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64)화 (64/134)

64화

알레나는 읽고 있던 두꺼운 책을 내가 볼 수 있도록 거꾸로 돌렸다.

내가 읽기 쉽도록 그녀가 읽을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주위에 사람이라곤 경비병뿐이었지만 아무래도 도서관이니, 알레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리베르 1세가 동제국 황실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이능 때문이었다. 이능은 그의 피를 타고 내려가 후손들에게서도 발현이 되었는데, 점점 약해지던 이능이 리베르 5세에 가서 다시 강하게 발현되었다. 이거 이상하지 않아?”

“그러네.”

저주가 시작된 것도 리베르 5세.

옅어지던 이능력이 강하게 발현된 것도 리베르 5세.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이상했다.

“다른 건? 저주의 역사 말고 치료제에 관한 내용은 없어? 내가 읽은 문서 중에선 치료제를 언급한 것조차 찾기가 힘들었어.”

닿을 시에 치료가 된다는 내용 외엔 없었다.

널리 알려져서 시골 개도 아는 내용뿐이었다.

“리베르 황가가 저주를 피하기 위해 무슨 짓들을 저질렀는지 이 문서에 나와 있어.

읽다 보면 아무리 황족이라 해도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은가 싶은 내용들까지 상세히 나와. 그리고 이건 리베르 황가가 자랑하고 싶어 할 만한 내용이 절대 아니야.

어찌 보면 수치스러울 만한 내용이지. 그런데도 이 문서는 그것까지 다 기록해 놓았어. 그런데도 치료제 이야기는 없다는 거야.”

그 말은 이 정도 황실의 치부까지 문서에 공개하는 황실에서도 감추고 싶어 하는 무언가가 치료제와 얽혀있다는 소리였다.

손에 쥔 문서를 흔들면서 열변을 토했다.

그때 고개 숙인 내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는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누구야?’

나일이랑 너무 닮았어.

흑발에 흑안, 그리고 빼다 박은 이목구비.

마치 나일의 20년 후를 보는 듯한… 미래로 순간 이동한 건가.

뻔한 답인데도 나는 너무나 똑같은 얼굴이 마냥 신기해 그저 그를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그런 내 표정이 재미있었나.

그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내게로 허리를 숙였다.

“귀여운 숙녀분들께서 열심히 리베르 황가의 저주와 관련된 문서를 읽고 있다라….”

그가 책상에 가득 쌓인 문서와 책들을 뒤적거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알레나가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켜 예를 갖췄다.

“동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 위대한 유전자의 힘이여.

그의 정체를 알레나의 입을 통해 깨달은 나 역시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뒤로 황제를 모시는 시종 둘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세상에나 남주의 아빠라니.

나일도 20년 후에 이렇게 늙는 건가.

그렇다면 난 애써 접었던 마음을 다시 펴야 할지도 몰랐다.

20년 전에는 새까만 흑발이었을 머리 중간중간에 희끗희끗한 새치가 섞여 있었고,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에는 편안해 보이는 주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흑요석처럼 까만 눈동자만은 빛바래지 않고 생생했다.

그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한 것이 그의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나일 이놈… 20년 후에도 미남이겠구나.’

순간 나일이 20년 후에도 이 정도로 잘난 놈이라면 내가 공작을 물리치고 그를 차지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스운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감정이란 시시때때로 변화무쌍한 것이라, 그를 좋아하는 내 감정도 1년, 5년… 몇 년 후엔 식어서 사라지겠지 생각해 고이 접어 마음 안쪽에 묻었는데.

이 정도면 20년 후에도 내 감정이 그대로이지 않을까.

“못 보던 영애들이 도서관에서 황가의 저주와 치료제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고 있다면… 그대들이 누굴까.”

“죄송합니다 폐하.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알레나는 황제가 비꼬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지~ 이 또한 내게 그대들의 정체를 추측해 볼 기회를 준 것이 아닌가. 어디보자….”

황제가 나와 알레나를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장난기가 어린 눈가라고 생각했는데 훑는 시선이 매서웠다.

“저주에 관해 직접 찾아볼 만큼 관심이 있는 이들 중에 내가 모르는 이들은 없으니, 그대들은 이번에 황자의 치료제로 들어온 세 곳 중 한 곳의 영애들이겠군. 루메낙가 어린 영애라고 하기에 둘은 너무 크고, 오센 왕국의 공주는 제 아비를 빼닮았다니 또 아닌 거 같고… 그렇다면 남은 곳은 멘데인가.”

“황제 폐하. 멘데 공작가의 둘째 멘데 알레나입니다.”

그제서야 알레나가 제 이름을 말했다.

황제에게 고개 숙인 채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그녀의 두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두려울 만한 상황인가?

원작에서도 황제가 나온 적은 없으니 내게는 그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다.

다만 알레나가 극도로 긴장한 상태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알레나를 바라보며 황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대의 아비는 내 본적이 있는데… 그대도 있던가?”

고개 숙인 정수리만 보아도 그녀가 대답을 신중히 고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감사하게도 폐하께서 저희 멘데 가문을 동제국의 일원으로 받아주셨을 당시에, 공작님을 따라 황궁에서 폐하를 뵌 적이 있습니다.”

단어를 고르고 있었구나.

알레나는 복속시켰다라는 말 대신 동제국이 멘데 왕가를 받아주었다는 표현을 썼다.

드레스 자락을 쥔 그녀의 주먹이 잘게 떨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구만. 그렇다면 이 쪽은….”

내 차례가 돌아왔다.

황제가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피기 란셀롯입니다.”

낯선 권력자를 앞에 두고 겁을 집어먹은 나는 깊게 고개를 조아렸다.

