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내게로 뻗친 그녀의 손을 보며 나는 알레나를 비웃었다.
“네가 벌서란다고 내가 벌 설 거 같냐.”
“어 해줘. 제발.”
멘데 공작가에선 장남만 챙긴다고 잔뜩 하소연하더니, 아직도 그때의 쓸쓸한 기분이 가시지 않은 걸까.
제발이라는 단어까지 꺼내든 그녀의 눈동자가 제법 진지한 느낌이라, 그녀를 더 놀려 먹으려던 나는 그 마음을 접기로 했다.
“그래. 있을게.”
“….”
침대는 둘이 굴러다녀도 좋을 만큼 넓었지만, 나는 굳이 그녀의 바로 옆에 눕기로 했다.
알레나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까 술기운이 오르는 바람에 못 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살가운 엄마로 빙의해서 울적해 하는 그녀의 등을 쓸어주는 건, 내게도 괜찮은 기분을 안겨 줄 행동 같았다.
“토닥토닥 해줄 테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고, 자고 싶으면 자고.”
“하고 싶은 말?”
기다란 베개를 둘이 함께 베고 누웠더니 지나치게 가까운 모양이다.
반문하는 그녀의 입에서 달짝지근한 술 냄새가 풍겼다.
“나중에.”
“나중에? 하고 싶은 말을 왜 나중에 해. 지금 해.”
처음 봤을 때부터 매력적인 얼굴이라고 생각했지만, 모로 누워서 바라보는 찌그러진 얼굴도 그녀는 빈틈없이 멋졌다.
천천히 눈꺼풀이 닫혔다 열릴 때마다, 그 안에 숨어있던 눈동자가 날 직시하고 있어서 나는 조금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내 얼굴 찌그러져서 못생겨 보일 것 같은데.
“지금은 네가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왜 사람 겁주냐 너. 뭐길래.”
“나중에. 여름 지나서.”
“야 그때까지 내가 네 친구일 거란 보장이 있어? 너 성격 더러워서 여름 오기 전에 내가 친구 관두면 어쩌려고.”
“어….”
말끝을 흐리던 알레나는 “좋은데? 너랑 친구 관두는 거.” 하며 실없이 웃었다.
“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 자 언능.”
톡… 톡….
일정하게 등을 토닥이자 알레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있잖아.”
“…”
“나중에, 나중에 내가 말할 준비가 되었을 때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알겠다, 알겠어.
그러니까 편히 자라.
나는 그녀가 잠에 빠질 때까지 연신 등을 토닥였다.
*
그다음 날, 황실 마차는 예정된 시각보다 이른 시각에 도착해 숙소 앞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시종은 빨리 환궁하길 보챘다.
그리고 황궁에 도착해서야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세 명의 치료제가 모인 방 안,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의 치료가 진전이 없습니다.”
“전혀요?”
나는 스프링이 튕겨 나가듯 질문했다.
황자의 치료 속도가 미미하다는 것은 당연히 직감하고 있었다.
그가 아직도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는 게 내 눈에도 뻔히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였으리라곤.
“치료제 분들과 닿으신 후부터 항상 꾸던 악몽을 꾸진 않으십니다만.”
“….”
“그걸로 효과가 있다고 해야 할지.”
아아.
돌아오는 답변을 들으며 나는 옆에 앉은 알레나의 허벅지를 짚으며 무너졌다.
손이라는 작디작은 부위였지만 분명히 주기적으로 닿긴 닿았단 말이다.
내가 바로 저주 걸린 황자의 치료제 피비 셀린이란 말이여!
그런데 왜.
‘이토록 치료가 진전이 없지.’
정말 손잡는 것으로는 고작 악몽을 꾸지 않게 해주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단 말인가.
놀라서 가슴이 팍 막힌 듯 답답해진 나와는 다르게, 나머지 두 진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들이었다.
메릴린 어린이야 그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황자님 계속 아파? 내가 열심히 주물렀는데.” 라는 말을 제 시녀에게 할 뿐이었고.
프리츠 오센 왕녀는 어차피 다들 가짜인데 뭘 그렇게 놀라는 표정을 연기하냐는 듯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할 말을 마친 시종장이 방을 나섰고, 적막이 찾아왔다.
“다들 곧 황궁을 떠나게 되겠네요.”
웃음 띤 까만 눈동자를 깜박이며 오센 왕녀가 입을 열었다.
