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68)화 (68/134)

68화

어째서 이 시각, 이 장소에서 경비병과 시녀가 은밀한 커플 댄스를 추고 있단 말인가.

민망한 장면이 이어져 나는 고개를 돌렸다.

들려오는 소리가 한층 더 거세지더니, 그 둘은 이 장소가 지나치게 오픈된 장소라는 사실을 드디어 깨달은 듯했다.

“자리 옮길까요.”

“네.”

빠르고 짤막한 대화가 그들 사이에 오갔다.

합이 잘 맞는군, 그들은 장소를 옮겨 몸의 합도 맞춰볼 생각인 것 같았다.

둘이 있던 자리를 휙 보니 어느새 둘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시녀를 이용해 경비병을 꾀어낸 건가?’

오센 왕녀와 시녀가, 눈 맞은 남성과의 밀회를 약속했는데, 그게 참 우연히도 오늘 이 시각, 이 장소로 겹친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결론은 하나였다. 

오늘 황자와 오센 왕녀의 만남은 약속된 만남이 아니었고, 황자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경비병이 거슬리니 시녀를 이용해 그를 치운 것이라고 봐야 했다.

여기까지의 가설이 맞았다면, 오센 왕녀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걸까.

내 눈길이 자꾸 황자방의 겉문으로 향했다.

오센 왕녀는 왜 시녀를 시켜 경비병을 유인하면서까지 황자방으로 들어가야 했을까.

저런 행동은 원작의 피비나 할 법한….

‘설마 황자에게 집착하는 원작 역할을 오센 왕녀가 가져간 건가?’

제게 마음 주지 않는 황자를 갖기 위해, 원작의 피비는 야심한 시각 그의 방으로 침입하는 일조차 망설이지 않았다.

‘어쩌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게 저 방으로 들어갈 명분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들어가서 뭐할 건데. 내가 뭐라고 들어가.

앞으로 오센 왕녀의 행보나 잘 지켜보자, 생각하며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등을 기댔던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

나일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책의 중간쯤 펼치자 글씨가 빽빽한 페이지가 나왔다.

까만 글자끼리 엉겨 붙어 문장이 검은 선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흰 여백과 글자를 구분할 수 있는 게 어디란 말인가.

그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느끼며 책을 덮었다.

치료가 시작되면서 아무 때나 들이 부어대던 술의 양도 점차 줄어갔지만, 잠들기 전 마셔왔던 한 잔마저 포기하기에는 습관이 참 끈질겼다.

그는 오늘도 여지없이 정해진 잔에 반쯤 브랜디를 따랐다.

잔의 아래가 둥글고 입구로 가면서 점점 좁아지는 브랜디 잔은 음료의 향을 음미하기에 제격이었다.

술은 여러 향을 풍기지만 고급 브랜디는 그중에서도 달콤한 향이 풍부했다.

술에 익숙하지 않은 자라면 알코올 향 때문에 코를 찡그리는 게 먼저겠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강한 알코올 사이로 몸을 숨긴 부드러운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다.

나일은 입 안 가득 그 향을 머금었다.

그리고 문고리가 조심스럽게 찰칵 돌아가는 소리에 정면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칠흑같이 긴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센 왕녀군.

나일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누구냐 물었다.

그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오센 왕녀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하….”

왕녀의 대담한 행동에 그가 실소를 머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무슨 술을 드셨습니까, 전하. 황자 전하의 숨결에서 불어오는 향이 달콤합니다.”

손끝에 닿은 왕녀의 손가락이, 손끝을 시작으로 그의 팔을 지나 팔뚝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나일은 침소에 들기 좋은 로브 차림이었다.

왕녀의 손길에 그가 걸치고 있던 로브가 맥없이 풀어져 흘러내렸다.

“왕녀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제 목소리를 기억해 주시다니, 황자 전하야말로 이 술보다 달콤하신 분입니다.”

아닌데.

그렇지 않아.

당신같이 음흉한 여자의 목소리를 내가 기억했을 리가.

그냥 보여서 안 거라며 부정하고 싶었지만, 오늘 시종장에게 시켜 아직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말했으니.

왕녀가 오해하는 것이 영 마뜩잖았지만 어쩌겠는가.

나일은 입을 다물었다.

“예 제가 좀 답니다.”

무뚝뚝한 나일의 말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긍정이라 오해한 왕녀가 그의 단단한 어깨를 쓸었다.

“달콤한 황자 전하를 맛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왕녀.”

“…예?”

굳은 남자의 목소리에 그의 몸을 쓸던 손길이 주춤했다.

왕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일을 바라보았다.

“안 됩니다. 왕녀께는 안 드릴 겁니다.”

“…?”

“무슨 생각으로 이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헛소리 그만하고 내려가세요.”

그의 딱딱한 말과 더욱 딱딱한 표정 때문에 미소가 걸려있던 왕녀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으나 그에겐 보이지 않았다.

나일은 오늘, 시종장을 시켜 치료제들에게 황자의 치료에 진척이 없음을 알렸다.

가짜 치료제와 진짜 치료제,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제 손에 거의 들어왔다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지게 생겼으니 가짜 치료제들은 움직일 것이다.

그것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발뺌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일이 제일 기대했던 반작용은 진짜 치료제의 움직임이었다.

