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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59)화 (59/134)

59화

“….”

“좋으셨습니까?”

“….”

잠결에 흘린 땀이 밴 나일의 로브를 치우며 시종이 말했다.

그가 다가와 익숙하게 나일에게 새 로브를 걸쳤다.

“그게 뭐 이상합니까? 잘 모르는 여자더라도 안으면… 향이 좋아서 좋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언제나 좋을 수도 있고.”

“결국 네놈은 다 좋다는 말로 들리는군.”

“네 전 대부분 좋아합니다.”

“그 얘긴 되었다. 시종장은?”

시종이 제 말을 못 들은 모양이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고 부스럭대는 소리만 들리더니, 어느새 시종이 다가와 그의 팔을 부축했다.

“욕실로 모시겠습니다.”

“왜.”

아침은 원래 간단히 방에서 씻는 게 일상인데 왜 이놈이 오늘 이렇게 부산을 떨까.

나일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이잖습니까. 치료제 분들과 닿는 날이. 전하께서는 아주 깨끗이 씻으셔야 합니다.”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어차피 오늘은 첫 대면이니 얼굴이나 트고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하고, 그게 끝이었다.

“어제저녁 내내 욕조에 있었는데 아침부터 무슨 유난을. 세숫물이나 떠 와라.”

나일은 제 몸을 침대 밖으로 잡아끄는 시종의 팔을 걷어내며 말했지만 시종은 요지부동이었다.

“유.난.이.라.니.요.”

오늘 이놈이 아주 여러 가지를 선보이는군.

말을 한 자 한 자 끊어가며 대답하는 시종을 향해 나일이 미간을 구겼다.

“황자 전하. 빨리 앞을 보고 싶으시지 않습니까?”

“….”

“저는 대충 들어서 잘 모르는데 치료제랑 많이 닿으면 닿을수록 치료가 빨리 된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빨리 친해져서 빨리 닿아야 할 것 아닙니까.”

시종의 말은 맞는 말이었으나 나일은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과 첫 만남부터 크게 뭘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빠르든 늦든 치료만 되면 그만이다.”

얼마나 차이가 있다고.

어차피 앞을 못 본 지가 몇 년인데 그 얼마간의 시간을 못 견딜까.

“에에? 닿는 게 무섭기라도 하십니까? 어젠 좋으셨다면서요. 그 영애 말입니다.”

“그건….”

나일은 괜히 턱을 문질렀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닿았다고 기분이 좋아질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여자랑 너무 오랜만에 닿아서 그런 겁니다. 아니, 여자를 만져보신 적은 있습니까?”

“만… 그러니까 내 기분 좋음이 그저 육체적으로 이성과 닿아서 그런 거란 말이냐? 상대를 좋아하고 말고 상관없이?”

시종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 상관을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제가 차마 말로 대답은 못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앞을 보실 수 있다면 표정을 보여드렸을 텐데.”

“무례한 원숭이 놈이….”

그 여자가 생각나서, 어제 영애한테서 그 여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나일은 오랜만에 느끼는 제 낯선 기분을 그렇게 정의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내 정신이 육체에 끌려갈 리 없지.

저 시종놈처럼 그저 여자라면 정신 못 차리는 놈들이야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단계는 정하셨습니까?”

“1단계.”

“하….”

치료제와 짙은 신체접촉을 나눌수록 저주는 빠르게 치료된다.

1단계는 손을 잡는 것 정도의 스킨쉽.

2단계는 껴안는 것이고 3단계, 4단계는….

‘무슨 첫 대면에 단계를 논한단 말인가. 당연히 1단계지.’

나일은 고개를 저었다.

“곱게 자란 귀한 아가씨들이 아닙니까. 수동적으로 나올 테니 황자 전하께서 적극적으로 하셔야 되는데.”

“아 그만하래도. 시종장은.”

“시종장 어른은 전하의 치료제 분들께 갔습니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으신가 봅니다. 아침부터 정신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때마침 하녀가 방으로 세숫물이 든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나일은 그 안으로 손을 담갔다.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자 그때까지도 남아있던 졸음이 싹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때 시종이 다가와 나일의 귓가에 속삭였다.

“또 모르죠. 치료제 분들과 닿으면서 접촉의 기쁨을 알게 된 전하께서 그 이상을 하려 하실지.”

“이 자식이 아침부터… 돌았느냐?”

나일은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얼굴을 닦던 수건을 집어 던졌다.

