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그의 몸이 스르륵 내 쪽으로 기우는 바람에, 나는 자연스럽게 등을 침대에 대고 누웠다.
이것은 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좋겠냐는 무언의 신호인가.
결재 허가한다, 진행하라.
“….”
허가한다고. 진행햇!
그러나 황자는 내 위로 엎어진 채 말이 없었다.
그저 내 어깨와 얼굴 사이로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이분 설마, 이 다음 상황은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모르시나.
“훗.”
부끄럽고 민망할 수 있지. 암.
그가 다소 서툴더라도 나는 귀엽게 봐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리드를….
나는 남자의 목덜미로 부드럽게 손을 집어넣었다.
“저기요 황자 전하.”
“….”
“고민 중이시면 이번엔 제가 기다려 드릴 수 있어요. 시간 넉넉히 드릴게요. 후훗.”
“….”
“…전하, 기다리는 건 괜찮은데 대답은 해주시겠어요?”
대답을 하라 이 말이야, 왜 말이 없는가.
아무 소리도 내질 않는 남자가 이상했다.
“전하?”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려 엎드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꺼풀은 곱게 감겨 있었다.
“…?”
혹시 죽은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남자의 감겨 있는 눈을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바로 확인해 본 나일의 등은, 들숨과 날숨으로 평안하게 오르내리고 있었기에 죽은 것은 아니었다.
열정적으로 입맞춤을 나누던 남녀에게 벌어질 일로 더 황당한 것은 무엇일까.
하나, 남자가 갑자기 여자 위에서 사망한다.
둘, 남자가 갑자기 여자 위에서 잔다.
나는 차라리 1번이 더 개연성 있다고 본다.
아니 지금 어디서 잠을 자, 어? 어떻게 나랑 키스하다가 잠을 자. 왜 잠을 자.
“후….”
깨울까.
아니 깨워서 뭐라고 할 건데.
님 왜 저랑 입 맞추다 자요? 라고 물을 거야?
그럼 황자가 “하다가 졸리던데. 잠이 오길래 잤어.”라고 하면 뭐라고 대꾸할 건데.
“아, 그러셨구나.” 할 거야?
굳이 깨워서 나는 즐거웠던 입맞춤이 남자에겐 지루한 일이었다, 라는 사실을 확인사살 받고 싶어?
“하핳…하핳핳….”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웃느라 아래에 있는 내 몸이 들썩거리는데도 잘만 자는군.
정말 잘 자. 그래.
잠든 남자의 머리카락을 한 개씩 뽑으면 몇 개를 뽑았을 때 이 사람이 일어날까?
네놈이 대머리가 된다면 그 죄는 너에게 있겠지.
허황된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다 포기하고 몸의 긴장을 풀었다.
나도 모르게 그와 스킨쉽을 하느라 온몸에 바짝 긴장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팔다리를 쭉 뻗고 늘어지자, 인지하지 못 했던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잘 자네.”
몸 위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무게가 묵직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자세, 겨울 호수에서의 그 날을 떠올리게 하는 자세가 아닌가.
내 대신 화살을 잔뜩 맞고, 정신을 잃은 채 나를 감쌌던.
입 맞추다 좀 자면 어떠한가.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살폈다.
손 둘 곳 없이 남자의 등에 꽂혀 있던 화살은 이제 없었다.
잘 자고, 건강히 일어나기만 해주면 돼.
그를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남자의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내 몸을 울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으려나.
하고자 했던 일도 달성했고, 황자도 깊게 잠든 모양이니 이제 일어나 볼까.
기분 좋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꼭 안았다가 가야지.
부드러운 그의 볼에 내 볼을 비볐을 때였다.
- 도망가.
“…!”
급하게 몸을 빼낸 후, 황자의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방 안 공기가 급격하게 싸해진 기분이었다.
‘여자 목소리가 들렸는데.’
한 마디의 짧은 말이었지만 분명히 들렸다.
