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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60)화 (60/134)

60화

집무실엔 나일과 알레나 그리고 나뿐이었다.

방 한가운데, 작고 낮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황자가 앉아 있었다.

셋 다 말은 없고, 창도 문도 죄다 닫혀 있어 황자의 집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알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알레나 멘데,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앉으세요.”

그가 자연스럽게 제 옆 좌석으로 팔을 뻗었다.

“란셀롯 영애도 같이 오지 않았나?”

“아… 예. 란셀롯 남작가의 피기 란셀롯 황자 전하를….”

“어제 본 사이니 인사는 짧게 하지.”

그럴 거면 왜 찾아 이씨.

그가 볼 순 없어도 예의를 차리려 무릎을 어여쁘게 접었던 나는 엉거주춤하게 다시 몸을 일으켰다.

“….”

자 이제 둘 사이에 진행될 신체접촉 현장의 증인으로 온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

때가 되면 알레나와 자리를 맞바꾸어야 할 테니 가까운 곳이 좋겠지.

나는 알레나가 앉아 있는 좌석 뒤편으로 몸을 옮겼다.

“일단… 내게서 저주를 걷어가 주실 분이니 미리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말과 잘 어울리는 사무적인 미소를 그가 제 얼굴에 띄었다.

그리고 이어진 뒷말은 앞말에 담겼던 호의가 싹 빠져 있었다.

“잘 치료가 되어 지금 한 감사 인사가 무용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멘데 영애.”

그는 아직 누가 치료제인지 모르는 상황이니.

나일이 한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은 알레나가 대답했다.

“황자 전하의 옆에 치료제가 있지 않습니까. 미리 해주신 감사 인사는 잘 넣어두었다가 치료가 다 끝난 이후에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군. 진짜가 아니라면 어젯밤 당당히 얘길 하던 그대의 태도가 우습게 되어버릴 테니.”

“….”

“시종장에게 이 방에 들어와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미리 들어두었다 알고 있으니 이제 시작해도 되겠지….”

나일은 말과 함께 기다란 붉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기다렸다는 듯 알레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일의 곁으로 가 앉은 것은 나였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일은 시각을 잃게 된 자의 절망, 그것을 다시 예전으로 돌릴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함, 어서 빨리 치료를 받고 싶은 조급함, 기대감, 희망 등이 뒤섞여 있을 제 감정 중 어느 것 하나 내보이질 않고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다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린 것인지, 꼭꼭 숨기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든 이제 되었다.

지금 내가 그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으니까.

나는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

마디마디가 도드라진 그의 큰 손은 따듯하지만 거칠었다.

보기에도 윤기라고는 전혀 없었던 손톱을 문지르자 역시나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아 로션을 듬뿍 발라주고 싶다.

그의 손을 내 양손 안에 가두고 조물조물 해봐도 느껴지는 것은 비쩍 메마름과 건조함뿐이었다.

“가만히 잡고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굉장히 주물럭거리는군.”

나일이 불쾌함 어린 어조로 낮게 읊조렸다.

아 이런. 너무 떡반죽 주무르듯 주물렀나 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알레나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사과든 변명이든 나 대신 뭐라고 대꾸를 해달란 의미였다.

알레나가 원망의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내 바로 뒤에 서 있던 알레나가 조심스럽게 내 어깨쯤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주 치료와 혈액순환까지 일석이조로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이니 좋게 생각해주십시오. 황자 전하.”

“….”

그녀가 내게 눈짓했다.

해야 할 일을 빨리 끝내고 나가자는 의미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해진 대사를 읊어주시길.”

알레나의 말에 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릴 듯 말 듯 옅은 한숨을 내쉰 그의 입에서 예정된 대사가 흘러나왔다.

“그대가 저를 낫게 해주시겠습니까?”

“기꺼이 그대에게 제 모든 것을 드리겠나이다.”

내 어깨 위에서 들리는 알레나의 목소리를 속으로 따라 읊었다.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삶이 다시 충만할 수 있도록 기꺼이 당신에게 제 모든 것을 드리겠나이다.’

그것이 치료의 시작을 알리는 주문 같은 대사였다.

정해진 말을 속으로 외자, 문양이 새겨진 발목이 간지러웠다.

미온한 열감인 줄로만 알았는데 곧 발목이 타는 듯 뜨겁기 시작했다.

