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치료제. 치료제. 치료제.
그렇게 모두가 치료제를 부르짖은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 알레나 멘데와 닿았을 때, 나일은 그녀가 자신의 진짜 치료제임을 알았다.
다른 누구와 더 닿고 할 필요가 없었다.
멘데 영애가 자신의 치료제라는 걸 닿자마자 몸으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다음 날 다른 두 명과 닿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가짜라는 사실뿐이었다.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마치, 허리에 있는 문양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자신의 몸 곳곳으로 퍼져나간 저주를 물어뜯는 느낌이었달까.
그리고 며칠이 지난 아침.
나일은 평소처럼 침대에서 눈을 떴다. 깜깜했다.
다를 것 없는 아침이라 여겼다.
시종이 여느 날처럼 창가로 가 커튼을 걷고, 침대로 다가와 캐노피에 달린 커튼을 들추기 전까지는.
“아침이구나.”
“예, 황자 전하.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나일의 속뜻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시종은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정말… 좋은 아침이군.”
빛이 보였다.
눈을 감았을 때나 떴을 때나 어둠 속이던 다른 날의 아침과 다르게.
그날 아침엔 햇빛이 보였다.
물론 선명하진 못했다.
그저 어둠 속에서 누군가 뭉개놓은 것 같은 희뿌연 빛을 발견했을 뿐이었지만.
얼마 만이지… 1년? 2년이 다 되었었나.
2년 만에 보는 빛이었다.
나일은 일어나 창가로 걸었다.
방 구조야 보지 않아도 훤하니 창가로 다가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전하?”
뒤에서 시종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장소에서 부축 없이 혼자 행동하는 일이야 자주 있는 일이었으니, 시종이 그를 부른 것은 나일이 혼자 움직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떠서 창가로 다가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력을 완전히 잃고 나서부터.
창가에 가 서 보았자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는 2년 만에 제 방 창가로 다가섰다.
“전하….”
그의 행동에서 어떤 변화를 눈치챈 시종이 연달아 그를 불렀다.
“그래. 빛이구나.”
창가에 선 나일이 열린 창 너머로 팔을 휘저었다.
잿빛 속에서 긴 덩어리가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그의 팔이었다.
아직은 어둠과 희뿌연 빛, 그림자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세상에 빛이 돌아온 것이다.
창 너머에서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봄바람이 불어닥쳤다.
“봄 햇살이 내게 돌아왔어.”
“전하아….”
뒤에서 시종의 울먹임이 들렸다.
기뻤다.
자신의 시야에 2년 만에 사라졌던 빛이 제 존재를 드러냈을 때, 나일은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진정 충만한 기쁨이었고 설렘이었다.
그리고 그 환희의 감정 뒤에 납작 엎드려 숨어 있다, 그를 잡아먹듯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였다.
‘살고 싶다.’
진짜 치료제가 나타났으니 이 지긋지긋한 저주로부터 해방되겠구나.
눈을 떠 다시 볼 수 있게 되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저주로 인해 그가 잃어버린 시간이 너무나 많았다.
희뿌연 빛을 느끼며, 나일은 잃어버린 시간만큼 제대로 다시 제 삶을 가꾸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뭉게뭉게 피어오른 그 행복한 상상 아래 숨어 있던 혐오가 이내 그를 잡아먹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죽음을 바라지 않았었나.
그 여자를 다시 볼 수 없는 세상에 더 이상 미련 같은 건 없다 여겼는데, 아니었나.
여자는 그저 핑계일 뿐이고 걸레짝처럼 구겨져 펴질 기미가 없던 내 삶에 미련이 없는 거였나.
나는 손바닥 뒤집듯 이리 쉽게 기뻐하고 있구나.
무엇이 기쁘지.
빛을 되찾은 것?
나를 구하고 사라진 여자는 죽음의 강을 건너버린 건지 어디로 간 건지 알 수가 없는데도 나는 또 이렇게 기쁠 수가 있구나.
그저 작은 빛이 드는 것만으로 기뻐서 이렇게….
인제 그만 삶을 포기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한시라도 빨리 눈을 뜨고 싶으니.
내 마음이 뱀의 혓바닥처럼 간사하구나.
그래놓고 무엇이 슬퍼 나는 울고 있을까.
*
수면 아래로 깊이 빠져들었던 남자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잔물방울들이 햇빛에 몸을 빛내며 부서졌다.
호수에 다이빙하는 남자의 몸에 맞을까 봐 옆으로 슬쩍 몸을 피해있던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살을 헤집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 그가 아직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라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물에 뜨긴 하지만 수영은 못했다.
아마 남자에게로 가까워지는 내 모습은 엉터리 개헤엄을 치는 모습일 것이었으므로.
아이씨. 시종이 있긴 했구나.
뭐 개헤엄이 죄도 아니고 어떤가. 좀 모양 빠지긴 하겠지만.
시종은 원숭이로 한번 분했고, 나는 오늘 개의 모습을 한번 보였으니 쌤쌤이었다.
물에 젖은 그의 모습은.
얼굴선을 따라 잔뜩 달라붙은 흑색 머리칼과 젖어서 투명해진 흰 셔츠차림이,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할 만한 것이었다.
반면에 지금 그에게로 다가가기 위해 호수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은, 멋진 주인을 좋다고 쫓아가는 강아지 같지 않을까.
“황자 전하, 제 말이 맞지요? 정말 시원하죠?”
“….”
그는 정식으로 수영을 배웠나 보다.
방정맞은 나와는 다르게 물 아래서 움직이는 팔다리가 우아했다.