앞이 보였으면 제대로 한 대를 때려줬을 텐데.

그가 시종의 숨결이 닿았던 귀를 감싸며 몸서리쳤다.

“하핳, 전하께서 하신 말씀 아닙니까. 그 영애와 닿았을 때 좋으셨다고.”

“다물어라.”

그건 그저… 착각이었을 뿐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를 대상으로 내가. 그럴 리가 없지.

그가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

결국 나일은 아침 댓바람부터 시종에게 끌려가 향유를 잔뜩 푼 욕조에 담가졌다.

‘향유를 얼마나 푼 거지.’

이 정도면 향이 몸에 밴다기보다 향에 절여지는 수준 아닌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이니 이 물을 내다 버리고 새 물을 길어오라고 할까 하던 나일은 그냥 관두자 싶었다.

아침부터 시달린지라 만사가 다 귀찮군.

그때 욕실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시종장입니다. 황자 전하.”

“들어오게.”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욕실을 꽉 채웠던 습기가 열린 문 사이로 빠져나갔다.

나일은 허공에 급하게 손을 저었다.

“문 닫지 마 열어놔.”

“예, 어우. 이게 무슨.”

시종장은 욕실로 들어오며 코부터 막았다.

습기와 진한 꽃향기가 숨을 막히게 했다.

“벤자민 짓입니까?”

“그놈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하겠어.”

시종장이 욕조 주변을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고, 이내 닫혀있던 욕실 창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으로 습기가 빠져나가고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자 그제야 나일은 살 것 같았다.

“전하께서 꽃단장 중이시라고 오는 길에 듣긴 했습니다만, 이 정도면 한 송이 꽃으로 거듭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종장의 진지한 농담에 나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처리한 일은?”

나일이 묻자, 욕조 곁에 와 선 시종장이 색출해 낸 첩자 목록을 읽었다.

동제국 황실에선 서제국 측 동향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평화 협정을 맺은 지 어느덧 2년이 흘렀다.

겉으로야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잔잔한 수면 같은 평화 상태였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서제국에선 꾸준히 동제국 황실에 첩자를 심었다.

얼마 전에도 서제국 측에서 심어놓은 첩자들을 색출해 냈다.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또다시 기존의 누군가에게 이미 접근했거나, 새로운 첩자를 만들어 심었을 것이다. 아니면 오는 중이거나. 

“계속 발각되어 처리되는데도 참 꾸준하군.”

“….”

“일단 황궁에 새로 들어온 자들의 신분을 뒤져봐. 신분을 조작해 들어왔다면 그들이 제일 의심스러운 자들이니까.”

“예.”

“그렇다고 신분이 확실한 자들이면 경계를 게을리 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닌 거 알지?”

“예. 전하.”

잠시 머뭇거리던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치료제 분들의 뒷조사도 포함하시는 겁니까?”

“내가 언제 그들이 예외라고 한 적이 있나?”

“알겠습니다.”

진짜가 아님에도 치료제로 위장까지 해서 황궁에 들어온 목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일차적인 목적은 치료제가 받게 될 보상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럼 오늘 예정대로 1차 대면을 진행하시겠습니까?”

“그러지.”

과연 가짜들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준비를 해왔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진짜 치료제인지는 오늘 닿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제 아비인 황제에게 들었던 것이 있으니까.

*

식사는 방으로 배달되었다.

“나랑 같이 들어갈 거잖아. 쪽수는 우리가 더 많아. 우리는 둘 황자는 혼자.”

시시껄렁한 농담을 지껄이자, 알레나가 힘없이 내려가 있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원작에서 황자가 피비에게 치료를 받던 장소는 황자의 집무실이었다.

방엔 황자와 치료제인 피비, 그 둘만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치료제로 선택된 피비는 시녀와 함께 방에 들어갔어야 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영애에겐, 치료제로서 황자와 닿은 부위는 손 정도가 다였습니다, 라는 증언을 해줄 증인이 필요했다.

미혼의 영애가 황자와 방에서 단둘이 있었다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상상할 여지를 남겼으니까.

치료제가 황자의 반려자로 직행할 게 아니라면, 황자를 치료한 이후의 삶을 위해서 불미스러운 소문은 피해야 했다.

하지만 피비는 시녀를 밖에 두고 혼자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와 어떻게든 단둘이 남아 친해지고자 노력했으니까.

“많이 먹어 많이.”

샐러드를 질겅질겅 먹는 표정이 참.

