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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65)화 (65/134)

65화

“네게 말을 해줄 의사가 있다면 궁금해 할게.”

“하하….”

그녀는 허리 나가는 자세로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씁쓸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더 볼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나갈까?”

“….”

“여긴 눈도 귀도 많으니까 나가자. 나가서 얘기할게.

도서관을 나가는 알레나를 따르며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황족 전용 서고가 보였다.

어쩌면 저곳에는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이 있지 않을까.

*

나일은 소파에 앉은 건지 누운 건지 헷갈리는 자세로 늘어져 집무실 문을 바라보았다.

대책 없이 맥이 풀려버린 몸은 나른하기 그지없었다.

알레나 멘데와 그 시녀 피기 란셀롯이 나간 후 얼마나 지난 거지.

두 사람이 나가고 시종과 하녀들이 방을 들락날락했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힘이 없어, 그저 풀릴 대로 풀려버린 몸을 소파에 누인 채 눈꺼풀만 깜박였다.

치료제와 몸이 닿고 나면 늘 이런 상태였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었다.

치료제는 치료제란 말인가.

그녀와 손만 잡고 있었을 뿐인데도 그의 몸은 늘 이렇게 기분 좋게 풀어져 버리곤 했다.

“들여보낼까요?”

“어.”

시종이 묻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너머로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들어온 이는 프리츠 오센 왕녀와 시녀였다.

다가온 왕녀는 곁에 있는 의자가 아닌 나일의 바로 옆자리에 착석했다.

예정된 행동이 아니었지만 나일은 따져 묻지 않았다.

“….”

왕녀가 스르륵 손깍지를 껴왔다.

“많이 닿을수록 좋으니까요.”

좋겠지, 네가 치료제라면. 하지만 너는 치료제가 아니지 않은가.

왕녀가 가짜 치료제라는 사실을 이미 아는 나일은 속으로 그 말을 비웃었지만 딱히 왕녀의 행동에 제재를 가하진 않았다.

몸을 움직이기가 귀찮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진짜 치료제를 떠올렸다.

알레나 멘데와 그 시녀는, 많이 닿아야 좋다며 항상 제게 기도하는 손 모양을 시킨 후 그의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마치 살려달라고 비는 자세 같지 않은가.

묘하게 그녀들에게 굴종하는 자세라 탐탁지 않았지만, 자신의 손을 감싼 치료제의 손은 보드랍고 따듯해서 그는 늘 항의하지 못했다.

“…?”

상념에 빠져있던 나일은 제 손바닥에 느껴지는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왕녀가 깍지 낀 손 엄지손가락으로 제 손바닥을 살살 간지럽혔다.

그가 별말이 없자, 그녀는 더 이상의 행동을 해도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왕녀가 나일의 셔츠 소매를 위로 걷어 올렸다.

왕녀의 팔이 제 팔에 닿는 것을 나일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일의 시력은 많이 돌아온 상태였다.

비록 여전히 가까이 있는 사람의 표정은 보이지 않아 달걀귀신 같았고, 세상은 잔뜩 뒤섞인 물감처럼 보였지만 착실히 빛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 치료제 덕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치료제도 아닌 것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짓거리를 하는 게 보여 그는 비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전하? 혹시 불편하신가요? 저는 그저….”

“하세요. 치료제잖습니까.”

당황한 여자의 미미한 움직임과 흔들리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미인이겠지.

시종놈이 하도 떠들어 대는 통에 그는 보기도 전에 누가 어떤 외모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귀찮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얼마 전까지도 그의 세상이었던 암흑으로 쉽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까만 화면 위로 갈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 흰 피부를 가진 여자의 색을 떠올렸다.

‘왜 숨기는 거지.’

프리츠 오센 왕녀가 집무실에 들기 전 이 방에 있던 이들은 알레나 멘데와 피기 란셀롯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인사를 나누고 두 여자는 제 옆으로 왔다.

그리고 이상한 일은 그때 일어났다.

‘왜….’

