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72)화 (72/134)

72화

‘깨끗하게 보인다.’

나일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 손가락 끝 마디의 지문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눈 상태가 시력을 잃기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살펴보던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진짜 치료제.’

추정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물론 이변이 없을 거라 예상했지만 확신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었는데.

그의 치료제는 피기 란셀롯 영애가 맞았다.

몸 상태가 놀라울 만큼 좋았다.

근 몇 년간 이렇게까지 상쾌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나.

스킨쉽이 짙을수록 효과가 좋다더니 키스 한 번으로 이렇게….

‘키스.’

생각 나버린 한 단어에 나일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뒤덮였다.

어젯밤 란셀롯 영애와 입맞춤을 했고, 입맞춤을 하다가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계속하다가 어떻게 되었더라…?

나일이 제가 반대로 누워있었다던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침에 어떻게 누워있었다고?”

“어… 어떻게 계셨냐면.”

제 물음에 벤자민이 침대로 다가갔다.

직접 재연해 볼 생각인가.

엉금엉금 침대 위로 올라간 시종은 굉장히 바보 같은 자세로 엎드려 누웠다.

“아침에 내가 그 상태였다고?”

“예, 전하.”

“그래, 알았으니 내려와. 머리 두는 곳에서 당장 발 치워.”

“….”

까득.

나일은 엄지손톱을 가볍게 깨물었다.

키스가 좋았다.

입맞춤이 좋았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것이 있었는데 내가 왜 여태 안 하고 살았던 가에 대해 고찰할 수 있을 만큼 좋았다.

닿자마자 좋았다.

닿는 순간, 말로 다 못할 황홀감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거다 싶었다. 그런데.

‘하다가 잠들었다고….’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시종은 침대에서 내려오며 바보 같은 얼굴을 했다.

“예? 전하가 뭐요?”

“….”

나일은 거칠게 제 턱을 쓸었다.

시종의 말에 의하면 아침에 방에 들어왔을 때 방 안엔 자신 외엔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영애는 언제 방을 나갔단 말인가.

“경비병을 들어오라고 해.”

야간 경비를 섰던 경비병이 방에 들어온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교대 근무자와 교대 후 자러 갔던 그는, 잠에서 반쯤 덜 깬 모습으로 나일의 앞에 와 섰다.

“어제 이 방을 나갔던 자가 있을 거다. 그게 언제쯤이지?”

경비병이 우물쭈물 눈치를 슬슬 보며 대답을 했다.

“그때가 아마… 새벽 두 시쯤 되었던 거 같습니다.”

그럼 그와 단둘이 이 방에 있던 영애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가버렸다는 말인데.

“나갈 때 표정이 어땠지.”

“표정이….”

바로 어젯밤의 일인데도 기억이 가물가물한지, 경비병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늦은 밤에 수고가 많다고 하셨고….”

“또.”

“또, 아… 활짝 웃으면서 황자 전하께선 주무신다고 하시더니 가셨습니다.”

- 쿵

경비병의 말에 나일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순간 몸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나일은 테이블을 한 손으로 쾅 내려찍으며 몸의 중심을 잡았다.

‘웃으면서… 주무신다고.’

그 웃음이 과연 어떤 웃음이었을까.

정말 아무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짓곤 하는 일상적인 웃음?

그럴 리가.

자신과 입 맞추던 남자가 도중에 잠들어버리는 일이 과연 일상적인 일인가.

아마 그 웃음은 비웃음, 또는 어이없는 웃음이었으리라.

나일은 테이블 옆 의자에 주저앉았다.

“전하, 오늘 몸 상태 엄청 좋으시다면서요.”

나일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황자가 왜 저럴까, 라는 표정으로 서 있는 경비병을 방 밖으로 물렸다.

“벤자민.”

그가 시종의 이름을 불렀다.

“예, 전하.”

이걸 물어봐야 하나, 입을 오물거리던 나일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입, 입 맞추던 상대방이… 입 맞추다가 잠들면 상대방은 어, 어떤 기분일까.”

그로서는 심각한 질문이었는데, 듣는 벤자민의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아~ 이제 이해가 되네. 아까 일어나시자마자 무슨 키스 어쩌구 하시더니 키스하다 조는 꿈이라도 꾸신 겁니까?”

