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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66)화 (66/134)

66화

“그래서 멘데 가문은 나를 치료제로 밀어 넣어서 영지 자치권을 다시 돌려받을 생각이야.”

알레나가 거의 빈 와인잔을 휘휘 돌리며 말했다.

테이블 위 홀케이크는 사분의 일쯤 양이 줄어 있었다.

화이트 와인은 어디 보자, 삼분의 일쯤 마셨군.

멘데 왕국이 동제국에 복속되며 빼앗긴 것은 막대한 재산뿐 아니라 영지에 대한 자치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치권 없이는 작위만 있는 귀족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영지에서 나는 노동력과 재물은 곧바로 동제국이 가져간다.

자신들의 영지이지만 그들이 손댈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것 하나 없었다.

복속된 나라가 10년 동안 동제국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잘 흡수되면, 10년 후 자치권을 반납해 주지만 그 10년을 견디는 곳은 많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가문이 동제국의 중앙권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허울 좋은 지위만 가진 채 유지되다 사라져 갔다.

멘데 가문의 가주 역시 그런 불안감에 시달라고 있었고.

“그리고 멘데 가주의 중앙권력 진출도 요구했어.”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상대의 빈 와인잔을 채웠다.

“그래서 네가 가짜 치료제로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구나. 거기에 마침표를 찍은 게 나고.”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알레나가 해준 이야기는 그녀가 가짜 치료제가 되어 황궁에 들어오기까지의 이야기였다.

멘데 왕국을 잡아먹으며 동제국 황제가 무력으로 왕궁을 짓밟은 일부터, 멘데 공작가의 현 상황까지.

그리고 그녀의 작지만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들까지.

- 드르륵

알레나가 갑자기 일어서며 의자가 뒤로 밀려났고, 바닥과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를 냈다.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온 그녀가 무너지듯 내 허벅지 위로 쓰러졌다.

설마.

“취했어?”

“아니. 안 취했는데.”

취했구나.

그 한 잔을 찔끔찔끔 비운 거에 비해 얼굴색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빨개진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취했어 얘.

“침대에 누울래? 눕혀줄까?”

“아니, 더 얘기 할래 너랑. 너한테 다 얘기할래. 그래도 돼?”

바닥에 앉아 내 허벅지 위로 고개를 수그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뒷목으로 손을 밀어 넣자, 손바닥에 느껴지는 피부가 뜨거웠다.

“그런데 나 사실, 그런 거 다 필요 없다고 느낀다.”

붉어진 볼을 손등으로 쓸며, 알레나는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그러면 어때. 동제국에 복속되면 어때? 내 아비의 이야기지만 멘데 왕은 좋은 왕이 아니었어. 영지민들이야 지배층이 바뀌는 거, 아~무 상관없지. 그저 조금 더 푸짐한 식사를 하게 해주는 지배자가 좋은 지배자인걸.”

“….”

“내가 나쁜 자식인가.”

내 허벅지 위로 얼굴을 묻은 알레나는 한참이 지나도록 고개를 들지 않았다.

“황제? 안 미워.”

“….”

“내가 미운 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해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나는 아들로 살고 싶었는데.”

“아들?”

“응. 아들.”

아들 좋지.

아들 좋아.

오죽하면 애가 아들로 살고 싶었다는 말을 다 꺼낼까.

멘데 공작가는 엄청 가부장적인 집안임이 틀림없었다.

용한 점쟁이는 알레나가 태어나자마자, 둘째가 첫째 아이의 기운을 다 가져갔다며.

이대로 두면 장남이 장성하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엄청 오빠한테 들들 볶이면서 살았을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만하려고 나. 이렇게 사는 거.”

“그래. 그래.”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대충 예상은 했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득에 홀려 자기 딸이 위험해 처할지도 모르는 일에 밀어 넣는 것부터가, 그럴 거라는 예상을 부추겼으니까.

내 허벅지 위로 고꾸라진 이 아이는 얼마나 오랫동안 장남에게 자신의 것을 양보해야 했을까.

나는 그녀의 민트빛 머리칼을 매만졌다.

“네가 좋아.”

“….”

“난 너한테 이해받을 수 있을까?”

“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가족들한테 못하는 말도 다 친구한텐 하는 거야.”

“…응. 친구니까.”

“근데 우리 가야겠다. 오늘 안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이제 그만 파베라랑 못 한 얘길 나누고 황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알레나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자고 가자.”

“오늘 안 돌아가고?”

