색 머리 영애에게선 아무것도 확인된 것이 없는걸.
그리 마음먹으려 애쓰면서도 나일은 닫힌 2층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2층으로 다시 올라간 란셀롯 영애는 창문을 닫고 무얼 하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화려한 블론드 헤어를 찰랑거리며 짙푸른 녹음 같은 큰 눈망울을 웃음으로 채운 여자가 거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
그 여자다.
피비 셀린이다.
어둠 속에서 상상으로 만들어 냈던 여자가 아닌, 살아있는 여자였다.
2층 방으로 올라갔던 건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상아색의 실내복을 입은 그녀가 거실 소파에 앉아 즐겁게 웃고 있었다.
“저, 전하… 저, 저기 금색 머리칼…!”
놀라워하는 음성이 시종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 그때 호수에서 물속에 빠진 전하를 끌어당긴 병사들이 하나 같이 이렇게 증언하더랍니다.
랜턴으로 비춰 봐도 수면 가까이 닿는 곳에 전하의 인영이 없었는데, 갑자기 호수 안쪽에서 전하가 붕 떠올랐답니다.
누군가가 안쪽에서 세게 밀어낸 것처럼, 전하의 몸이 갑자기 손에 잡혔대요.
여자의 손길이 제 목숨을 구했다는 고마움보다는 원망이 더 컸다.
뭐하러 날 구해.
그렇게 죽어버릴 거면 뭐하러 날 구해.
당신이 없는 세상에 홀로 남길 거면 뭐하러 날 살렸지.
2년 동안이 그랬다.
2년 동안 그의 세상은 얼어붙은 겨울 호수의 안쪽을 유영해 다니는 것이 다였다.
아무리 헤엄쳐 봐도, 바닥까지 손을 짚어도 만져지는 것, 무엇하나 손에 닿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오래 물속에 잠겨 있으면 죽어야 하는데, 숨이 멎은 지는 이미 오래인데 이상하게 그는 죽지도 않았다.
그는 겨울밤, 얼어붙은 호수를 내내 떠다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얼어붙어 안쪽에서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지 않던 호수 수면을 깨부수고 그는 얼굴을 내밀었다.
시원하고 맑은 공기를 폐부 안쪽까지 머금었다.
누가 수면을 두드렸지.
내가 이 호수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누가 밖에서 수면을 두드려 깨준 거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누군가가 내민 손이 보였다.
참 작고 하얗기만 한 손이라, 저 손을 잡아봤자 나를 끌어당길 힘이 있으려나, 싶은 의심이 들게 하는 손이었다.
나일의 시선이 그 손을 타고 주인의 얼굴로 올라갔다.
바라본 곳엔, 밝게 웃음 짓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미소가 햇살처럼 따듯해서 의심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 이 여자라면 나를 이 호수에서 끌어올려 줄 수 있겠어, 라는 생각이 들자 나일은 주저 없이 그 손을 움켜쥐었다.
손의 힘에 이끌려 육지에 발을 디디자, 여자가 다행이라는 듯 미소지었다.
‘이제 안심해도 됩니다.’
라는 대사가 들리는 듯했다.
나일은 망원경 너머를 살폈다.
여자가 그녀의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살아 움직였다.
“….”
아….
살아있었구나.
찾아 헤매던 상대가 살아있었음을 깨달은 순간, 그는 제 몸이 열 개 백 개의 조각으로 쪼개지는 것을 느꼈다.
쪼개지고 쪼개져서 쓸데없는 불순물은 다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내린다.
쓸데없는 원망, 자신을 속였다는 괘씸함, 왜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건지, 나를 원해서 이곳에 온 걸까 하는 기대감까지.
그 모든 불순물들은 다 날아가 버리고 그저.
살아있었구나, 살아서 내 곁으로 왔구나 하는 한 조각만이 남는다.
옆에 있는 시종에게선 말이 없었다.
벤자민이 제가 우는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던가.
아, 아주 어릴 적에 보았을 수도….
하지만 다 자란 이후로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었지.
우는 일을 또 경계하고 경계했으니까.
그러니 아마 시종에겐 지금 제 모습이 낯설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가만히 나를 보고만 있는 것일 테지.
“내가 우는 모습이 이상하냐? 나도 사람….”
“이상하긴요. 얼마 전에도 우셨잖습니까.”
“언제.”
“그 황궁 호수에서 저 영애와….”
아. 나는 이미 그때 저 여자에게 끌어올려 졌구나.
그때 내게 무어라 했었지.
행복해지라고 했었나.
“….”
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내게 행복해지라는 말을 하다니.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어? 올라간다.”
시종의 말대로였다.
붉은 머리 여자에게 뭐라고 잔소리라도 들은 것인지, 뾰루퉁한 표정을 짓던 여자가 2층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일의 눈이 그 뒷모습을 좇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 여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땐, 갈색 머리 피기 란셀롯의 모습이었다.
목걸이를 착용하진 않았으나 몸 어딘가에 지니고 내려온 모양이었다.
당장 저 집에 쳐들어가, 당신이라는 것을 안다.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품에 안고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맥박 소리를 몸으로 느끼며, 여자가 살아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도망가려나.’
그는 아직 여자가 정체를 숨기는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니 여자의 행동을 예측할 수도 없고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둔다면.
‘소리소문 없이 왔다 떠나려 한 건가.’
나를 멍청이처럼 만들려 했어.
여자가 옆에 있는데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멍청이로.
나일이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원해.’
원한다, 갖고 싶다.
어떻게 묶어두지, 아니 묶어둘 수는 있나.
그래도 되나.
치료제로 왔으니 그 일이 끝나면 떠나버리고 말 건가?
괘씸해.