치료제가 앉아야 하는 자리에 앉은 이가 멘데 영애가 아닌 란셀롯 영애였으니까.

란셀롯 영애가 익숙하게 제 손을 잡아다 끌었다.

나일은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그녀들은 아직 자신의 상태를 몰랐다.

점차 빛이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았으니까.

제 손을 잡아다 기도하는 손 모양을 만든 란셀롯 영애가 그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조금은 손바닥이 축축한 편이구나, 하고 평소의 그는 생각해 왔다.

여자의 손은 작아서 제 손을 다 덮지 못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검사하는 것처럼 엄지손톱을 문지르곤 했다.

나일은 여태껏 그 손이 알레나 멘데의 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제 옆에 앉아 손을 마주 잡은 이는 란셀롯 영애였다.

- 멘데 영애는 내 손을 가만히 잡고만 있어야 하는 이 시간이 지루하지 않은가?

나일은 눈에 보이는 담갈색 머리의 여자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작은 머리통이 옆을 바라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멘데 영애 쪽이었다.

혹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까 조심하며 알레나 멘데가 얼굴을 피기 란셀롯 쪽으로 가까이했다.

-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황자 전하.

- …그런가.

짤막하게 대답하며 나일은 두 여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제 시선을 갈무리했다.

너무 티 나게 보다 보면 시력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들킬지 몰랐다.

‘내 치료제는 피기 란셀롯이었어.’

첫날부터 지금까지 제게 닿았던 여자는 멘데 영애가 아닌 란셀롯 영애였음을 나일은 그때 직감했다.

그런데 왜 자신이 치료제라는 걸 감추는 거지.

치료제가 되어서 나쁠 건 하나도 없는데.

이러저러한 의문들이 그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황자 전하.”

“어?”

이런, 너무 오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오센 왕녀는 이미 그를 몇 번 부른 상태였다.

나일은 하던 생각을 뒷전으로 미루고 왕녀를 바라보았다.

“저와 닿는 게 싫지 않으신가요?”

싫을 것도 좋을 것도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오센 왕녀와 닿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내 치료제와 닿는 일을 왜 싫어한답니까.”

나일은 의도적으로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제 팔이 아직도 왕녀와 닿아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왕녀가 걷어 올린 소매를 내렸다.

“싫어하지 않으시니 저는 참 기쁘답니다.”

내가 네게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겠지.

왕녀의 안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뭉개지고 찌그러진 그의 시야에 가짜 치료제를 연기하는 여자의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

오센 왕녀가 나간 후 들어온 이는 시종과 시종장이었다.

“와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정말 미인입니다. 오센 왕녀는.”

벤자민은 들어오면서 여지없이 입을 놀렸다.

나일은 둘을 보며 한없이 늘어졌던 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런데 황자 전하, 언제까지 가짜 치료제들을 이대로 궁에 두실 생각이십니까?”

집무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시종장이 나일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말야, 가짜 치료제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궁 밖으로 내칠 생각이었는데.”

“예.”

“생각할수록 괘씸해. 내가 속고 있을 거라 여기는 그 표정들을 상상하면.”

나일은 시종장에게 치료제에게 주어지는 보상으로 그들이 각각 무엇을 요구해 왔는지 들었다.

오센 왕국은 왕녀로 인해 동제국과 우호 관계를 다지는 것만으로도 이익이라 생각했는지 별다른 요구가 없었고 루메낙가는 세금을 줄여 달라고 요구했다.

문제는 멘데 공작가인데.

‘멘데 공작가의 시녀가 진짜라고 해서 멘데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 건가.’

“조금 더. 일단은 두고 보자고. 시간은 많으니까.”

시녀. 피기 란셀롯의 의도를 알아야 했다.

왜 치료제면서 정체를 감추고 있는지, 왜 그 여자를 생각나게 하는 건지도.

나일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때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피기 란셀롯….”

“뭐? 내가 지금 그 생각 중인 걸 어찌 알았지 시종장?”

“란셀롯 영애를 생각 중이셨습니까?”