“응. 내일 가자. 돌아가기 싫어.”

*

황궁에서 함께 나온 시종에게, 궁으로 돌아가 시종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달라 요청하니 그는 예의 바른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내일 언제쯤 이곳으로 마차를 보내면 될까요?”

“점심 지나서 보내주세요.”

“예.”

시종이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저택으로 들어와 거실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파베라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안 가게?”

“응. 내 친구 말야. 술에 취해버려서… 저렇게 술이 약할 줄 몰랐네.”

소파에 늘어지듯 누워 기지개를 켰다.

나도 술기운이 좀 올라오는 듯싶었다.

“어때? 황자를 치료하는 일은 잘 돼가?”

“그게… 모르겠어.”

호수에 다이빙까지 해 가면서 치료 안 받겠다는 애 마음을 돌려놓긴 했는데 말이지.

나는 거실 허공에 긴 한숨을 내뱉었다.

“시종장이 치료가 진전되면 경과를 알려준다고 했거든. 근데 아무 말이 없어.

황자도 가만 보면, 여전히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고.”

파베라는 내 대답이 정말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네가 생명의 정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치료 효과가 더 좋았으면 좋았지 그럴 리가 없는데… 안 닿은 거 아냐?”

“닿았어어~~”

“어디?”

“손!”

아니 난 잘못한 게 전혀 없는데 왜 이렇게 눈치가 보이는 거냐.

닿았다고, 손. 이게 뭐?

억울한 내 음성에 파베라는 눈살을 구겼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예상이 갔으므로 나는 은근히 시선을 피했다.

“여기 유치원이야?”

“….”

“다 큰 성인들이 쎄쎄쎄만 하고 있네? 그러니까 진전이 없지. 난 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아 문제지 문제. 원래 느려서 그렇지 손만 닿아도 지금 잘 치료가 되고 있어야 하는데…”

“스스로 답을 알고 있네. 손만 닿으면 느리다고.”

히잉. 원작 속 피비는 황자랑 강한 스킨쉽만 해대서 손만 잡았을 시의 속도 같은 건 모른단 말이다.

느리다고만 나와 있었는데 이 느리다는 게 1년씩 걸리고 그 정도 속도는 아니겠지? 하아…

“뭘 고민해 키스 갈겨.”

파베라의 말에 나는 소파에 기댔던 상체를 일으키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갈겨?”

“어. 키스해. 키스는 안 해봤잖아. 속도가 안 나면 이것저것 시도해 봐야 하는 거 아냐?”

맞는 말이었다.

황자의 치료 속도가 이리 지지부진한데, 아 왜 이렇게 느린 거냐고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며 언제까지 손만 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맞지.

테러 당일에도 그가 눈을 뜨지 못한 상태면 황자는 원작보다 더 큰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더 강한 스킨쉽을 테스트해 볼 때긴 한데.

“키스….”

멍한 표정으로 두 글자를 내뱉자, 파베라가 대놓고 놀라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설마 할 줄 몰라?”

“알아.”

“알아?”

“알아….”

“그래. 그거는 영혼에 각인되어 태어나는 건데 모를 리가 있니.”

그래. 뽀뽀도 알고 키스도 알아. 그런데….

“상대가 키스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는 어떻게 알아? 그걸 미리 알아야 계획을 짜지.”

그렇잖아.

A라는 행위를 성공시키기 위한 계획을 짠다면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두 사람 모두가 A라는 행위를 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라는 질문에 둘 다 예스를 해야 계획을 짤 거 아닌가.

그 동의 없이 계획을 짠다면 실행 불가라고…!

“글쎄… 난 항상 별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하게 되던데?”

얼마나 방탕한 인생을 살아오신 겁니까.

나는 900살 먹은 할머니를 신뢰치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싫으면 걔가 뺨이라도 때리겠지.”

“아니 뺨을 맞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대가 원치 않는 스킨쉽을 했다는 의미잖아.

그리고 뭐 나는 뺨 맞아도 괜찮아?

키스하고 뺨 맞고 싶진 않다고!

머리 아파. 나는 기울어진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받쳤다.

시력이 빨리 돌아오지 않아 제일 답답한 건 황자 본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치료제들에게 은근하게 더 강한 스킨쉽이 오갔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단 한마디 언급도 하질 않았다.

그놈 속이 언제까지 앞이 안 보여도 난 괜찮아, 오래 걸리면 걸리는 대로 괜찮아. 뭐 이런 속이겠느냐고.

