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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74)화 (74/134)

74화

호수에서 살아난 직후가 아닌 이제서야 동제국에 온 거지.

왜 바로 오지 않고 치료제의 문장이 나타난 이후가 되어서야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갑자기 스치듯 떠오른 나쁜 생각에 나일은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

‘사적인 감정 없이 치료만 하고 내빼려는 건가?’ 

나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흐름이 그쪽으로 흘렀다.

그 겨울 호수에서, 함께 동제국으로 가자는 제 말에 그 여자가 대답을 했던가.

‘안 했지.’

성격이 어찌나 대쪽같은지 불쌍해서라도 알겠다고 해줄 법한데 끝까지 입을 꾹 다물지 않았나.

그는 기운이 빠져 흔들리는 몸을 겨우 추슬러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2년 동안 자길 보러 올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고 살다가, 본인이 치료제가 된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온 거란 말인가.

나일은 그가 그녀에게 주어졌을 당시를 떠올렸다.

우연히 주운 병사를 그녀가 얼마나 극진히 돌보았는가.

우연히 주웠다는 책임감으로 그를 동제국으로 보내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 사람인가, 그 여자가.

정리하자면 그를 보고 싶은 마음 따위 별로 없이 살다가 치료제가 된 것을 알고 책임을 다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밖에.

‘해석이 안 되네?’

  

스스로 내린 결론이 어이가 없어 나일은 픽 실소를 흘렸다.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아니까, 정체가 드러나면 피곤할 것을 염려해 밝히고 있지 않는 건가?

정말 나 몰래 치료만 하고 내빼려고?

‘와, 이거….’

미리 눈치 못 챘으면 눈 뜨고 당할 뻔하지 않았나.

이 여자 안 되겠네 이거.

이 괘씸한 사람을 어떡하지?

“후….”

거의 누운 듯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머리를 굴리던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아직 단정 짓긴 일렀다.

이것저것 짜 맞춰 제멋대로 란셀롯 영애가 그 여자라는 원하는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아직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지 확실한 사실은 아니었다.

물론 자신이 등신도 아니고 아무 여자에게서 그 여자를 떠올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심증뿐이지 않은가.

피기 란셀롯이 정말 피비 셀린인지, 확인해야 했다. 

‘어떻게 확인하지.’

그가 고민스러운 얼굴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

“시종장.”

“예, 전하.”

“위장 아이템을 무력화하는 방법이 어떤 것들이 있지.”

“일단….”

그가 줄줄이 나열한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역시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착용자가 지닌 아이템을 그에게서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모습을 바꾸고 있으니 위장 아이템을 지니고 있다는 건 뻔한 일일 텐데, 그 아이템이 무엇일까.

드레스나 구두는 매일 바꿔 입으니까, 가장 무난한 건 악세사리겠지.

란셀롯 영애가 늘 몸에 하고 다니는 악세사리가 뭐였지.

“xx xxx”

나일은 의자에서 일어나, 웃음소리가 들리는 창문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루메낙 영애와 란셀롯 영애가 황자궁 중정에 마련된 티테이블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크든 작든 개의치 않더니, 지금은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는지 둘은 목소리를 낮춰 속닥였다.

그가 가만히 란셀롯 영애를 바라보았다.

귀걸이?

지금은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지만 귀가 허전한 날도 있었지, 귀걸이는 아니고.

반지?

집무실에서 손을 잡을 때마다 여자의 손에선 항상 반지가 느껴졌지. 반지인가?

아니, 제 침실로 들였던 그 날 밤엔 손에 반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 목걸이인가.

낮에도 밤에도 항상 저 단순한 디자인의 목걸이를 걸고 있던 것 같은데.

물론 악세사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아이템 자체를 옷 속에 숨기고 돌아다녀도 효과는 같을 테니까.

하지만 의심하는 이도 없는데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시종장, 황궁 세공사가 요즘 바쁠 때인가?”

“그렇죠. 이제 5월의 여왕도 뽑겠다, 날씨가 더워지면 아무래도 화려한 악세사리를 더 많이 찾으니 한창 바쁠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군. 휴가 보내.”

황자의 황당한 명령에 시종장이 일정표를 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휴가를요?”

“응. 돈 주고 휴가 보내.”

“예, 전하.”

목걸이일 것이다.