도망가라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혹, 방안에 누가 들어온 것인가 살폈지만 방문은 닫혀 있었고, 잘못 들었다 여기고 넘기기에는 지나치게 또렷했다.
‘귀신인가.’
좀 전에 귀신이 나오는 동화를 낭독한 탓인가.
자연스럽게 생각이 귀신으로 미쳤다.
귀신이면 또 어떤가, 귀신이 뭐 무서워?
키스하다가 잠든 놈보다 더 무서워?
“….”
별일 아니겠지.
나는 잠든 나일을 내려다보았다.
베개도 없이 자는 게 영 불편해 보이는걸.
그의 머리 밑으로 베개를 밀어 넣은 나는 남자의 볼에 가볍게 입 맞췄다.
황자 방의 문을 열자, 아까 보았던 경비병이 반듯한 자세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늦은 밤에 수고가 많으세요.”
“헉.”
나를 확인하는 경비병의 눈이 세로로 길게 벌어졌다.
야심한 시각, 황자의 방에서 웬 영애가 웃는 낯으로 나오니 놀랐겠지.
“전하는 주무세요.”
“아? 아, 예.”
“그리고….”
입에 손을 대고 목소리를 낮추자, 자연스럽게 경비병이 내게 귀를 가져다 댔다.
“경비병은 저를 못 본 겁니다. 저도 아까 경비병을 못 본 것처럼요.”
“엇… 예예.”
그가 몇 번씩이나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았다.
황자와 그 영애가 밤에 그랬다더라.
소문이 나도 문제 될 건 없겠으나, 할 수 있다면 일단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그럼, 마저 수고하세요.”
“예.”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나가다 중간쯤 뒤를 돌아보았다.
황자 방의 화려한 겉문이 보였다.
오늘 특별한 일이 있었던 만큼, 그의 증상에 차도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오늘 밤을 넘기면 뭔가 들리는 소식이 있겠지.
*
벤자민은 늘 같은 시각에 눈을 떴다.
푸른 새벽빛이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각에 일어난 만큼, 조금은 침대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법한데.
그는 지체하는 법이 없었다. 왜냐.
자신은 동제국의 유일한 황자, 곧 미래의 황제가 총애하는 시종 벤자민 스퀫이 아닌가.
늘 너 같은 놈은 쓸모없다, 필요 없다 하시지만. 그건 황자 전하의 귀여운 말버릇일 뿐이다.
게다가 정말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놈에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하의 옆을 지키려면, 잠 한숨 정도는 포기하더라도 몸단장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나일 리베르 황자 전하가 누구신가.
엄청 깔끔한 성격이셔서, 조금만 땀 냄새가 나도 “당장 씻고 와, 이 자식아!”라며 호통을 치셨다.
또 저번에는 어땠던가.
턱에 수염이 별로 안 자랐길래 이 정도면 멀끔하네, 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출근했던 날이었다.
전하를 보필하던 와중 발이 꼬여버렸다.
넘어지다가 황자 전하의 볼에 수염이 난 제 볼을 비벼버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얼마나 치를 떠시던지, 정말 벤자민은 다시 생각해도 전하의 그 얼굴은 너무 하셨어! 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수염이 까칠한 거야 당연한 게 아닌가.
더러운 건 아닌데….
여하튼 그러한 이유로 벤자민은 오늘도 총애 받는 시종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면도에 공을 들였다.
전하는 시력을 잃은 신 후로는 늘.
- 너 내가 안 보인다고 면도 깔끔하게 안 하고 다니지.
라는 말을 달고 사셨다.
저를 뭐로 보시고 정말.
벤자민은 고개를 이리저리 꺾어가며 부드러운 거품을 긁어냈다.
황자 전하의 방으로 향하는 익숙한 복도를 걸었다.
그의 아침 임무 중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전하의 상쾌한 기상이었다.