“아, 아니 아니… 됐어. 아냐.”

손사래를 치던 황자를 의뭉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시종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첩자 색출을 위해 치료제 분들의 뒷조사를 명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행 중인데…”

시종장은 의외의 결과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기 란셀롯. 그 영애의 신분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 영애는 자신을 란셀롯가의 둘째라고 소개했는데, 찾아보니 란셀롯 남작가의 둘째는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죽었다는 것까지만 확인되었으니까요.”

나일은 대답 없이 혀 아래 모인 침만 꿀꺽 삼켰다.

그 여자를 떠올리게 하는 점들, 치료제, 확인되지 않는 신분까지.

“다른 영애들은 아시다시피 신분이 확실한 자들입니다.”

“신분이 확실하다고 해서 그들이 첩자가 되지 말란 법은 없어. 경솔하게 굴지 마.”

“예. 전하.”

시종장을 다그쳤지만, 그 역시도 피어오르는 불신을 어쩌지는 못했다.

란셀롯 영애가 서제국 측의 새로운 첩자인 걸까.

그래서 내게 다가오고 친근한 말을 하고.

하지만 치료제인데 어떻게.

수만 가지 가능성이 휘몰아쳤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멘데 영애와 란셀롯 영애는 지금 어디 있지?”

“방금 황궁 밖을 빠져나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가 턱을 매만졌다.

그 시녀, 처음 보자마자 느낌이 이상하다 여겼다.

왜 자꾸 처음 본 사람에게서 그 여자가 보이는지, 그때엔 그저 자신이 그 여자를 너무 보고 싶어 하여 돌아버린 것쯤으로 여겼는데.

“어디서 뭘 하는지 주시해. 누군지 알아야겠으니까.”

*

나와 알레나는 수도에 있는 내 임시숙소로 향했다.

조용히 대화할 곳이 필요하기도 했고, 파베라에게 요청할 것도 있었다.

거실로 들어서는 나를 반갑게 끌어안으며 파베라가 볼을 부볐다.

“너 황궁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다고 요 감촉이 그새 그립더라. 황궁 생활은 어때?”

“평범해. 황자궁은 본궁이랑 멀리 떨어져 있어서 되게 조용하더라고.”

내 뒤로 들어오는 알레나와 파베라 사이로 눈인사가 오갔다.

“언니 나 얘랑 이야기할 게 있어서 잠시 후 내려올게.”

“그래. 나도 할 얘기 있으니까 까먹고 그냥 가면 안 된다?”

“응응.”

알레나의 손을 잡고 방으로 올라가 내 방 창문을 활짝 열었다.

눈이 시릴 만큼 기승을 부리던 햇살이 오후 3시를 넘기며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나는 눈이 부셔 감았던 눈을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이 없어도 청소를 잘 해놨네.”

방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런데 왜 저 아이는 방문 앞에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서 있을까.

“레나야 뭐해. 앉아.”

낯선 세계에 떨어진 사람처럼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알레나는 그제서야 테이블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빌론에 있는 네 방도 이 방이랑 비슷해?”

어수룩해 보이는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며 묻는다.

“프리지아가의 내 방은 다르지. 물건이 훨씬 많지. 여긴 그냥 잠시 머무는 숙소잖아.”

“그렇겠네.”

“너 이제 할 이야기가 있잖아. 케이크가 필요한 이야기야 술이 필요한 이야기야?”

알레나 앞에 마주 앉으려던 나는 의자를 빼다 말고 그녀에게 물었다.

길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나누기엔 테이블 위가 허전했기 때문이었다.

“하하… 술이랑 케이크 다 요청해도 돼?”

“왜 안 돼. 되지.”

아 드디어 웃는다.

황실 서고에서부터 황궁을 빠져나와 이 방에 들어오기까지 내내 표정이 굳어 있어서 신경 쓰였는데.

“금방 가져올게.”

나를 올려다보며 웃는 그녀의 머리를 살갑게 쓰다듬은 후 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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