“셋 중에 진짜가 있었다면 진짜가 남았겠지만, 상황을 보니 남을 분은 안 계시는가 보군요.”
오센 왕녀의 말에 한동안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뭐야. 이렇게 쉽게 나 가짜라고 인정하는 분위긴 거야?
하지만 난 그렇게 못하지. 난 당신들과 달리 가짜가 아닌걸.
잠자코 말을 듣고만 있던 나는 알레나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오센 왕녀님은 이 상황이 쉽게 납득되시는 걸 보니 가짜가 맞는가 봅니다.”
“….”
알레나의 말에 오센 왕녀가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딱히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는 않는지, 머뭇거리던 왕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멘데 영애께서는 이 안에 진짜 치료제가 있다고 보시나요? 그럼 묻겠습니다. 왜 황자 전하께서 치료되지 않고 계신 거죠?”
“글쎄요. 전 진짜 치료제가 맞고 들은 대로 행동했는데도 치료 속도가 이리 더디다니, 저도 의문스럽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진짜 치료제가 맞으니 곧 해결되겠죠.”
짜식. 아주 얼굴에 철판 깔고 잘 말하고 있구나.
“어쨌든 황자 전하께서 치료가 안 되고 계시니 황궁에서 치료제라 말하는 셋을 다 데리고 있진 않겠지요. 누가 나가게 될지는 그때 보면 되겠네요.”
오센 왕녀의 저 말이 자기도 곧 나가게 될 거란 말로 들리진 않는데.
무슨 묘수라도 쥐고 있는 걸까.
궁금해진 난 은근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 자신감 있는 얼굴이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죠.”
오센 왕녀와 시녀들이 자리를 뜨자, 눈치를 보던 메릴린 어린이가 내게로 다가왔다.
“피기… 흐앙….”
다가온 분홍 머리 아가씨의 큰 눈에서 눈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황자님 치료 못 하면 메릴린 엄마도 계속 아픈데 어떡해… 흐아아앙. 후작님이 엄마한테 약 안 줄거야아아… 흐어어어엉.”
“아, 아니 아가씨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리 오세요.”
루메낙가의 시녀가 재빨리 내게 매달려 있는 메릴린을 둘러업고 방을 나갔다.
두 진영이 다 나가고 방에는 나와 알레나만이 남겨졌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방에 걸린 그림을 감상 중인 알레나의 어깨를 잡아챘다.
“어떻게 생각해? 내가 가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 넌 안 들어?”
나는 상황이 이러니까 말이지, 내가 진짜가 맞는 건지도 의심스러운데 말이야.
“넌 진짜잖아. 뭔가 문제가 있겠지만 네가 진짜인 이상 이 상황은 해결 될 거야.”
“내가 네게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알레나는 뭘 그리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넌 아무것도 요구한 게 없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원하는 무언가가 다 있기 마련이지. 근데 넌 그게 없잖아.”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는 그를 건강한 몸으로 되돌려 놓고 이곳을 떠나는 건데 말이지.
“아무래도 시도해 봐야겠네.”
“뭘?”
아, 알레나는 나와 파베라가 나눴던 대화를 모르는구나.
“있어 그런 게.”
하얀 성추행이라고 있어.
나는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창문 너머로 나일의 방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가는 시각이었지만, 하얀 커튼 너머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아하니 그는 아직 잠들지 않은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까이에 그가 있다 한들 어차피 그림의 떡이 아닌가.
나는 괜히 입이 마르는 느낌에 잔에 물을 따라 마셨다.
하얀 성추행, 착한 성추행이라고 계속 되뇐다 한들 어떻게 안전하게 실행한단 말인가.
하얗건 까맣건 실행을 하고 아무 일이 없어야 하는데.
나는 지금 되게 한미한 남작가의 영애일 뿐이고, 그는 황자 전하다.
뭐 그가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서 쭉 내민 입술에 “좋은데?” 하고 받아주면 모를까.
안 받아주면 쇠고랑 감옥행이잖아.
‘피비 셀린이라면 받아줄 것 같긴 하지만….’
저번 호수에서의 일화를 떠올리면 그는 내게 완전히 빠졌던 것 같으니.
“으흐흐흐.”
나의 병사님께서는 정말 오래도 그리워하는구만 그래.
나를 떠올리며 눈물을 펑펑 쏟던 남자를 생각하자 잇새로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정말 요즘 우울하다가도 그 얼굴만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아니 도대체 사람이 사람한테 얼마나 푹 빠지면 그렇게 오래 기억하면서 슬퍼하냐고.