그러니 여자의 본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저 목걸이를 벗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갑자기 목걸이가 사라지거나, 내 앞에서 목걸이를 벗게 한다면 여자를 당황하게 할 것이다.

애써 본 모습을 숨기고 있는데 모두의 눈앞에서 강제적으로 정체를 드러내게 할 수는 없었다.

여자가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 이유를 모르는 상태에서 섣부른 행동을 했다간 상처를 입힐 수 있을 테니까. 

“전하아아!”

창가서 서 있는 그를 발견한 루메낙 영애가 발랄하게 손을 흔들었다.

예법엔 한참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나일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귀여운 막내 여동생이 있다면 저런 아이지 않았을까.

그녀에게 자애로운 오라비가 있다면 이런 느낌으로 웃어주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나일은 부드럽게 입술을 당겼다.

“와아. 황자님이 웃어주셨어. 진짜 보이시나 봐.”

루메낙 영애가 말을 건네는 옆 사람에게로 나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계속 즐겁게 손을 흔드는 어린 영애 옆에서 그녀는, 조금은 묘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일은 어쩐지 올곧게 직시해오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등을 돌렸다.

마치 자신이 이제 다 보인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 같은 투명한 눈동자였다.

창가에서 돌아선 그가 조금은 세차게 뛰는 가슴께로 손을 올렸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내려가서 그 가녀린 목에 걸려 있는 얇은 목걸이를 뜯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제게 자신이 피비 셀린이라는 걸 들킨다면 그녀는 그 순간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순간에도 지금처럼 흔들림 없이 쳐다볼까.

표정이 궁금해 참기가 힘들었다.

당황? 원망? 화를 내려나.

아니, 정체가 드러나면 도망갈지도 몰라.

그러니 이 충동은 가라앉혀야 했다.

2년 동안이나 찾지 못했는데 또 도망가 버린다면.

조심스러워야 한다. 눈치채게 하면 안 된다.

*

한낮이 기울어서야 나는 눈을 떴다.

정말 오랜만의 늦잠이었다.

역시 잠이 보약인가, 그렇지 않아도 요즘 좀 피곤하다 싶었는데 해가 기울 때까지 잠을 푹 자고 나니, 몸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싶을 정도로 개운했다.

사흘 동안은 아무 일정도 없었다.

치료제들과 황자의 접견도 일절 없어서, 주어진 삼일 동안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릴 수 있었다.

그 대신 황자궁은 다른 일로 바쁘게 돌아갔다.

창밖에서 복도에서, 짐을 옮기는 일꾼들의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예 궁을 싹 비우는 건가.’

바깥 상황이 궁금해진 나는 화장대로 가 목걸이를 찾았다.

‘어?’

목에 채우려고 보니 목걸이 고리가 만져지지 않았다.

어제저녁까지는 잘 착용하고 다녔는데, 밤에 목걸이를 빼다가 고리 부분이 끊어진 건가?

혹 바닥에 떨어져 있진 않을까 싶어 바닥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보석이 박힌 목걸이 펜던트를 허벅지까지 올라온 스타킹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착용하지 않아도 보석만 몸에 지니고 있으면 됐으니까.

이대로 세공사를 찾아 줄만 수리를 맡겨야지.

방 밖으로 나오자 예상대로 일꾼들이 정신없이 복도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황자의 거처를 다시 본궁으로 옮기고 있었다.

황자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이 황제와 황후에게도 들어갔을 것이다.

몸이 아파 황태자 책봉도 미룬 채, 본궁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황자궁에 자리를 잡았던 황자를 이제 다시 불러내려는 모양이었다.

‘본궁이라.’

“저기요.”

“예?”

정신없이 짐을 나르는 하녀를 한 명 불러 세웠다.

“황실 세공사에게 물건을 맡기고 싶은데.”

“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하녀는 친절하게 안내했지만, 나는 그곳에 닿자마자 발길을 돌려야 했다.

- 세공사가 휴가를 가서요.

휴가라고? 여긴 봄 휴가를 주나?

결국 나는 고장 난 목걸이 줄을 손에 쥐고 그곳에서 걸음을 돌렸다.

어쩐다. 

계속 이렇게 스타킹 안쪽에 넣고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따가운데.

‘나갔다 오지 뭐.’

할 일도 없는데.

어째선지 나일은 그 날 이후로 나를 찾지 않았다.