“그, 그래.”

나일은 괜히 제 볼을 긁적였다.

시종은 마치 자신이 선배라도 된 것처럼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는 연애도 해본 적 없으시고, 키스 경험도 없으시니… 스킨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꿈을 꾸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원래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

“하지만 전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닥치면 다 잘 하게 되실 거예요.”

하지만 닥쳤을 때 자버린 인간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여하튼 전하, 해보기도 전에 그런 걱정은 사서 하지 마십시오. 키스하다 자버리는 머저리는 흔치 않으니까요.”

“후….”

시종은 나일이 안심하라는 듯 발랄하게 웃었고, 나일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나일이 다시 힘겹게 입술을 뗐다.

“만약 있으면? 그런 머저리가 있으면 상대방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만날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그쪽은 쳐다도 안 보겠죠. 하하하.”

벤자민이 해맑게 웃었다.

얼굴이 흙빛이 된 나일은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입맞춤이 너무 좋아서 그는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급격하게 나른함이 몰려들었다.

치료제와 닿고 나면 늘 있던 기분 좋은 나른함이었다.

그 순간 나일은 지금 입 맞추고 있는 이 영애가 역시 치료제군, 생각했고.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그때 잠든 거군.’

몰려드는 나른함이 치료할 때마다 나타나는 증상이라면 나일에겐 죄가 없었다.

하지만 그 영애는 이걸 알 턱이 없는데.

“하지만 그 머저리가 졸 수밖에 없었던 어떤 불가항력의 사정이 있었다면?”

“아직도 그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시종이 조금은 의아한 얼굴로 나일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뭐… 그냥 사정 있는 머저리가 되는 거겠죠.”

사정 있는 머저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사정 있는 머저리의 두 번째 고민이 시작되었다.

옷을 갈아입은 나일은 고급스러운 정복 차림으로 방 안에 서 있었다.

카페트 위를 우왕좌왕하던 나일은 방문을 향해 돌아섰다.

시력이 완벽히 돌아온 지금, 시종의 부축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어디 가시게요?”

“피기 란셀롯 영애의 방으로. 거기 있겠지?”

“물론 거기 계시겠죠.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이른 시각인데요.”

쯧.

나일이 짧게 혀를 찼다.

“영애 혼자 방에 있을 텐데, 전하께서 방문하시기엔 너무 빠른 시각입니다. 아직 단장도 끝내지 않았다면 굉장히 민망해할걸요?”

“후우….”

그의 치료제는 신원이 확실치 않았다.

신원을 감추고 있는 것과 자신이 치료제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

이 두 가지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방 안에 단둘이 되었을 때, 은밀히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나일은 그녀에게 어떻게든 정보를 얻어내려 했는데.

얻어내긴 무슨.

입맞춤에 정신이 팔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게 다 그 영애에게서 자꾸만 그 여자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갈색 머리가 보이는데도, 나일은 그녀를 자꾸 그 여자로 착각했다.

왜지.

나일은 제 옆에 서 있는 벤자민에게 눈을 돌렸다.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안타깝게도 물어볼 사람이라곤 저놈뿐이었다.

“벤자민.”

“예, 전하.”

“분명히 다른 여자인데, 같은 여자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뭐지.”

“하핫.”

시종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전하 취향이 대쪽같아서 그런 겁니다.”

“취향이 대쪽 같아?”

“예. 저도 늘 단발에 손이 예쁜 분만 만나는데요.”

상대방은 간단한 문제로 치부하고 말하는데, 나일은 어째선지 그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피기 란셀롯 영애의 신원 파악은 아직인가?”

“예. 진행 중이니 곧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래. 알았다.”

*

‘몸 상태가 왜 이렇게 안 좋지.’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 오래 푹 잔 것은 아니었지만, 황자방에서 돌아와 충분히 숙면을 취했는데도 몸 상태가 마치 한 시간 겨우 자고 일어난 것처럼 찌뿌둥했다.

가까스로 세수하고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단장하던 나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하녀의 놀란 목소리를 들었는지, 옆방에 있던 알레나가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너 왜 이래? 열 있는 거 같은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갑갑해.’

