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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70)화 (70/134)

70화

‘술이라도 한잔 먹일까.’

동화 2부의 막을 올리려 하는 나일의 눈빛은 지나치게 초롱초롱했다.

나긋나긋 동화 낭독으로 후딱 재운 후 입 맞추고 나가려 했는데, 어째 점점 가능성은 줄어만 갔다.

나는 빈 잔에 브랜디를 왕창 부었다.

“황자 전하. 이야기를 해주시기에 앞서 목을 축이시면 좋지 않을까요. 이야기가 술술 나올 거예요.”

그의 앞으로 찰랑거리는 술잔을 내밀었지만,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됐어. 향이 좋은 술이니 그대가 마셔. 많이는 말고.”

“예.”

오늘은 글렀군.

투명한 호박색 술잔을 바라보며, 오늘 밤 그에게 입 맞추겠다는 다짐을 술잔에 말았다.

비싼 술이라서 그런가, 희박한 가능성을 몽땅 말아버려서 그런가.

혀에 달라붙는 술은 독했지만 뒷맛이 좋았다.

“어렸을 때 유모에게 들은 거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낭독자에서 청중으로 바뀐 나는 의자에 두 발을 올린 후, 무릎을 감싸 안았다.

“음.”

부스럭대는 옷자락 소리가 그에게 들렸나 보다.

나를 빤히 보던 그가 근처의 쿠션을 집어서 내게 내밀었다.

“자.”

“감사합니다, 전하. 역시 사려가 깊으십니다. 헤헤.”

광이 나는 실크로 짜인 쿠션을 받아들며 넙죽 웃었다.

“이런 게 사려 깊은 건가.”

“그렇죠. 같이 있는 상대가 불편할까 신경 써주시는 거니.”

“그래? 그럼 아예 침대로 올라오지그래. 그 의자보다 편할 텐데.”

나는 쿠션을 품에 안고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이게 백 프로 농담인가, 약간의 진심이라도 담긴 말인가.

불쾌했다.

불쾌할 필요 없는 일이다, 그리 생각하고 넘어가려 해도 목에 가시가 콱 걸린 듯 넘어가 지지 않았다.

“2부가 궁금하긴 한데, 전하의 침대 위에서 들어야 한다면 사양하겠습니다.”

쿠션을 그의 앞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너무 멋대로 구는군.”

일어선 채로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그가 말을 이었다.

“그대가 나를 위해 낭독을 해주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들어주고 싶어. 내게 원하는 바가 있지 않나.”

“….”

“내 방 근처를 서성인 것도 그래서라고 생각하는데, 착각인가.”

원하는 바.

남자가 말한 달콤한 두 단어를 속으로 발음했다.

그러나 속뜻은 그리 달콤하지 않은 것이리라.

늦은 밤, 황자의 방 근처를 서성이는 영애가 원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방금 그가 말한 대로 황자의 침대 위로 오르는 일이 아닐까.

그는 내 의도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야말로.

‘나쁘지 않아.’

그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대상이 되어, 오늘 밤 그와 몸을 섞는 것.

분명 나쁘지 않았다.

잠든 상대에게 몰래 키스하고 도망간다는 계획보다 훨씬 실현 가능성이 농후한 선택지가 아닌가.

어쩌면 ‘이게 웬 떡이냐. 상대가 던지지도 않은 미끼를 물다니.’ 하며 반겨야 할 상황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이렇게

‘불쾌하고 내키지 않지.’

아냐. 불쾌하고 내키지 않는다는 내 기분 보다,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자.

여전히 그가 앞을 보지 못하고 치료에 진전이 없는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 마음먹었어.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올라, 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았으면 됐는데.

동화를 읽는 내내 턱 아래서 들끓던 말을 결국 하고 만 것이다.

“전하.”

“응.”

“제가 황자 전하의 유일한 상대가 아닌 건 상관없으나, 적어도 침대에 오르라는 말을 하기 전에 침대 시트는 새로 가세요. 새로 갈아줄 하녀가 옆에 없었나요? 그럼 있을 때로 미루세요.”

“….”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니.

가만히 앉아 있는 남자를 코앞에 두고, 나는 옆에 놓아두었던 술잔의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흔들리는 정신을 붙들어 맸으나, 곧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나일은 편하게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었고, 나는 무릎을 대고 앉아 있었기에 내 얼굴이 위치가 약간 더 높았다.

나는 위에서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복잡한 내 속과는 다르겠지.

“….”

움푹 들어간 허리를 옭아매는 남자의 손길이 느껴지자, 긴장으로 허리가 꼿꼿이 섰다.

그가 그곳에 편안히 제 양손을 두었다.

‘언제 이렇게 능숙해졌지.’ 

이 남자가 이렇게 능숙한 캐릭터였던가, 라는 의문이 스쳤지만 나는 그 생각을 고이고이 접어 내던졌다.

그가 능숙하든 어설프든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얌마 나도 능숙하다.

실행을 못 해봐서 그렇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것만 치면 그게 얼만데.

거의 준 프로급이라고.

나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턱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가 순순히 내 손길에 저를 맡겼다.

내 손길에 의해 들어 올려진 남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니… 이분 안 보이는데.’

보지 못 하는 상대방의 시선이 나를 바짝 옥죄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한 손으로 그의 눈가를 덮었다.

그러자 그 행동의 이유를 잘 알겠다는 듯이 남자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오센 왕녀가 멋대로 내 방에 들어온 거다. 왕녀와는 아무 일도 없었어.”

그 말에 등신같이 내 심장이 쿵쿵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부터 이미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그렇, 그렇구나.”

