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알레나는 참 힘도 세지만 걸음도 빠르구나.
멈춰 서서 가만히 황자를 쳐다보던 이 아이의 손을 잡아끈 것은 분명히 나였는데.
어느새 내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 이는 알레나였다.
걷는 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그녀에게 끌려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가는 나일이 보였다.
“천천히 좀 가.”
넘어지겠어.
도대체 그녀는 무엇 때문에 저리 속도를 높인단 말인가.
그녀의 등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 지금 짜증이 나, 하고.
말을 해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그녀에게 이끌려 위태위태하게 넘어질 듯 계단을 내려갔다.
- 쾅
제 방이 아닌,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가 나를 침대로 내던졌다.
이 아이의 힘은 정말…!
여자가 날 이렇게 가볍게 던질 수 있다니.
덕분에 그 한순간 내 몸무게를 잊고 깃털이 된 듯한 체험을 한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는데.
문제는 신고 있던 구두를 슬리퍼로 갈아 신기도 전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누구도 앉은 적 없던,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하던 흰 시트 위로 구두 밑창에 붙어있던 먼지들이 흔적을 남겼다.
“야! 뭐 하는 거야!”
내 깨끗한 침대 돌려내.
급하게 먼지를 털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레나야.”
그녀가 침대 앞에 가만히 서서 침대 위 나를 한 번, 시트 위 얼룩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 왜 그래. 왜 갑자기 화가 났어.”
“너랑 황자랑 둘이 그러고 있으니까….”
“….”
“내가 지금 너한테 화가 난 건가?”
아니 저기요.
그걸 나한테 되물으시면?
그녀의 반응이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어 벙쪄있는데, 가만히 서 있던 그녀가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침대로 와 앉은 알레나는 나를 끌어당겼다.
품속의 내게 다급하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미안. 미안.”
“….”
“미안해.”
날 껴안는 여자의 품이 따듯했다.
그녀가 내 목과 어깨 사이로 파고들었다.
“내가 조금… 내가, 첫날이라 모든 게 다 예민해져 있었나 봐. 미안해 화내서. 너한테 화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
나는 알레나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아직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어. 내가 네 동의도 없이 황자랑 닿아서 그런 거지?”
내가 나름대로 생각해낸 원인은 그것이었다.
치료제로 위장하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그녀가 황자랑 닿기도 전에 내가 멋대로 황자랑 닿아서 일을 그르칠까 염려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불같이 화를.
예상치 못한 다른 가짜 치료제가 등장해서 그렇지 않아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자기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내가 황자의 치료를 시작했다고 생각해버린 것이겠지.
“오늘 그와 닿았지만 치료가 되거나 하진 않았어. 내가 알아 걱정하지 마.”
“다친 덴 없지?”
“응. 나는 없어. 근데 내 침대가 다쳤어. 어쩔래.”
“있잖아.”
내 어깨 위 닿아 있는 그녀의 볼이 부드러웠다.
부러 이러는 건가.
알레나가 제 볼을 자꾸만 어깨에 문질렀다.
그녀가 입을 열자, 어깨 위로 더운 숨이 미끄러져 내렸다.
“이게 그 남자 냄새구나.”
“…무슨 말이야?”
“너한테서 황자 냄새가 나.”
“에? 너 떨어져 봐.”
그 말에, 나는 그녀에게서 몸을 빼냈다.
내 어깨에 코를 박자 어라 정말, 옅은 사향 냄새가 느껴졌다.
잠깐 닿았던 것뿐인데 이리 냄새가 배는구나.
“그러네. 이리와 봐.”
알레나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다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따듯한 몸이었지만, 그 남자의 몸에 비교한다면 미지근한 정도였다.
그는 굉장히 체온이 높은 편이구나.
“따듯해서 향이 금방 스며들었나? 신기하네. 그 짧은 시간에. 그 사람 몸이 되게 따듯해. 뜨겁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
안겨있던 알레나가 내 어깨를 밀어냈다.
평소답지 않게 그녀의 눈가가 꽤 서늘했다.
“너는 널 위해서, 그리고 날 위해서 황자랑 닿아야 하는데….”
말하던 이가 문장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자, 내 고개도 그녀를 따라 아래로 기울었다.
고개 숙여 표정을 감춘 그녀가 괜히 침대 위 얼룩을 손으로 훑었다.
“왜 그게 이렇게나 싫으냐.”
너 벌써.
나일이 잘생긴 건 인정하겠는데 그래도 그는 안 된다.
안 돼 친구야.
그에게 마음을 주면 무시무시한 연적을 상대해야만 한다고.
“너 설마… 황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 안 돼. 엄청 피곤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하하.”