“아하핳핳하.”
아. 그 슬픔의 원인인 주제에 너무 신나게 웃어버렸다.
어쨌든 위장하고 있는 지금의 정체로는 그와 키스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법이.
정말 짱돌로 뒤통수 갈긴 후에 정신 잃은 남자에게 키스하는 방법 말고는 없으려나,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왜 저분이 그의 방으로 들어가?’
오늘 낮에 보았던 그녀였다.
3층 복도에 난 커다란 창을 통해, 프리츠 오센 왕녀가 황자의 방을 향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아니겠지.
나는 유심히 복도를 이동하는 왕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리고 왕녀의 모습은 황자의 방 근처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
창문 밖으로 몸을 쭉 빼고 살펴보았지만, 황자의 방 주위에서 사라진 왕녀의 모습은 다시 나타나질 않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설마….
설마 왕녀가 황자를 꼬시러?
그건 아니겠지.
저런 행동은 유혹할 때 하는 행동이 아니라 당당히 연인이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행동 아니냐.
어? 이 늦은 밤에 지금 그가 혼자 있을 방으로 들어간 건데.
그럼 이미 유혹했고 상대방은 넘어갔다는 말인가.
“하핳….”
뭐야, 황자 너 호수에서 그렇게 엉엉 울더니 금방 다른 언니랑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야?
“아하핳… 얘들 봐, 이 귀여운 애들을 어떻게 한담.”
내 입에서 짧게 짧게 자조 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나일 너, 내가 한 번 피어난 걸로 족하다고 불모지 만들지 말라고 속으로 진심으로 빌었어, 빌긴 했는데.
‘너무 빠르지 않냐 이건.’
나 지금 기억 속 너의 눈물이 가식적으로 느껴지려고 한다.
왕녀님 아직도 안 나왔네.
나는 괜히 입 주변을 한번 쓸고, 이마도 한번 쓸고, 코도 한번 매만졌다.
잠자코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방 근처만 가보자.’
왕녀님이 방 근처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수도 있잖아.
그럼 큰일 난 거라고 지금.
내가 가서 구해줘야지.
잠옷 바람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 얇은 외투를 하나 두르고, 나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복도를 걸었다.
어라, 늘 황자방 앞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보이질 않았고, 오센 왕녀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간 건가.’
그럼 지금 방에 단둘이 있다는 소리네.
화려한 무늬가 양각된 문에 손을 대고 귀를 기울였지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손을 대고 있는 문은 겉문이고 이 겉문을 열고 들어가면 대기실 같은 작은 공간이 나온다.
황자의 방은 그다음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안에서 소리라도 쩌렁쩌렁 지르지 않는 이상 내가 여기서 들을 수 있는 건 없겠지.
겉문을 열고 들어간다면 모를까.
나는 겉문에 새겨진 화려한 무늬를 쓱 훑어보았다.
‘이걸 밀어 말어.’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겉문을 열고 들어갔다 쳐. 무엇을 듣기 위해서 들어가는 건데?
황자가 꼭 치료제랑만 닿으란 법 있냐, 마음에 들면 누구든 취할 수 있는 게 그의 위치였다.
오센 왕녀가 경비병에게 업혀 온 것도 아니고 제 발로 저 방에 들어간 건데.
그럼 둘 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린데.
‘내가 뭐라고….’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고 하냐 이 말이다.
마음 접기로 했잖아.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질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잖아.
들어갔더니 들려오는 소리가 남녀의 신음소리 뿐이라면 어떡할래.
괜히 내 마음만 할퀴는 일은 할 필요 없지.
“아앗….”
어디선가 여자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문을 열고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신음소리가 들려버리네.
내 마음의 귀는 벌써 저 방에 가 있는 것인가.
더 엄한 소리를 상상하기 전에 빨리 방으로 돌아가야지, 하며 돌아섰을 때였다.
“앗….”
또다. 또 앓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두 번째 들었을 때, 저 소리가 내 상상의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살금살금 발을 옮겼다.
‘저 얼굴은….’
2층과 3층을 잇는 계단 사이에, 뒤엉킨 남녀가 보였다.
저 여자 어디서 본 얼굴인데, 아. 그녀는 오센 왕녀가 데리고 다니던 세 명의 시녀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경비병과 몸을 맞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