조이는 옷도 다 벗고, 차고만 있어도 피로하게 만드는 이 목걸이도 좀 벗었으면 좋겠는데.

크게 아픈 건 아니니 그저 조금 쉬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미안해. 오늘 황자 전하 접견은 다른 사람이랑 같이 들어가 줄래.”

“알겠으니까 일단 눕자.”

알레나가 날 부드럽게 들어 올려 침대에 눕혔다.

“누가 물어보면, 아프다는 말은 말고… 그냥 어디 갔다고만 말해줄래?”

혹시 병문안이랍시고 사람들이 이 방을 들락날락한다면, 온종일 목걸이를 하고 있어야 할 테니까. 그건 누워있어도 쉬는 게 아닐 것이다.

“그래, 알겠어.”

걱정하는 친구를 위해 웃음을 지어 보인 나는 아주 잠깐을 고민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레나야. 이따 황자와의 접견 때 말이야.”

“응.”

“손잡는 것 외에 다른 걸 해줄 수 있을까?”

“다른 걸? 뭘?”

나는 어젯밤 황자와 입 맞췄다.

입맞춤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황자에게선 별 차도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다행히, 이전까지와는 대비되는 차도를 황자가 보인다면.

알레나와 행한 것이 늘 손잡는 것에 그쳤는데 갑작스럽게 차도가 생긴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포옹… 같은 거?”

“너 설마 어제….”

알레나가 미간을 좁혔다.

나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지 뭐야. 하핫.”

왜 이렇게 쑥스럽냐 이거.

나는 괜한 팔뚝을 벅벅 문질렀다.

“네가 어렵다면 어쩔 수 없는데, 할 수 있다면 해줬으면 해.”

“….”

음, 아무래도 스킨쉽을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갑작스러운 내 요청에 알레나는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뭘 했는데 황자랑.”

“음, 네가 포옹 정도만 해주면 비슷할 거 같은데….”

나 키스했어, 라고 말하기가 왜 이렇게 낯뜨거운지.

대충 얼버무리며 말을 흘렸다.

눈치 빠른 녀석이니 이해했겠지.

어색한 웃음을 흘린 나는 쉬고 싶다는 의미로 팔을 저었다.

“나 이제 쉴래.”

“……알겠어. 푹 쉬어.”

이마에 닿는 알레나의 손이 시원했다.

문이 철커덕 잠기는 소리와 함께 목걸이를 빼 화장대 위로 던졌다.

*

눈을 떴을 땐, 이미 늦은 밤이 되어서였다.

오늘 하루 별일이 없었는지 알레나에게 물으러 가야 했지만, 아직도 몸은 침대랑 더 붙어있으면 싶은 모양이었다.

온종일 잤는데도 졸리네, 열은 다 떨어진 것 같은데….

- 똑똑

“나야.”

알레나의 목소리였다.

아, 문 잠가놨는데.

들어오게 하려면 일어나서 문을 직접 열어줘야 하는데.

“레나야 너 힘 세잖아. 문 발로 차면 열리지 않을까?”

“뭐?”

“나 기운이 없어서 못 일어나겠어.”

“….”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 문 앞에 서고 보니, 화장대 위에 놓인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몇 시지.

밖에 나갈 것도 아니고 문만 잠깐 열고 말 거니까.

나는 목걸이를 착용하지 않은 내 본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너.”

“뭐해, 들어와 빨리.”

문 닫아야 하는데 왜 그러고 서 있냐. 

오랜만에 내 원래 모습을 보고 놀라 서 있는 알레나를 방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테이블로 가 앉는 것을 보며 나는 다시 침대 위로 엎어졌다.

“좀 괜찮은 거야? 약 두고 갔는데 먹었어?”

“응. 기운 없는 거 빼면 열은 다 내린 것 같아.”

알레나는 의자를 침대 곁으로 끌어다 앉았다.

그녀가 내 머리를 살갑게 쓰다듬었다.

“야 쓰다듬지 마.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그렇게 쓰다듬으면 나 잘지도 몰라.”

“들으면 좋아할 소식 있는데.”

부드러운 손길에 눈이 감겼다.

반쯤 감은 눈으로 말했다.

“그럼 빨리 말해. 나 잠든다.”

“황자 말야. 갑자기 시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대.”

“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