여전히 내 마음에 비한다면 저 여자는 나를.
하지만 살아서 돌아와 주었다.
내게 다시 마음 줄 수 있는 대상을 돌려줬어.
그에 비한다면 무엇을 원망한단 말인가.
“가자.”
나일은 멀뚱히 저를 보고 있던 시종의 어깨를 쳤다.
“예? 어디로요?”
“어디긴, 황궁이지.”
“이대로 가신다고요?”
그의 물음에 나일은 비어있는 좌석으로 망원경을 던졌다.
“황궁으로 돌아간다. 묶어둘 밧줄을 찾아야지.”
“…?”
여기 앉아 몰래 보고만 있으면 여자를 잡아둘 방법이 나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
사흘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삼일 동안 내내 수도의 집에서 놀고 왔더니 본궁 방 배정은 이미 끝나있었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새로운 황자궁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본궁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전 황자궁에서 바라만 볼 때도 위용이 대단했지만 내부는 더 화려했다.
“이곳입니다.”
“네.”
안으로 들어가니 방의 크기도 치장도 예전 황자궁 방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방이었다.
“그럼 멘데 영애의 방은 이 옆방이겠네요?”
“예.”
방에서 나와 내 방 우측 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오는 이도 들어가는 이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알레나는 아직 오지 않은 건가?
그리고 내 시선은 단연 눈에 띄는 왼쪽 방으로 향했다.
복도 끝에 있는 그 방은 다른 방들과는 크기도 훨씬 컸고 들어가는 입구도 남달랐으니까.
“근데 여기는 누구….”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방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며칠 만에 마주친 나일 리베르가 혈색 좋은 얼굴로 서 있었다.
의도치 않은 만남이라는 듯 살짝 놀란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는가 싶더니 입이 열렸다.
“그대가 내 옆방인가 보네.”
마치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말투에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황자궁의 일이 그의 승인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왜 모르는 척이람.
내 방을 이렇게 대놓고 노골적인 위치에 잡아 놓고.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가 나를 바로 알아보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시력이 돌아온 이후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으니.
“제 방이 옆방인 줄 모르셨다구요?”
“그랬지. 이건 시종장이 알아서 한 일이니까.”
그가 팔짱을 낀 채 건들건들한 걸음으로 다가와 내방 문에 기대섰다.
“내가 한 방 배정은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걸.”
시력이 돌아오고 있어서 그런가.
남자의 태도가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약간은 경계하는 모습이 비쳤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실실거려.’
문에 어깨를 기대서서 비스듬히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관찰하듯 가만히 보는 그의 시선을 맞받아치듯 보고 있으면, 남자가 영락없이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무표정한 표정으로 돌아오길 그는 반복하고 있었다.
“아… 옆방이니까 잠 안 올 때마다 부르면 되겠어.”
“네?”
“그대는 사람을 재우는 재주가 있으니 말이야.”
재우는 재주?
내가 이분을 언제 재웠던 적이 있던가, 떠올리던 나는 확 얼굴을 붉혔다.
지금 나 키스 못 한다고 대놓고 무시당한 거지?
“허.”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하다가 잠든 게 내 탓이다 이 말이지 지금?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버리자, 뒤통수에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고개를 돌릴 순 없었다.
화가 나서 달아오르는 얼굴이 느껴지는데, 이 얼굴을 보일 순 없잖은가.
“이봐.”
고개를 돌리고 가만히 서 있으려니 그가 내 뒤로 다가와 어깨 위에 턱을 얹었다.
“내 수면제. 잘 부탁한다고.”
*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멘데 공작의 손이 제 자식의 얼굴을 때리고 떨어져 나갔다.
자식의 뺨을 갈기는 아비의 손은 두꺼웠다.
높은 지위에 앉아 사람들을 부리는 인생을 살아온 자의 손이라기엔 쓸데없이 두꺼운 손이다.
아비 역시 그 사실을 아는지, 오늘처럼 제 손을 알맞은 용도로 사용하곤 했다.
알렉스는 뺨이 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고통이었다.
한동안 맞은 적이 없어 이 고통을 잠시 잊고 지냈었는데, 그걸 어찌 알았는지 제 아비는 어김없이 그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너 이 새끼, 방금 뭐라고 했어.”
“….”
들었잖아.
들어놓고서 뭘 묻는 거지.
“황자가 다 나으면, 이 짓거리 그만한다고요.”
마음이 가는 아이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나는 네 곁에서 너를 지켜보는 일이 좋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 아이도 치료가 끝나면 이곳을 떠난다 했으니 그 아이를 따라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제껏 그리 못 살아왔으니, 앞으로라도 원하는 대로.
“황실에서 멘데 가문의 청을 다 들어준다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그 덕에 한자리 차지하게 되실 겁니다. 그런데 부족합니까? 그럴 거면 처음부터 왕국을 빼앗기질 마셨어야죠.”
본인이 부족해서 빼앗긴 주제에.
이제는 안다. 과거의 그 일이 내 탓이 아니었다는걸.
- 철썩.
재차 후려갈기는 손길에, 그렇지 않아도 자국이 남아있던 뺨이 더 부어올랐다.
그 아이가 잔뜩 부푼 이 뺨을 보면 어떨까.
신경 쓰겠지.
그 아이라면 분명 마음 쓸 것이다.
자기가 때려놓고도 미안했는데, 어디 가서 또 맞고 온 걸 보면 엄청 신경 쓰여 할 것이 뻔했다.
안쓰럽게 보는 눈빛이면 어때.
그 아이에게로 가야지. 가서 발갛게 부어오른 이 뺨을 아이의 녹색 눈망울 앞에 들이밀어야지.
이 뺨을 보면 먼저 말을 걸지 않고는 못 배길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