오늘도 나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전하를 기분 좋게 깨워 드려야지, 다짐하며 벤자민은 목을 가다듬었다.
전하의 방 앞에 늘 보던 얼굴이 보였다. 경비병 제크였다.
어라? 그런데 늘 보던 그 얼굴이 오늘은 좀 미묘했다.
어딘지 모르게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굳어 있는 꼬라지가….
“너 이 자식, 또 술 마시고 경비 섰냐?”
“아, 아니야~”
“그런데 얼굴이 왜 사기 치다 걸린 놈 같은 표정인데.”
“아니라고~ 아~ 들어가.”
“….”
코를 킁킁댔으나 술 냄새가 느껴지진 않았다.
영 미심쩍은데 증거가 없네.
경비병 제크는 든든한 체격을 가졌고, 검술 실력도 제 또래 중에서는 훌륭한 편이었고, 무엇보다 야행성이라 밤에 조는 일 따위는 없어 야간 경비로 쓰기에 적합했지만.
딱 하나, 아주 큰 단점, 술을 너무 좋아했다.
부단장에게 말해서 빨리 갈아치워 달라고 말을 하든지 해야지 원.
어떻게 황자 전하의 침소를 지키는 놈이 저리 소명 의식이 없단 말인가.
벤자민은 제크에게 눈을 흘기며 문을 열었다.
“전하, 좋은 아침입니다.”
우렁차게 외쳤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늘 그랬다.
침대의 캐노피 커튼을 걷어야만 전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벤자민은 우선 창가의 커튼부터 묶었다.
캐노피 커튼이 드리워진 침대 앞에 서서 벤자민은 얼굴 근육을 풀었다.
밝고 활기찬 표정, 아름답게 올라갔을 입꼬리를 신경 쓰며 벤자민은 캐노피를 걷었다.
“황자 전하?”
커튼을 걷었을 때 벤자민의 눈에 들어와야 할 장면이란, 미라처럼 반듯하게 누워있는 황자 전하였다.
그는 자는 모습도 단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분은 뉘시란 말인가.
벤자민은 머리를 두어야 할 곳에 발이 가 있고, 발을 두어야 할 곳에 머리가 가 있는 자신의 황자 전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하, 왜 반대로 누워계십니까?”
벤자민의 말에 감겨 있던 황자의 눈이 뜨였다.
그리고 몇 번 눈을 끔뻑거린 황자의 얼굴이 곧 하얗게 질리는 게 아닌가.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다급한 표정으로 방안을 두리번거린 황자는 벤자민을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올려보았다.
“키스하던 중이었는데… 왜 네놈의 얼굴이….”
헤에엑.
놀란 벤자민이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꿈에서 저랑 키스하셨다고요?”
“….”
“전하의 총애가 그런 총애였다니… 저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가슴에 손을 올리고 쳐다보니, 전하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 쓸모없는 원숭이 놈이… 그 입 다물어라.”
몸을 일으켜 앉은 황자는 머리가 아픈 듯 이마에 손을 괴더니, 여전히 무언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하다가… 몸이 점점 나른해진다고 느꼈고… 그런데 아침이라니.”
전하가 아프신가?
요즘에 악몽은 더 안 꾸신다 하였는데.
벤자민은 염려되는 얼굴을 황자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런데 너….”
저를 보는 황자의 시원한 입매가 부드럽게 솟구쳤다.
아, 제 주인의 잘생긴 미소였다.
“내가 앞을 보지 못 할 때도 면도를 깔끔하게 하고 다녔구나. 칭찬해주마.”
“당연히 늘 신경을 썼지요. 무슨 그런 속상한… 전하?”
지금의 시력으로는 보이지 않으실 텐데.
“보이시는 겁니까?”
벤자민은 뒷걸음질 쳐 벽에 가 붙었다.
“여기서도요? 여기서도 제 깨끗한 턱이 보이십니까?”
황자의 눈이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그래. 잘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