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그 말에 쏟아지던 잠이 한순간에 달아난 나는 번쩍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얼마나? 잘 보인대? 언제?”
“….”
“어? 자세하겐 말을 안 한 거야?”
왜 말을 망설이는 거야, 답답하게.
“아직도 희뿌옇게 보이긴 하는데 많이 보이나 봐.”
“아!”
나는 기쁨의 감탄사를 내뱉으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거였네.
그동안 찔끔찔끔 손이나 잡고 있을 게 아니었네.
이렇게 바로 효과가 있는 것을!
“보이기 시작했구나….”
울컥하고 기쁜 마음이 차올랐다.
그 감정을 들키는 게 쑥스러워 나는 급하게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헤실헤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즐거운 웃음소리를 막지는 못했으니.
“그렇게 기쁜 거야?”
“그러게. 이렇게 기쁠 줄 몰랐어.”
정말 몰랐다.
많이 마음 졸였던 문제가 해결되어서 그런가, 이렇게 신이 날 줄은.
그래. 좋게 생각하자.
이대로 가면 그는 눈을 뜰 것이고, 그럼 아무 문제 없다.
전 치료제를 만나려고 했던 건, 그의 치료가 전혀 안 되는 것 같았기에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것이었으니.
나일이 보이기 시작했다면 전 치료제를 만날 필요도 없어진 거다.
“하핫….”
오늘 그는 얼마나 기뻤을까.
치료에 진전이 없어 속상했던 만큼 두 배는 더 기뻤을 거다.
“그 소식을 누가 발표한 거야? 황자가 직접 했어? 말 할 때 그의 표정이 어땠어? 당연히 좋았겠지?”
아니다. 속으로는 기뻐 난리여도 겉으로는 근엄한 척 표정을 숨겼으려나.
“시종장이 말했어.”
“그랬구나. 아하핫… 그런 건 꼭 시종장을 시켜 말하네.”
한 군데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나는 헤실거렸다.
“잘 됐다… 정말, 다행이야.”
실실 웃으며 알레나를 바라보았는데 어쩐지 그녀는 기분이 매우 언짢아 보였다.
왜 기뻐 보이지 않을까.
그녀도 바라는 일이었을 텐데.
미친 사람처럼 혼자 실실거리던 나는 그제야 앞에 앉은 사람의 기분을 살필 수 있었다.
“레나야, 너는 기쁘지 않아? 잘된 일이잖아.”
“….”
간단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한참 만에 돌아왔다.
“잘된 일이야.”
“응, 그렇지?”
“이제 황자는 나을 거고, 그럼 너도나도 원하는 것을 이루고 황궁을 떠날 수 있을 테니 잘 되어가고 있는 거지.”
“으응….”
말은 잘된 일이라고 하면서 표정은 점점 험악해져 가는 신기한 광경을 보며 의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 침대에 앉은 나는 얼굴 옆으로 흘러내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잘된 일인데 내 친구 표정이 왜 이럴까.”
“….”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주고 되돌아오는 내 손목을 알레나가 낚아챘다.
그녀가 부드러운 힘으로 내 손을 끌어당겼다.
제 볼에 내 손을 가져다 댄 알레나는 눈을 감으며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난 내가 여자인 게 싫었지만 요즘처럼 싫었던 적은 없어.”
“….”
“멘데 가문은 원하는 걸 얻겠지. 하지만 내 손 안엔 뭐가 남을까.”
손바닥에서 상대방의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말을 마친 그녀가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시선이… 이상했다. 이게 친구를 바라보는 시선인가?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나는 그녀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잡은 손을 알레나는 놓아주지 않았다.
“앞으로도 황자와 입 맞춰야 하겠네.”
“….”
“나랑 연습할까? 널 대신해서 입 맞추려면 네가 어떻게 입 맞추는지 내가 알아야 하잖아.”
“무슨 소리야. 재미없어 이런 장난.”
알레나가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잡힌 손목을 흔들었지만 빠지지는 않고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해 봐.”
“….”
“나를 황자라고 생각하고.”
코끝이 닿은 순간, 나는 잡힌 손목 대신 다른 한 손을 휘둘렀다.
손바닥이 상대의 말랑한 볼을 내갈기고 떨어져 나갔다.
퍽 하는 파열음이 조용한 방 안을 갈랐다.