그 역시 지금 나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겠지.

감긴 그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되었다.

이제 그와 자주 닿기만 하면 될 것이다.

타들어 가는 듯한 열감이야, 대상의 치료제가 되겠다는 선서를 외는 오늘 말고는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원작 속 황자의 서술로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치료제와 닿아서 어떤 특별한 증상을 느낄 수 있는 건 첫날뿐이다.

그러니 이제 어떤 식으로든 자주 닿으려는 노력만 하면 쉬이 그를 치료할 수….

“…?”

내 두 손에 얌전히 잡혀있던 제 손을 나일이 갑자기 훅 빼갔다.

내가 알레나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었기에 직접 말을 할 수 없어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알레나가 얼른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

“….”

그가 큰 손으로 제 눈가를 가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나는 그의 붉은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몇 번인가 달싹거리던 그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

“나중에 다시 뵙죠. 나가세요.”

얼굴을 반쯤 가린 그가 조용히 반대쪽으로 돌아앉았다.

너무 강경한 축객령인지라 이유를 묻기도 어려웠다.

알레나가 나가자는 의미로 슬그머니 내 어깨 위로 얹는 손길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행동에 맞게 알레나가 때맞춰 입을 열었다.

“물러가겠습니다.”

방을 나가며 뒤를 돌아봤을 때도 그는 제 얼굴을 손으로 덮고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건가?

바뀐 것은 없는데… 소설에서 보았던 치료제와 대상의 첫날 그대로의 상황인데….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알레나가 방 밖으로 잡아끌었다.

*

그날 우리 뒤로 예정되어 있던 다른 치료제들과의 대면은 그다음 날로 미뤄졌다고 했다.

나머지 둘과도 나와 동일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럼 이제 알았겠지.

손을 맞잡고 대사를 외우는 순간, 몸에 새겨진 문양에 반응이 일어났던 것은 내가 유일했을 테니.

누가 진짜 치료제고 누가 가짜 치료제인지 다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안 부르지.’

왜 안 부르는 거냐 도대체.

그날 첫 대면 이후로 황자에게서는 다시 접촉(?)하자는 부름이 없었다.

그도 아마 황제에게 말로만 들었던 일들을 직접 경험해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신기하고 기쁘고, 이제 치료될 일만 남았으니 눈을 뜨자마자 무엇부터 볼까,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던 일 중 무엇부터 할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잔뜩 스쳤겠지.

근데 왜.

‘안 불러?’

너 이 자식 눈을 뜨고 싶은 마음이 없어?

황자궁 중정에 마련된 티 테이블에 앉아 홍차를 마시던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두통이 있으십니까?”

“아뇨 두통까지는 아니고….”

답답한 속에 식은 홍차를 들이붓는 나를 앞에 앉은 시종장이 빤히 바라보았다.

너네 황자 왜 그러냐.

맘 같아서는 이렇게 묻고 싶은데.

“저 황자 전하께선….”

“예, 아무도 찾질 않으십니다.”

시종장도 마음이 착잡한지 볼을 찡그렸다.

“저도 걱정입니다. 왜 아무도 찾지를 않으시는지… 서먹해서 그러시는지.”

서먹하다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할 치료를 받지 않을 만큼 머저리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렇게 닿지 못하고 시간만 흐르면….

‘여름이 오기까지 눈을 뜨게 만들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으면 스킨쉽의 수위를 높이는 수밖에 없단 말이다.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시간만 보내는 것은….”

“예, 저도 방도를 고민해 보겠습니다.”

하, 생각 같아서는 어디 짱돌 같은 거로 확 뒤통수를 갈겨서 정신을 잃게 만든 다음 감금해놓고 며칠 끌어안고 있으면 딱 치료 끝나고 좋겠구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황자 전하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전하는….”

테이블을 양손으로 박차며 일어난 나를 시종장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환자가 병원에 오지 않는다면 의사가 가는 수밖에.

*

시종장이 말해준 장소는 황궁 본궁으로 가는 길에서 시작되는 긴 인공호수였다.

나무로 우거진 호수 안쪽에 작은 정자가 있었다.

정자 주위로 흰 천이 차양처럼 늘어져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곳에 엄마한테 혼이 나서 마음이 몹시 섭섭해진 어린아이처럼 황자가 구겨져 있었다.

