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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69)화 (69/134)

69화

신기하네.

황자의 방은 3층의 천장을 허물어 4층까지 뚫려있는 구조였다.

목을 꺾어야만 4층 천장 가운데 달린 샹들리에를 볼 수 있었다.

마나 전구 수십 개가 달린 샹들리에는 아마 가까이서 봤다면 눈이 부셔 눈을 감아야 했겠지만.

워낙 높은 위치에 달려 있는지라, 3층 방안의 조도는 은은하기만 했다.

“큼큼.”

괜히 목을 한 번 가다듬은 후, 이번에는 눈앞에 보이는 2층 높이의 책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등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뜨거웠다.

이게 다 대뜸 방에 불러 놓고 말없이 앉아 있는 저 남자 때문이었다.

“큼.”

할 말이 없으면 돌아가라고 말을 하든가.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돌아보자, 침대에 걸터앉은 황자 전하께서 이곳을 아주 유심히 바라, 아니 노려보고 계셨다.

쟤 뭐야, 왜 보이는 것처럼 쳐다봐.

나는 그 시선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방이 좀 건조한가.”

“….”

“물은 없고 이리 와서 브랜디라도 한 모금 해.”

“예. 전하.”

넙죽 대답은 했지만 그쪽으로 가진 않았다.

밀폐된 공간 안에 단둘이 있는 게 얼마 만인지.

늦은 밤, 밀폐된 공간, 단둘. 이 세 단어가 나를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가가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허읍.

그도 그럴 게 황자의 차림새가 참으로 야시꾸리했으므로.

허리에 묶인 허리끈을 살짝만 당기면 술술 풀어질 옷 따위를 왜 잠옷으로 입고 있는 거람.

잘 때 벗고 자나? 하긴, 몸에 열이 많은 것 같더라니.

“예, 전하라고 대답을 했으면 와야지.”

“아.”

그의 말에 나는 책장에서 아무거나 책을 한 권 빼 들었다.

“잠이 솔솔 오게 책 낭독해 드릴게요. 책 한 권만 골라서 가겠습니다.”

눈이 안 보인다고 무턱대고 입술을 갖다 댈 수는 없으니, 재운 후에 잠이 들면 몰래 뽀뽀를 하겠다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여기 있는 책은 다 읽으신 건가요?”

그에게 질문하며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빼낸 책의 표지를 살폈다.

두툼한 양장본엔 제목이 없었다.

‘무슨 책이길래.’

“읽은 것도 있고, 읽으려고 꽂아 두었다가 그대로 먼지만 쌓인 것도 있고.”

책의 중간쯤을 펼치자, 어린아이가 쓴듯한 삐뚤빼뚤한 글씨가 보였다.

큼지막한 글씨 몇 개가 모여 몇 줄의 단순한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황제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널 사랑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나는 기뻤다. 어머니께서 내게 늘 화내셨던 이유를 알았으니까.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버지께 달려가 말해야지. 어머니를 사랑해 달라고.

-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그 여자가 네게 그리 말하더냐 하시며 화를 내셨다. 화난 얼굴로 어머니께 가시는 아버지를 붙잡았다.

아버지 가지 마세요. 어머니께 화내지 마세요. 저는 어머니께 사랑받고 싶은걸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크고 따듯한 품으로 나를 안아주시며 말씀하셨다.

어머니라고 해서 무조건 사랑해줄 필요는 없단다 아들아. 하지만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 나는 어째선지 눈물이 멈추지 않아 아버지의 품을 다 적시고 말았다.

황제와 황후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 일기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뻔해서, 나는 급하게 책을 접어 있던 자리에 밀어 넣었다.

“신중하게 책을 고르는군. 그대가 책을 골라오면 낭독을 들을 대상은 이미 잠에 빠져 있겠어.”

나일의 물음에 일기장 옆에 꽂힌 책 제목을 살폈다.

‘소르온 왕국의 부흥과 쇠퇴’였다.

“예, 가볍게 읽기엔 부담스러운 역사서라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그럼 가볍게 읽힐 만한 책으로 골라서 이리로 와. 낭독하는 걸 어서 듣고 싶으니까.”

“예, 황자 전하.”

당연히 받아야 했을 어미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훔쳐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나는 책장을 이리저리 훑다가 제목이 동화스러운 책 한 권을 빼냈다.

중간중간 삽화도 큼지막하게 들어가 있는 게, 딱 이거다 싶었다.

침대 근처에 놓인 의자를 끌어다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런데 전하, 무슨 연유로 절 방에 들어오라 하신 건지.”

“책 읽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예. 그랬군요.”

낭독은 내가 먼저 하겠다 말한 거잖아 이놈 자식아.

그래그래. 묻지 말라는 의미겠지. 잘 알아들었다.

잘 알아들었으면 이 문제에 관해 그만 생각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오센 왕녀님이 다른 것만 해주고 책 읽어주는 건 안 하고 가셨나 봅니다.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삼켰다.

대신 그와 그의 침대를 훑었다.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자의 움직임에 침대보가 뒤틀린 건지, 두 사람의 움직임으로 어질러진 건지.

혼란한 마음을 어떻게든 갈무리하고 책을 폈을 때였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계속 말이 없지.”