“심한 장난은 장난이 아니잖아.”
손바닥이 홧홧했다.
내게 뺨을 맞은 그녀의 볼이 붉게 부어오르는 모습이 코앞에서 보였다.
내 손바닥이 이렇게 뜨거운 만큼 뺨이 아프겠지.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지.”
홱 돌아간 고개 그대로 알레나는 몸을 일으켰다.
너무 세게 때렸나. 뺨을 때릴 생각일랑 없었는데 너무 놀라서 그만.
하지만 심했잖아. 도가 지나쳤다고.
“내가 지나쳤다. 미안. 쉬어라.”
알레나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
“황자 전하, 부디 걸음을 돌리십시오. 이거 아닙니다.”
“이 방향 맞다.”
이 방향이 피기 란셀롯이 있는 곳으로 가는 방향이다.
옆에 붙어서 따라오며 줄기차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시종을 돌아보지도 않고서 나일은 대답했다.
넓은 보폭으로 걷는 걸음 소리가 3층 복도를 울렸다.
황자가 들리는 족족 제 말을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참다못한 벤자민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
“이 쓸모없는 놈이.”
“아뇨, 전하. 이건 쓸모 있는 행동입니다.”
나일이 미간을 좁혔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가는 행동은 상대를 당황하게 한다길래 참았다.
그런데 여자가 개인적인 일로 궁을 나가버린 것이다.
덕분에 나일은 하루 종일 참아야 했다.
그런데 또 참으라고?
“아침엔 아침의 이유가 있었고 밤엔 밤의 이유가 있는 것이죠. 이 시각에 찾아가는 것은 아침보다 더 실례되는 일입니다.”
“….”
맞는 말이지.
미혼의 영애가 혼자 묶고 있는 방을 이 늦은 시간에 찾아가는 일은 예의를 모르는 자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입을 굳게 다문 나일이 답답한 숨을 콧김으로 내뿜었다.
이쯤에서 정신을 차려볼까?
내일도 아침부터 궁을 나가지는 않겠지, 내일 만나도 못다 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할 얘기가 있길래 이러십니까?”
“그야….”
딱히 할 말은 없지. 음.
다만 이제는 정확히 보이니까.
깨끗하게 보이는 눈으로 여자를 보고 싶었다.
“전하, 여기서 걸음을 돌리시죠.”
“그래.”
긴 3층 복도의 중간에서 정신을 차린 그가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멀리서 스르륵 문이 열리며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알레나 멘데였다.
“쉿.”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주며 나일은 복도가 울리지 않게 살금살금 벽으로 가 붙었다.
제 상관을 따라 시종도 살금살금 움직였다.
“전하, 왜 이래야 합니까?”
“다물어 봐.”
알레나 멘데가 옆방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여자의 방으로 가던 길에 눈이 마주치면 어쩐지 민망할 것 같았으므로, 그저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나일은 벽에 붙어 조용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방 주인은 벌써 잠든 건가?
알레나 멘데가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서성였다.
그러다 문이 열렸는데.
“….”
나일은 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본 것을 확인하려 두 눈을 끔벅였지만, 알레나 멘데의 모습은 이미 방안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방으로 들어가려는 알레나 멘데에게 방문을 열어준 사람.
멘데 영애에게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워낙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일은 보았다.
그 여자였다.
‘피비 셀린.’
녹색 눈동자, 눈부신 금발, 환하게 웃는 얼굴이 다… 그 여자였는데.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격하게 두방망이질해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나일은 옆을 돌아보았다.
“봤느냐?”
“무엇을요?”
피비 셀린 영애를 봤냐고 물어도 이놈은 이해를 못 하겠지.
“금발 말이다. 금발. 방 안에서 문을 열어준 여자가 방금 금발이지 않았느냐.”
시종은 영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이었다.
“란셀롯 영애는 갈색 머리카락입니다, 전하. 저 방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십니까? 방금 전하가 눈에 불을 켜고 가려 했던 곳의 주인 아닙니까.”
“그래, 방금 란셀롯 영애의 방문이 열렸고, 그 방문을 연 여자의 모습이 말이다… 금발이었잖아?”
“…금발이었습니까? 그럼 오늘 궁을 나가서 염색이라도 하고 왔나 보죠.”
나일은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제 시종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어딜 보고 있던 거냐?”