하긴 그날도 사실 그가 나를 찾았다기보다 그의 방 앞에서 마주쳤다가 끌려들어 간 것뿐이었으니까.

그가 나를 찾을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목걸이 줄 같은 건 하인에게 맡겨버리고 황자궁에 붙어있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

왜지.

은근히, 아니 점점 의식될 정도로 기분이 나빠 왔다.

입 맞추다 자버리더니, 정말 나 그렇게 못 했나?

“….”

레나는, 하 레나는….

그날 밤 이후로 우리는 냉전 중이었다.

뺨까지 때린 건 좀 너무한 처사였나,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확실히 먼저 잘못한 쪽은 그쪽이잖아?

무슨 그런 장난을 치냐구.

그럼 당연히 먼저 굽히면서 미안하다 사과를 해와야지.

그럴 줄 알았는데 그녀에게선 계속 아무 말이 없었다.

아 이 망할 황자궁.

둘 다 보기가 싫군.

그래, 목걸이 고치러 나간 김에 사흘 내내 파베라랑 놀다 와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 찾을 이는 없어 보이니까.

*

“황자 전하!”

저를 찾는 시종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일이 벌떡 일어섰다.

시종의 손에 들려있는 망원경을 빼앗아 눈에 가져다 댔다.

“어디? 아.”

망원경 렌즈 안으로 피사체가 들어왔다.

그의 예상대로, 세공사를 찾아왔던 그녀가 허탈한 발걸음으로 궁을 빠져나가는 모습이었다.

“정말 밖으로 나가네요?”

벤자민이 저런 건 보통 사용인을 시키는데, 라며 의문을 덧붙였다.

보통은 그렇지.

그리고 란셀롯 영애는 그 보통의 경우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역시 그만큼 소중한 목걸이라는 거겠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가 예상하는 이유였으면 좋겠는데.

그가 든 망원경이 계속해서 피사체를 쫓았다.

“가자.”

란셀롯 영애가 탄 마차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일과 시종이 탄 마차가 그 뒤를 따랐다.

영애가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번화가에 있는 작은 보석상이었다.

상점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나일은 망원경 렌즈 너머로 관찰했다.

웃는 얼굴로 가게 주인과 몇 마디 말을 나눈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석상을 나섰다.

목이 여전히 허전한 거로 보아, 목걸이 줄을 바로 돌려받지는 못한 듯싶었다.

그 이후로 여자는 빵집과 꽃집을 들러, 빵과 꽃을 마차에 그득그득 실었다.

란셀롯 영애가 탄 마차는 상점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택가로 들어갔다.

그곳은 돈을 불려 나가기 시작하는 상인들이 주로 사는 주거지였다.

귀족들의 고급 저택이 몰려있는 타운하우스처럼 고급스럽진 못했지만 비싼 집들도 꽤 많았다.

여자가 탄 마차가 작은 주택 앞에서 멈춰 섰다.

나일은 그 집이 보이는 반대편 길가에 마차를 세웠다.

집 안에서 강렬한 붉은 머리의 여자와 하녀 한 명이 나와 영애를 맞이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여자가 집을 계약했던 파베라인가.

란셀롯 영애가 조금은 어리광부리는 듯한 모습으로 붉은 머리 여자에게 다가가 안겼다.

“전하.”

“응.”

“그냥 직접 확인해보면 될 일 아닙니까?”

“응 아냐.”

1층에 난 큰 창으로 얼핏얼핏 보이던 영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주택 2층에 난 창문이 열렸다.

열린 창으로 주변을 한 바퀴 바라보는 영애의 모습에, 나일이 상체를 수그리며 시종의 머리를 눌렀다.

“아니 꼭 이렇게….”

시종의 입에서 볼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냥 앞에 세워두고 목걸이를 벗어 보아라, 명령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를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하냐고?

나일은 창으로 아주 살짝 눈만 내밀고 망원경을 가져다 댔다.

언제 또 1층으로 내려온 건지, 1층 거실 테이블 위로 풍성하게 꽃꽂이 된 화병을 놓고 있었다.

“그야….”

이건 비효율적인 방법이고, 시간만 잡아먹고 원하는 걸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저 여자가 그 여자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하루든 이틀이든 아깝지 않을 테니까.

2년이 넘도록 확인하지 못했던 여자의 생사를 기다리는 시간인데, 지루할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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