세운 무릎을 양팔로 꼭 끌어당겨 앉아 있는 모양새가 딱 그랬다.

우리 엄마는 날 왜 이렇게 혼내는 걸까? 내가 미운 걸까? 이런 생각을 하기에 좋은 자세가 아닌가.

왜 저런 자세로 그는 혼자 앉아 있는 걸까.

물론 그 주변엔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시종이 멀거니 서 있긴 했지만.

‘설마 나랑 닿았을 때 아무 반응이 없었나?’

나만 뜨거웠던 거야? 그래?

치료제랑 닿아서 이제 치료가 되겠거니 여기며 잔뜩 부풀었는데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던 거지.

그래서 저렇게 시무룩한 표정인 게 아닐까.

‘그럴 리가. 나 치료제 맞는데.’

“….”

황자 측에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으니 오만 상상이 다 들었다.

그는 왜 알레나를 부르지 않는 것이며, 다른 가짜 치료제들은 왜 그대로 황궁에 두는 거고, 왜 또 저렇게 슬퍼 보이는 걸까.

누가 힌트라도 줘야 보기를 몇 가지로 줄일 텐데, 그런 게 없으니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은 오만가지였다.

‘물어보자.’

명확한 답을 솔직하게 말해주진 않겠지만, 그와의 대화에서 적어도 어떤 힌트라도 얻을 수 있겠지.

결정한 나는 그에게로 발을 옮겼다.

“어…?”

다가가는 발걸음 소리에 먼저 반응한 것은 시종이었다.

아니 저분은 그때 그 원숭이 씨군.

나를 발견한 그가 나일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아마 내 이름을 말했겠지. 나일이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

뭐라고 첫말을 떼야 할까.

황자님 치료받기 싫으세요? 눈 뜨기 싫으세요? 저주랑 지내다 보니 사이가 좋아지셨어요?

이 중에서 고르면 질문과 함께 목이 날아가겠지.

내가 있는 어디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무감했다.

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혀끝에 매달려 입 밖으로 떨어지질 않았다.

나가라 말아, 나가! 말을 해! 그러려고 온 거잖아!

지금 와 생각해봐도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당최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더워서요. 수영하려고요. 괜찮죠 황자 전하?”

거칠게 구두를 벗어 던지고, 나는 눈앞에 보이는 인공호수로 달려 나갔다.

“어어… 란셀롯 영…!”

흥분한 고릴라처럼 호수로 뛰어드는 내가 보이는 시종의 두 눈은 크게 뜨였고, 나일은 풍덩 하는 소리가 날 때까지 상황을 알지 못해 멍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눈썹이 구겨진 건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그의 얼굴로 튀었을 때였다.

“황자 전하. 물이 시원합니다. 들어오실래요?”

그날 나는 살짝 맛이 가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렇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분명 그의 어떤 행동을 끌어낼 수 있겠지.

그런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저 충동적이었다.

연못가에만 가도 발을 적시고 싶어서 안달 나 하는 아기들처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호수로 뛰어들었고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아직은 물이 차게 느껴질 계절이지 시원할 계절은 아닌데.”

그가 내 말에 대꾸해줄 거라고도 예상하지 못했다.

황당한 발언이었으니 무시당해도 별수 없으리라, 그리 여겼는데.

“영애 물이 정말 시원한가?”

“네 진짜 기분 좋은데요!”

그가 일어서더니 엉덩이를 털었다.

“전하는 환자시니 물이 차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내 말에 목을 꺾던 그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하… 지금 황자를 희롱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열심히 치료받으셔야 할 분이 치료제를 찾지 않으시니 몸 상태가 그대로 일 거 아닙니까. 제국민으로서 드리는 걱정입니다.”

“별걸 다….”

나는 물속에서 열심히 다리를 휘저어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젖혔다.

너풀거리는 하얀 셔츠 차림의 그가 입수를 앞에 두고 몸을 풀었다.

그에게 다가온 시종이 나일을 말렸지만 그는 제 시종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말리지 마라. 가녀린 영애에게 환자라고 무시당하는 황자가 되어서야 쓰겠느냐.”

“몸 열심히 푸십시오 전하. 환자에겐 너무 차서 몸이 경직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하하… 정말 영애는 별걸 다….”

풍덩.

몸집이 커다란 남자가 물속으로 입수하여 수면이 크게 출렁거렸다.

“걱정해주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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