“저도 보고 있었는데, 멘데 영애한테 가려서 잘 못 봤습니다.”
“하여튼 쓸모라고는 없는 놈.”
“….”
시종이 약간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란셀롯 영애한테서 그 여자분 모습이 자꾸 겹치신다면서요. 그래서 그런 거 아닙니까.”
“….”
나일은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만약 그 여자가 살아있다면, 그리고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저 방문 너머에 있다면 그 이유가 뭐지.
자신을 속여 가며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황자 전하, 그렇게 궁금하시면 체면이고 뭐고 가서 문을 두드리시든지요.”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던 나일은 곧 나갔던 제 발을 제자리로 물렸다.
“아니. 됐다.”
실낱같은 바람이었지만 만약 진짜라면, 저 방 안에 있는 게 그 여자라면 그런 식으로 해후할 순 없지.
정말일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나일은 제멋대로 올라가 버리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네 말대로 내일 확인하면 돼.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
한밤중에 나일은 집무실의 불을 밝혔다.
그가 조사를 명했던 관련 서류철이 서랍 안에 가득 들어있었다.
이제 더는 서류를 보는 일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피노 프리지아가 동제국을 떠나 빌론으로 돌아갔다는 날짜가 언제였지.
피기 란셀롯이 수도에 집을 구한 날짜는.
쌓인 서류를 대조하던 나일의 두 눈이 커졌다.
란셀롯 영애가 묶고 있는 숙소는 파베라라는 이름의 여자가 계약자였는데, 날짜가.
‘프리지아 영애가 빌론으로 돌아간 날과 똑같아.’
나일은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대앉았다.
연기가 꽉꽉 들어차 온통 보이지 않는 것뿐이었는데, 가닥이 잡혀가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있지도 않은 프리지아 영애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였던가.
피비 셀린이 호수에서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만약 그 여자가 프리지아 영애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던 것이라면 왜 그래야 했을까.
나일은 문득 서제국의 2황자를 떠올렸다.
‘그 미친놈이 계속 근처를 맴돌았단 말인가?’
그랬다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졌다.
왜 그 여자가 신분을 위장하고 지낼 수밖에 없었는지가.
죽이지 않았으니 놈이 포기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여자를 괴롭힐 수 있었겠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했는데.’
나일은 밀려드는 후회로 괜한 제 허벅지를 때렸다.
그렇게 신분을 위장하고 지내다 여자는 제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러던 중 그녀의 몸에 치료제의 문장이 나타났고, 빌론 곳곳까지 치료제를 찾는다는 소식을 뿌려댔으니 들었겠지.
그래서 동제국에 온 것이리라.
‘나를 치료해주기 위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손바닥으로 눌러 봤자 소용없었다.
그가 또 괜한 제 허벅지를 퍽퍽 때렸다.
아파도 웃음이 나네. 하.
“하하핳… 참나.”
생각할수록 귀엽네.
서제국의 미친놈이 무서워서 계속 신분을 속이고 있는 상태에서도, 자신을 구하고자 동제국까지 온 것이 아닌가.
와 말도 안 된다. 생각할수록 귀엽잖아.
나일은 그녀가 남장을 하고 들킬까 무서워 눈만 땡글땡글 굴리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렇게 겁이 많은데, 그렇게나 겁이 많으면서… 날 위해!
무의식적으로 또 제 허벅지를 강타한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구겨진 인상이 펴지는 것은 눈 깜짝할 새였다.
허벅지가 얼얼한데도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일은 고개를 돌려 집무실 한쪽 벽에 달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놈이 한 명 있었다.
그가 거울을 바라보며 씩 미소지었다.
나일은 일어나 거울 쪽으로 다가갔다.
이리저리 고개를 틀며 제 얼굴을 거울에 비췄다.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을 미남자가 보였지만 어쩐지 안색이 조금 좋지 않았다.
오래 아팠던 흔적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그동안 인생을 비관하느라 술주정뱅이로 산 탓에 낯빛에 생기가 없었고.
훌륭한 이목구비는 어디 가지 않았지만, 살이 조금 빠져 전체적으로 마른 듯한 인상이 되어 있었다.
‘술 그만 마시고 잘 먹어야겠군.’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거울 보기를 마무리하고 자리로 돌아오던 나일이 뚝, 그 자리에 멈췄다.
‘잠깐만 그런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