빨리 시력을 되찾길 원하면서도 다른 말을 꺼내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이 치료제들과 이 이상 닿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일 텐데.

“하아….”

거실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황자가 싫어한다고 해서, 응 싫어하는구나 안 해. 하고 기다렸다간 계속 눈을 못 뜨고 그 상태로 서제국 테러가 일어나면….

“일단 밀어붙여야 하나.”

“하얀 성추행이라고 생각하고 해.”

“….”

“맞지 착한 성추행이지. 이건 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구하기 위해서잖니.”

그런가.

그래 나는 그와 이것저것 등등을 해서 좋을 거란 생각은 전혀 없….

혹시 파베라에게 들킬까 나는 씰룩이는 입매를 가렸다.

“너 하고 싶구나?”

“하고 싶은 정도는 아니고.”

나쁘진 않겠지. 흐흐흐흐.

나는 부끄러움에 오므라드는 발가락을 바라보았다.

착한… 하얀… 까만….

“아 그런데 할 얘기 있다는 건 뭐야?”

그러자 파베라는 서랍장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왔다.

셀린가에서 보았던 익숙한 편지지였다.

“언니가 편지를 보냈는데,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었대.”

편지는 엄마에게서 온 것이었다.

프리지아 자작으로부터 전갈이 왔는데, 프리지아 자작 영애로 행세하고 다녔던 내 동선과 행선지를 묻는 낯선 이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누군가 너의 정체를 캐고 다니는 것 같으니 부디 조심하라는.

“서제국 변태놈이 아직도 포기 못 했나?”

“아직까지 너를 포기 못 했으면 걔한테 사랑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니?”

나는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며 파베라를 웃으며 흘겨보았다.

“동제국 일 마무리하고 돌아가서도 내 이름으론 못 살겠네.”

도대체 언제 나는 내 이름으로.

좋지 않은 소식에 기분이 꿀꿀해진 나는 알레나와 먹고 남은 와인을 잔에 부었다.

“너도 할 이야기 있다며.”

“아.”

듣는 사람도 없는데 나는 괜히 목소리를 줄였다.

“현 황제의 치료제가 있었을 거 아냐.”

“응. 그렇겠지?”

“그분을 만나보고 싶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언니가 알아봐 줘.”

당연히 황궁에서 정보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되었으니.

전대 치료제가 귀족이건 평민이건, 치료제가 나왔다는 사실은 그 주변에서 꽤나 화제였던 소식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입단속을 잘 시켰다고 해도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소문은 입을 타고 전해졌을 것이고.

그 소문 중 진실인 것도 분명 있을 터였다.

“그래. 나만 믿어.”

파베라가 듬직하게 말했고, 나는 그녀에게 신뢰 가득한 눈빛을 쏘아주었다.

*

방으로 올라오니 알레나는 내가 방을 나오며 침대에 눕혀준 자세 그대로 누워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잠든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양 볼이 불에 덴 듯 붉더니 어느새 본연의 하얀 피부로 돌아와 있었다.

‘옷 내가 벗겨줄까.’

치렁치렁한 드레스 입고 자면 영 불편하지 싶은데.

혹시 싫어할지도 모르니, 얘가 또 한 성격하는 애가 아닌가.

왜 멋대로 옷을 벗기고 남의 몸을 본 것이냐며, 일어나서 한 소리 들을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알레나의 귓가로 다가가 속삭였다.

“옷 벗겨줄까.”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불편해?”

“응.”

대답하며 그녀는 감겨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귓속말하던 중이라 알레나와 내 거리는 정말 가까웠다.

그녀가 고개를 내 쪽으로 비스듬히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해가 진 창문으로 들어온 노을빛이 알레나의 민트색 눈동자 위에서 일렁였다.

술도 이렇게 못 하면서 거절하지 않고 마신 걸 보면.

오늘 내게 했던 이런저런 이야기 모두, 속에 담아두기만 하고 평소 잘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겠지.

그런 그녀가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 나는 알레나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빗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어디가?”

“내 방 빌려줄게. 넌 여기서 자. 나는 내려가서 파베라랑 놀고 있을게.”

“….”

나를 보는 알레나의 눈망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누가 봐도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이 있는데 내뱉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있으면 말해. 들어주고 나갈게.”

그녀가 내게로 손을 뻗었다.

빨리 잡아달라는 듯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했다.

“너 때문에 잠 깼어. 잠들 때까지 내 옆에서 벌서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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