“전하, 왜 멘데 영애를 부르지 않으세요? 제 아가씨는 황자 전하를 치료하기 위해 황궁에 온 것인데요.”
차가운 물에 풍덩 빠지고 나니 드디어 궁금한 것을 물어볼 용기가 생겼다.
그가 씩 입꼬리를 올리며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당연히 궁금했겠지만… 너는 참 대놓고 물어보는구나.”
그래서 기분이 나쁘다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며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황자 전하~~ 감기 걸리십니다.”
“네놈이 그렇게 환자 취급을 해대니 이 영애도 날 환자 취급하는 게 아니냐. 호들갑 그만 떨어라.”
“저 시종장 어른한테 혼납니다.”
그때, 그가 물속에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저 끝 보이나.”
긴 인공호수는 본궁 뒤로 쭉 이어져 있었다.
건물에 가려져 있어 끝이 보이진 않았다.
“헤엄칠 수 있겠지?”
그 말만 남기고 그는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헤엄… 개헤엄으로 가기엔 좀 멀어보지만 그래, 오라면 가야지.
혹 뒤처질까 나는 열심히 팔다리를 휘둘렀다.
*
긴 호수를 쭉 헤엄쳐 나아가던 그가 중간쯤에서 돌연 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더듬더듬 손을 짚어가며 풀밭에 올라선 그는 젖은 몸을 바람에 말렸다.
바람 속에서 내가 물을 먹고 캑캑거리는 소리가 들렸나 보다.
그가 실실 웃음을 흘렸다.
“대뜸 수영한다고 호수로 들어가더니 수영 실력은 영….”
“이따가 방으로 돌아가셔서 시종한테 제 수영 실력이 어땠냐고 묻지 말아 주십쇼. 전하.”
“하ㅎ….”
젖어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물에 젖은 드레스는 정말 무게가 어마어마하구나.
물먹은 천을 쥐어짜길 반복하던 나는 냅다 드레스 자락을 던지고 잔디밭에 몸을 뉘었다.
“누웠어?”
“예. 황자 전하도 언젠가 드레스 입고 수영을 해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제가 왜 이 옷을 입고 물에 들어갔을까요.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 같네요.”
내가 누운 옆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왜. 덕분에 시원했는데.”
“전 사실 추웠습니다. 들어가자마자 후회했습니다.”
“….”
“황자 전하.”
봄 햇살에 젖은 몸이 말라가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정말 좀 추웠다.
그나마 햇볕이 따가워서 다행이었다.
그를 불러놓고 말은 하지 않고 누워서 남자의 얼굴만 바라보던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먼저 부르지 않으셔도… 저랑 제 아가씨가 치료해드리러 가도 됩니까?”
“왜.”
“….”
“나를 빨리 낫게 하면 누가 상이라도 준다고 약속했나?”
“당연히 주시겠죠. 황자 전하께서.”
“….”
“설마 다 낫고 입씻고 말 생각이셨던 건 아니죠? 양심이란 게 있으실 테니 설마 아니겠죠.”
“너 황족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별다른 대꾸를 하진 않았다.
그저 그의 옆에 앉아 부는 바람과 햇빛을 만끽했다.
이럴 때 닿으면 좋을 텐데.
손이라도 훔쳐다 잡고 싶은데 그러면 무례하다고 하겠지. 아쉬워라.
“다 나으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
조용히 몸을 말리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제 없구나.”
이거 설마… 내 이야기인가?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확실히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긴 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로건과 서사가 많이 쌓였을 텐데도 내 이야기가 이렇게 나올 정도면….
‘네 이놈 확실히 나한테 반했었군. 음.’
기분이 괜찮은걸?
아니… 기분이 좋은데?
호수 안에서 가라앉는 그를 수면 위로 밀어 올리며.
살면서 가끔은 그가 나를 기억해주길 바랐었는데, 실제로 은연중에 나를 떠올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 또 코끝 찡해진다. 찡해져.
“왜 갑자기 코를 훌쩍대? 감기 걸린 건가?”
“아뇨. 코로 들어갔던 물 빼는 중인데요.”
“도대체 그 잠깐 수영하는데 코로 입으로 물을 얼마나 먹은 건가.”
“제가 물먹은 얘기는 됐고요 황자님. 그래서 그… 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얘기나 마저 들어보고 싶은데….”
그래. 난 너한테서 내 얘기를 더 듣고 싶다고.
이왕이면 참 예뻤다는 말도 좀 얹어주고, 잊지 못할 고마웠던 사람이라는 표현도 넣어주고 말이지.
어떤 보상을 바라고 그를 구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내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을 듣고 있자니 기대하지 않았던 보상을 받는 기분이라 좋았다. 솔직히 기뻤다.
맞겠지 내 얘기? 나 김칫국 마신 거 아니지?
“그 보고 싶은 것은 사람인가요 물건인가요?”
“장면이다.”
“장면이요?”
“그래. 장면. 시간이 흘러 그곳으로 돌아갔을 때 그 여자가 날 보고 웃는 장면.”
“….”
“아주 오랫동안 그 장면을 상상했었는데.”
이상하네.
남자가 하는 내 이야기를 듣는데 점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몸을 기울여 그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무슨 표정으로, 무슨 얼굴로 저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싶었다.
웃는 얼굴의 나를 만나는 상상을 한다면서 그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고이는 침을 삼켰다.
목젖이 꿀꺽 아래로 움직였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침 삼키는 소리가 그에게 들렸으려나.
“란셀롯 영애도 소녀 같은 데가 있군.”
“네?”
“사랑 이야기에 이리 집중하는 걸 보면 그렇지 않은가.”
“사랑… 이거 사랑 이야기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