얘도 음식을 복스럽게 먹는 타입은 아니라니까.

날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너나 잘해.”라고 말하는 듯했다.

맞다. 누구 보고 잘 먹으라고 말하니.

내 그릇 위에도 음식이 줄질 않는데.

“하아.”

원작이 바뀌었다.

그대로 진행되는 것들도 있었지만 나와의 만남으로 인해 황자의 실명 시기가 바뀌었고.

진짜 치료제인 나는 가짜 치료제의 시녀 신분으로 들어와 있고.

또 원작의 치료제는 한 명이었는데 지금은 치료제라 주장하는 이들이 셋이나 있다.

그럼 다른 것들은?

내가 눈치채지 못한 곳에도 바뀐 부분들이 있겠지.

‘앞으로 뭐가 더 바뀌려나….’

내가 죽지 않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게 원작대로 흘러간다면 난 다른 걸 신경 쓰지 않고 황자를 치료하는 데만 집중하면 되겠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뀌면 안 될 부분들이 바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일단 테러.

전쟁은 종식되었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원작 속에서 서제국은 동제국 황실에 테러를 일으킨다.

다행히 원작대로 흘러간다면 로건이 멋지게 해결하고 나일을 구해내겠지만.

‘그것도 바뀐다면?’

내가 이렇게 걱정하는 이유는 그 테러를 일으키는 주된 요소 중 하나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내가 서제국이 테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정보를 넘기는 첩자였으니까.’

원작의 피비는 눈에 가시 같은 공작을 제거해준다는 이유로 서제국 측에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난 지금 첩자가 아닌걸.

그렇다면 첩자가 사라졌을까? 테러는 일어나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크게 바뀌었을 리가….

‘그럼 나 말고 누가 첩자인 거지.’

차라리 내게 접선해왔다면 파악하기 쉬웠을 텐데, 내가 정체를 숨기고 있으므로 나는 아예 접선 목록에서 빠진 거겠지.

피비는 황자의 바로 곁에서 그의 동선을 다 파악할 수 있는 최측근이었다.

아마 피비 대신 누군가가 첩자 노릇을 하게 된다고 해도 신분이 크게 차이 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말단 사용인들은 아닐 것 같고, 그렇다면.

‘가짜 치료제 중 한 명인가.’

원래 피비가 원작의 치료제였으니 그와 가장 비슷한 가짜 치료제 중 한 명에게 접선이 가지 않았을까.

‘아니 내가 왜 테러방지까지 해야 하냐고.’

하지만 손 놓고 있다가 원작이 많이 바뀌면?

첩자가 달라지고 테러의 양상도 달라지고, 그래서 원작보다 더 큰 테러가 발생해서 로건이 나일을 구하지 못하면?

열심히 치료해서 건강하게 돌려놔봤자 죽는 거잖아!

“여름이 오기 전까지야.”

“뭐가.”

“우리가 황자를 치료해야 하는 시기.”

“그렇게 빨리?”

“어 빨리… 좀 빠듯하겠지.”

왜냐하면 이 망할 원작은 19금이었으니까.

게다가 피비는 황자를 좋아해서 막 으읍, 읍, 하는 강도 높은 스킨쉽으로 그를 치료했으니까.

알레나도 걱정이 되나 보다.

그녀가 접시 위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럼 도대체 얼마나 자주 닿아야 하는 거야?”

“글쎄….”

거의 부둥켜안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러면서 첩자도 찾아내야 하고.

아주… 바쁠 것 같다 야.

*

예정된 오후 3시까지 30여 분이 남았을 때였다.

- 똑똑

시종장이 들어와 때를 알렸다.

황자의 집무실로 들어가기 전, 거쳐야 할 과정이 더 남아있었다.

집무실이라는 밀폐된 공간에 황자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나와 알레나는 간단한 몸수색을 받아야만 했다

몸수색을 마친 후 그들은 청결도를 체크 했다.

그래, 황자의 치료제로서 들여보내는 것인데 아무렴 청결해야겠지.

그렇게 모든 사전 과정을 끝마치고 시종장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세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넓은 복도를 울렸다.

“긴장 풀어.”

“너나.”

한마디를 안 져요.

이 모든 대화가 들렸을 텐데 황자의 집무실 앞까지 가는 동안 시종장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시종장이 문 앞에서 우리의 도착을 알렸다.

들어오라는 나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옆에 서 있던 시종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내 아가씨 역할인 알레나가 당당하게 한 걸음 앞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방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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