내가 진짜 치료제인데 왜 황자는 치료가 되지 않는 것일까, 그 시녀는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 어떻게든 제게 닿으려 하겠지.

그러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신분을 숨기고 있는 그녀가 제 아군인지 적인지.

그러려고 미끼를 던진 것인데, 이 송사리는 뭐란 말인가.

그러나 오센 왕녀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몸에 닿아있는 손이 떨어질 생각을 않자, 나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부디 예의 있는 황자로 기억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왕녀.”

마지막 경고였다.

허나 오센 왕녀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자존심을 내던지고 몸으로 밀어붙였는데도 남자에게서 거절의 말이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든 듯 보였다.

그럴 리가.

왕녀는 속으로 되뇌며 황자의 몸 위에서 다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황자님께서 지금 앞을 보실 수 있다면 그런 매정한 말씀은 하지 않으셨을 텐데요.”

보이는데요.

자신의 몸을 타고 오르려 하는 왕녀의 몸짓을 감흥 없이 바라보며 나일은 생각했다.

보인다고. 그래서 싫다고.

“글쎄요. 보이지 않아서 싫은 건지, 보이지 않는데도 싫은 건지. 여하튼 둘 중 하나인 건 확실하군요.”

“….”

그 말에 왕녀의 살가운 손길이 뚝 멈췄다.

“저 쿠션은 전하께서 늘 안고 주무시는 쿠션일까요. 오늘은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그것도 잠시, 왕녀는 어떻게든 그를 동하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몸이라도.

그 의도가 명확한 손길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일국의 왕녀에게 예의를 차려보려 했지만 화가 치미는군.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있던 그가 왕녀의 상체를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위로 누운 왕녀가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누운 왕녀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나일은, 제게로 뻗치는 그 손길을 거세게 쳐냈다.

“저 쿠션은 가만히 안고 있으면 잠이라도 오지, 너는 더운 살덩이 주제에 꿈틀거리기까지 하니 너야말로 쓸모가 없구나. 나가라.”

“….”

보이지 않았으나 왕녀의 수치스러워하는 표정은 충분히 상상되고도 남았다.

왕녀가 급하게 몸을 일으켜 차가운 얼굴로 방을 나갔다.

멀리 안 나갑니다. 왕녀님.

“….”

거머리 같이 들러붙어 잠을 방해하던 자도 떠났으니 다시 잠을 청해볼까.

침대로 누우려던 나일은 돌연 몸을 일으켰다.

방해받지 않고 편안히 잠을 자려면, 제 임무를 잊고 왕녀를 들여보낸 경비병을 단속하는 일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일어나 방을 나섰다.

‘이놈이 어디 간 거야.’

우직하게 일 잘하던 놈이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문밖을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경비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일은 벽 끝까지 활짝 열린 문을 향해 다가섰다.

왕녀가 문도 닫지 않고 줄행랑을 친 모양이었다. 

나일은 열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잠깐만….’

문 뒤에 뭔가가, 뭔가가 보였던 것 같은데.

“….”

대충 보았을 땐, 문이 완전히 열려 벽에 닿은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아니었다.

문과 벽은 그 사이에 무언가를 감춘 듯, 예각을 이루고 있었다.

나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밤, 깜깜한 복도, 그는 혼자였다.

그리고 문과 벽 사이 누군가 있었다.

‘첩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는 문을 노려보며 방 안쪽으로 살짝 뒷걸음질 쳤다.

벽에 걸려있는 대검은 화려한 장식용 검이었지만 사람을 베기에 충분했다.

- 스릉.

장식용 틀에서 검이 빠져나오며 소리가 났다.

문과 벽 사이에 있는 자도 날붙이의 소리를 들었을 텐데, 별 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얼마든지 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겠지.

문과 문이 붙어 있는 벽 사이의 좁은 틈.

그 사이로 대검을 세워 단번에 찔러 넣는다.

그게 나일의 계획이었다.

어차피 지금의 제 상태로는 정확히 급소를 찌르지 못할 테니 죽지는 않겠지. 

손잡이에 힘을 꽉 주었을 때였다.

“화, 황자... 전하.”

익숙한 목소리에 그가 행동을 멈췄다.

“문 뒤에 있는 자는 귀신이냐 사람이냐. 죽고 싶지 않거든 나와서 고개를 조아려라.”

“그 말씀은 나가기만 하면 그 무서운 대검은 치워주신다는 이야기지요?”

아,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다 했더니 그 영애로군.

그의 한쪽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아니, 안 나오면 확실히 죽는다는 말이다.”

“제국의 황자답게 협박에 능하십니다. 전하.”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 뒤쪽에서 얼굴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란셀롯 영애.

바로 나일이 낚고 싶었던 대어였다.

“그런데… 영애가 왜 내 방 앞에 있지?”

“아하하… 그게,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문이 팍 열리지 뭐랍니까. 어휴, 놀라라.”

“….”

“전하, 그럼 좋은 밤 되시고, 부디 숙면하시길.”

나일은 여자의 표정을 보고 싶은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느낌상 여자는 웃고 있는 듯했다.

살짝 비뚜름한 고개로 그녀를 보고 있던 나일은 방 안으로 몸을 옮겼다.

“들어가지.”

“예. 편히 주무십시오.”

“내 방으로 함께.”

“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