“아, 아뇨. 읽겠습니다. 그저… 이렇게 침대 곁에서 이야기를 함께 하는 건 늘 듣는 쪽이었지 읽는 쪽은 처음이라.”

“오센 왕녀가 왜 내 방에서 도망치듯 나갔을까를 생각하는 건 아니고?”

이 귀신같은 놈.

책에 고정했던 시선을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예, 맞히셨습니다. 그걸 생각했습니다.”

“….”

“하지만 제가 감히 궁금하다고 전하께 그걸 여쭐 수 있을까요. 제가 궁금해 할 필요도 없는 일이구요. 그리 아둔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그저 책을 낭독하다 전하께서 잠이 드시면 조용히 사라지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치료제로서 내게 주어진 역할만 수행하고 나면, 당신에게 진 빚은 갚는 것일 테니 거기까지만.

그러니 이것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이미 몇 번씩이나 다짐하듯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았나.

“….”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을 이해로 알아듣고 첫 문장을 읽어나갔다.

어린아이가 제 방 옷장에 사는 귀신을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동화였다.

“으악. 넌 귀신이잖아.”

“다시.”

낭독을 뚝 끊는 남자의 목소리에 내 고개가 들렸다.

“네?”

“지금 그대의 목소리는 귀신을 발견해 놀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아닌걸. 감정이 부족하잖아.”

은근히 까다롭다고 생각하며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으악! 넌… 귀신이잖아!!”

됐나? 이 정도면 통과인가?

슬쩍 그를 곁눈질하자, 남자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가 있었다.

휴, 눈이 안 보여서 망정이지 앞이 보였으면 아주 표정 연기까지 시켰겠어.

나는 다시 뒤 내용을 읽어나갔다.

“아이는 무섭게 느껴지던 귀신이 점점 친근하게 느껴졌다. 귀신의 외모는 무서웠지만 말투는 상냥했고, 혼자 노는 것보다 귀신과 함께 놀 때 아이는 훨씬 행복하다 여겼다.”

“….”

“엄마 엄마! 하지만 귀신은 제 친구인걸요! 없애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

“안 돼… 흑흑. 아이는 새 옷장 앞에서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어보아도 아이를 향해 웃어주던 귀신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니 이 동화 왜 이렇게 슬프고 난리람.

황자가 감정을 넣어서 읽으라고 주문해서 이런 걸까.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동화 낭독에 푹 빠져 있었다.

“아니 엄마는, 자기가 놀아줄 것도 아니면서 귀신 나오는 옷장을 버리면 어떡해.”

“….”

“안 그래요 황자 전하? 어떻게 생각하세요?”

얼떨결에 그에게 동의를 구하고 나서야 그걸 깨닫고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다가온 나일의 큰 손이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그래. 네 말이 맞다.”

“….”

세상에 이토록 다정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 눈빛으로 그는 나를 쓰다듬었다.

다행이었다.

지금 내가 상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서.

나는 동화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읽는 걸 멈추고 하염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

낭독이 뚝 끊겼으니 물어볼 법도 한데.

길어지는 침묵에도 그는 별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아닌 내가 있을 거라 여겨지는 방향을 본다고 해야겠지만.

나는 내 시선을 들키지 않고 그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지금에 감사했다.

나일이 지금 앞을 볼 수 있다면, 질투로 붉어진 내 얼굴을 보고 말았겠지.

다른 여자와 함께했을 침대에 누워, 다정스레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울화가 치밀었으니.

빼도 박도 못할 이 감정은 질투이리라.

모순덩어리.

그가 나를 잊고 좋은 사람과 미래를 꾸려나가기를 원한다 스스로 말했으면서.

정체를 드러내고 위험을 감수할 용기도 없으면서, 질투는 하는구나.

“….”

아… 너무 오래 말을 하지 않았어.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아… 제가 잠시 졸았나 봐요.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

“아 여기다.”

동화 속 아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가 사준 새 옷장을 열었다. 옷장 문을 열고, 제 친구가 되어주었던 귀신이 이제 더는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울며 보낸 며칠이 지났다.

엄마는 아이의 방을 새 장난감으로 채워 주었다. 며칠 울고 나면 귀신 따위는 잊고 새 장난감을 가지고 놀 거라 생각했다. 아이란 무릇 그렇지 않은가. 금방 질려 하고 금방 새것을 탐하고. 

그러나 아이는 귀신을 잊지 못했다. 헌 옷장을 어디에 버렸을까. 아이는 엄마가 버려버린 헌 옷장이 있는 곳을 찾아 집을 나섰다.

“뭐야 이게 끝이야?”

아이가 혼자 집을 나간 게 마지막 페이지였다.

“황자 전하, 이 동화 2권짜리예요?”

“응.”

애가 집을 나간 장면으로 1권을 끝내버리다니, 이 동화작가 절단 신공이 아주.

이건 못 참지.

나는 아이와 귀신이 다시 만나 행복해지는지 반드시 확인해야겠다 이 말이야.

“저 못 참아요. 2권 찾아올게요.”

책을 들고 일어나려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2권 없어. 내가 2권 내용을 알아. 그러니까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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