“그러니까 날 얼굴도 보기 싫은 사내쯤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내 눈을 가린 이 손은 좀 치워주는 게 어때.”

눈을 가린 상태니, 반쯤 얼굴이 안 보이는 상태였음에도 남자가 조금은 즐거워하고 있다는 게 얼굴의 반에서 느껴졌다.

내가 어설퍼서 재밌냐, 이 자식아.

“전하, 죄송한 말씀인데 어차피 안 보이시잖습니까.”

“안 보이니까 가릴 필요도 없잖아. 답답해.”

남자의 요청에 결국 나는 그의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그는 무엇이 즐거운지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이러다 밤 새겠어.”

도발이냐.

나를 깔보는 도발에 응수하려면 능숙한 입맞춤을 선사해주어야겠지만.

현실은 자꾸 고이는 침을 삼키며 그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굴려댈 뿐이었다.

“이상해. 분명 보이지 않는데, 내 시선을 피해 그대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실세계의 눈 대신 마음의 눈을 가지셨으니 저는 전하가 부럽네요.”

“진짜라는 소리네. 안 보이는 사람이라고 눈도 맞춰주지 않는 건 정말 너무하잖아.”

“….”

이 남자 진짜 앞이 안 보인단 말인가?

시력 대신 나머지 감각이 발달해서 그런가.

나는 한가득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오해를 풀어줬으니 침대 시트는 신경 쓰지 말고 하려던 걸 계속해줬으면 하는데.”

“….”

“오늘 안에 가능할까.”

“아, 가능하…!”

하려던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시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나보다 아래에 있는 그가 자꾸 위로 나를 올려붙이기에, 놀란 내가 침대에서 무릎을 펴려 했지만.

내가 일어서지 못하게 남자의 양팔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 힘에 의해 점점 내 몸이 아래로 끌려내려 갔다.

“잠….”

잠깐, 잠깐이라고요.

숨을 쉬고 싶다고요.

말하려 했지만 그럴 여유 따위 주지 않겠다는 듯 맞닿은 입술을 겹쳐오는 상대 때문에, 결국 숨도 말도 안쪽에서 맴돌 뿐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입은 막혔으나 코는 뚫려있으니, 멀쩡히 뚫린 코로 숨 쉬면 되는 일이었건만.

나는 왜 그 순간, 평소엔 하지도 않던 구강호흡을 강렬히 원했던 걸까.

그가 잠, 까지만 외쳤던 내 목소리를 들었나 보다.

내 뒤통수를 감싸 안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길래 나는 재빨리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남자의 입술은 글로시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거 내가 만든 윤기인가.

나는 그것을 보기가 매우 민망해져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기다려 주시면 제가 할 수 있었는데요….”

남자의 엄지손가락이 내 입술 위를 문지르고 지나갔다.

“참을성 없는 남자라 미안.”

“….”

“혹시 싫었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당황스러움과 싫음을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건 상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당황스러움일 뿐이지 싫은 건 명명백백 아니었다.

“그냥… 입맞춤하는 동안에는 원래 이렇게 입으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느라.”

흘러내리던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던 그가 픽 웃었다.

“미안. 그건 잘 모르겠어. 난 그냥 자연스럽게 숨이 쉬어졌는데.”

그러니까 당황스러워 한 건 나 혼자였다는 소리였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 알겠다. 천천히 하면 될 거야. 그게 문제였던 것 같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 뒷목을 다시 잡아끌던 그가 행동을 멈췄다.

끌려가던 나는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가 코와 입으로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뭐야, 자기는 자연스럽게 쉬어진다며.

“다시 할 생각인데, 이번에라도 그대를 기다릴까.”

“….”

내 대답이 얼굴에 써 있냐.

내 얼굴을 보다 보면 답을 알 수 있을 거란 확신이라도 있는지, 그의 까만 눈동자가 내 눈코입을 연신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생각 중이야?”

“….”

“생각 중이면 기다리고, 아니라면 말해 줘.”

난 생각 중인가?

생각 중이긴 한데, 내가 먼저 리드할 수 있는지가 아닌, 남자의 시선이 어째서 이리 정확한지에 대해 생각 중인데.

이걸 생각 중이라고 말해야 하나.

“어… 생각… 해 볼게요.”

“….”

“….”

“끝났어?”

“아뇨.”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 그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나일은 눈썹이 참 예쁘게 났다.

말 안 듣고, 혼자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놈 없이 모든 눈썹이 바깥 방향으로 가지런했다.

나는 나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엄지손가락으로 예쁜 눈썹을 쓸어 넘겼다.

엄지손가락 밑에서 남자의 단단한 눈썹뼈가 느껴졌다.

“전하는 눈썹뼈가 예뻐요.”

내 말에, 그가 미간을 구기는 바람에 눈썹이 미간으로 몰렸다.

엄지손가락 아래서 움찔거리는 눈썹의 움직임이 재미있었다.

“설마 지금 하는 생각이 그 생각이야? 아니라고 말해 줘.”

“예뻐요. 전하. 다른 사람이 만졌다고 생각하면 속에서 질투가 일 만큼.”

“….”

“다른 사람도, 전하도, 그리고 저도 속여넘기고 싶었는데… 망했어요. 저는 영원히 당신의 연인을 질투하게 되겠죠.”

정말 망했어요.

저는 사랑을 쟁취할 능력도 용기도 없는데.

능력 밖의 것을 탐하면 인생은 고통뿐인데.

다시 봐도 너무 예뻐서 계속 탐하고 싶어지니까요.

시선을 내렸다.

그의 도톰한 입술이 살짝 열려 있었다.

“생각 다 했어요.”

기다리고 있는 입술 위로 나는 내 입술을 포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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