동제국의 황제라 하면 이 세계의 일인자가 아닌가.

게다가 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도 전혀 없고.

황제에게서 말이 들려오기 전까지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지 못했다.

“란셀롯….”

란셀롯가는 황자도 모르는 눈치였는데 황제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가보다.

그가 내가 돈으로 산 가문명 세 글자를 기억을 더듬듯 발음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겠지.

란셀롯 남작가는 돈이 궁핍해 작위를 팔아넘긴 다 쓰러져가는 가문이었으니까.

내가 치료제도 아니고, 그저 치료제의 시녀로 온 한미한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황제는 내게서 금세 호기심을 거둬갔다.

숙였던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며 곁눈질했을 때, 황제의 시선은 제 자식의 치료제인 알레나에게 옮겨 가 있었다.

알레나를 바라보는 황제의 까만 두 눈에 묘한 빛이 서렸다.

“하하하. 내 이제야 떠오르는군. 멘데 영애.”

그가 즐겁다는 듯이 배를 잡고 웃었다.

“이런 이런… 인상적인 숙녀를 까맣게 기억하지 못하다니… 내 사과하네. 영애를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기억… 해 주신다니 저로서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알레나는 대답하며 드레스 자락을 구겼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알레나는 황제를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이 내겐 보이지 않았다.

“영애의 나라 사랑은 대단하니까 말이지. 이제는 시간이 흐른 만큼 그 사랑이 동제국을 향해 있을 거라 믿고 싶네.”

“….”

황제의 말투는 명백히 조롱하는 투였다.

그에게도 꽉 쥔 알레나의 주먹이 보일 테지.

다행히 이 이상 그녀를 자극할 생각이 황제에겐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이번엔 책상 위 책과 문서로 눈을 돌렸다.

“저주에 대해 무엇이 궁금하지?”

그 질문은 분명 알레나에게 향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온 포탄에 직격탄을 맞고 쓰러진 병사처럼 아무 말도 하질 못했다.

내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주와 치료에 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는지라… 자세히 알면 그만큼 황자님을 편히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답하지 못하고 서 있는 알레나를 바라보던 황제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군. 그래서 소득은 있었나.”

이걸 말해 말아.

물어봐 말아. 이걸 던져 말아.

짧은 침묵 속에서 나는 수십 번을 갈등했다.

동제국 황가의 저주와 그 치료제.

그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정확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대상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물론 황제에게 그럴 마음이 있다면 말이지.

어디까지 물어도 되고 어디까지 물으면 안 되는 걸까.

깊게 파고드는 질문을 던지면 황제인 그가 나를 무례하다 여길까.

아 몰라.

질문 좀 한다고 죽이기야 하겠냐.

우리는 이미 그럴듯한 명분을 댄 상태였다.

네 자식놈 치료 잘해보겠다고 공부한다는데 어쩔 거야.

깊게 찌르는 질문이 싫어도 뭐라고 화낼 건데? 황제에겐 그럴만한 명분이 없었다.

“황제 폐하의 치료제셨던 분께서 어찌 폐하를 치료하셨는지 알고 싶어 온 것인데 소득이 없었습니다. 선대가 경험한 지식을 얻는다면 황자 전하를 치료하면서 실수는 줄이고 효율은 높일 수 있을 텐데, 그 지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여….”

말끝을 흐린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들숨을 크게 들이킨 나는 다시 하던 말을 고했다.

“황제 폐하의 치료제께 도움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치료제가 어디 있는지 당장 말하란 소리였다.

적어도 황제인 당신은 알겠지.

당신을 저주에서 해방시키고 떠난 치료제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

알레나도 내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질문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숙인 얼굴을 살짝 틀어 쳐다보는 시선에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뭐야 나 크게 잘못 한 거야? 이분 설마 폭군이시니?

“영애들이 참… 황자를 치료하는 일에 이리 열정적이라니… 영특한 생각이다.”

황제가 내가 보던 문서를 들어 올리는 바람에, 하얀 종이 너머로 가려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내 황제 된 입장이 아니라 자식을 둔 아비 입장에서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해야겠군.”

그가 고개를 돌려 뒤에 있던 시종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두 영애에게 알맞은 보상을 내리도록 하라.”

황제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가 책상 위로 흩날렸다.

그대로 그가 도서관을 나설 거라 여겼다.

그러나 황제는 나와 알레나를 향해 다시 몸을 돌려세웠다.

“하지만 영특하다고 좋은 치료제가 되는 건 아니라서.”

“….”

“그저 나는… 영애들이 주어진 소임을 다 하는 데 온 노력을 쏟았으면 하네. 황실이 제시해준 선에서 말이지. 그래야 멘데 가문에서 요청한 것들을 내 들어줄 수 있을 게 아닌가.”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몸을 돌려 걸어 나갔고, 두 시종은 우리에게 눈인사한 후 그를 따라 나갔다.

뭔데, 이 난데없는 상황정리 뭔데?

황제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남긴 것은 명백한 경고였다.

궁금해하지 말아라. 너희가 원하는 것을 순탄하게 얻어내고 싶다면 파고들지 말아라.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질문을 무시할 줄은 몰랐는걸.

적어도 치료제는 잘살고 있다든가 하는 사소한 한 마디도 황제는 덧붙이지 않았다.

마른하늘에 소나기처럼 들이닥쳤던 황제 일행이 떠난 후, 굽혔던 허리를 펴며 알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손에 난 땀을 드레스 자락에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황제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는 일을 멈추진 않았다.

“….”

멀뚱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긴장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녀가 내게 눈을 맞췄다.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알레나는 말이 없었다.

“궁금해? 이렇게까지 하면서 내가 치료제로서 얻고 싶은 게 무엇인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