“좋아하는 마음이 뭐 별거냐. 내 능력에 맞는 상대가 좋은 거야.”
“이거 안 지워지네.”
얼룩을 계속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알레나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문질렀는지, 작았던 얼룩의 몸집이 희뿌옇게 불어나 있었다.
“걱정 마. 난 우선순위가 확실하니까. 별거 아니지 어차피 사라질 감정이잖아.”
알레나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말에 동의해.
그럼.
보이지도 않는 감정에 목매달 필요 없잖아.
“너도 별거 아니야?”
내 끄덕임을 보지 못한 알레나가 물어왔다.
동의한다니까 그러네.
“뭐가.”
“네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도.”
“….”
“별게 아니냐고 묻는 거야.”
아 내 마음.
그녀의 질문에 방금처럼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저게 좋고 이게 맞는 거다.
굳이 어렵게 갈 필요 있니 쉽게 가자….
오지랖을 떨어 놓고 나는 정반대로 행동하면 우습지.
“너한테 황자는 뭐야.”
내가 반응이 없자 알레나는 내게 대답을 재촉해 왔다.
누가 나한테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렇게 직접 물어올 때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말아 물게 되는 게 참 바보 같다 느껴졌다.
왜 나는 주춤대는지.
그리고 묘하게 신경이 날 서는 이유는 뭔지 모를 일이다.
“고마운 사람이고 그래서 빚을 갚아야 하는 사람이고.”
“더. 그게 다가 아니잖아.”
추궁하듯 물어오는 말에 찬물을 끼얹듯 대답하자 그녀가 말을 멈췄다.
“좋아하는 사람.”
“…”.
“나 그 사람 좋아해. 그러니까 여기 있지. 근데….”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래서 답을 해야 할 때마다 짜증이 이는 거다.
하지만 굳이 무서운 연적을 상대해가며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아.
뻔히 아는 힘든 길 가는 거 싫어.
“근데 그거 대단한 거 아니잖아.”
평범한 사람을 좋아하고 평범한 사랑을 하고 모든 게 쉬웠으면 좋겠거든 나는.
내 능력 이상의 것을 탐하면 괴로워질 뿐인걸.
“별거 아냐.”
나는 다짐하듯 되뇌었다.
“정말 별거 아닌 감정이야.”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알레나가 입을 열었다.
“저주로부터 그를 지켜주고 우린 빠지면 되는 거야.”
“응.”
“나도 지켜줄 거야?”
“어?”
“네 아가씨라며. 지켜준다며.”
“그럼, 당연하지.”
내가 너무 영혼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나.
그녀가 어째 기운 빠진 듯이 웃어넘긴다.
정말인데.
나를 믿고 들어온 만큼 네게 안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할 거야.
“그럼 너는 누가 지켜줘?”
그 귀여운 질문에 나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내가 지키지. 뭐 여유 되시면 님께서 지켜주셔도 거절은 안 할게요.”
“…내가? 내 우선순위는 네가 아닌데.”
뭐야 농담이었는데.
얘 왜 이렇게 갑자기 진지해.
그녀가 싹 굳어버린 얼굴로 대답해 나는 민망함을 금치 못했다.
“야 농담….”
“있잖아.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어. 우선순위를 정해야 해. 미리 정해놔. 뭘 지킬지.”
그 말을 끝으로 알레나는 침대에서 내려갔다.
“야 내 침대 시트는 이렇게 두고 가는 거야?”
방문을 닫고 나가는 등 뒤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도무지 모르겠는 말들만 잔뜩 하고. 왜 저러는 거야 정말.
*
나일은 제 방 침대에 정자로 누워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였나?’
녹색 눈동자에 갈색 머리칼이라고 했던가.
어제 품속에 넣었던 여자의 크기를 가늠해보면서 이미지를 떠올려 보는데, 칠흑색 바탕 위에 아무리 뭔가를 그려보려 해도 그려지는 게 없었다.
아 뭐 본 게 있어야 떠올리지.
딱 한 번 만져본 것으로는 이미지가 잘 안 떠올랐다.
나일은 옆으로 돌아누워 기다란 쿠션을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물렁물렁하네.’
쿠션에게 사람의 느낌이 나길 바라는 것은 역시 무리인가.
천 껍데기와 솜으로 이루어진 쿠션은 뼈대와 근육과 살로 이루어진 그… 사람의 느낌이 안 났다.
‘에이씨.’
그가 솜뭉치에 둘렀던 팔을 풀며 괜한 쿠션을 발로 뻥 차 떨어트렸다.
“오늘은 좀 주무셨습니까?”
커튼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아침인가 보군.
시종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소리를 들으며 나일은 깜깜한 제 방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장면을 상상했다.
“오늘도 나의 원숭이가 왔군.”
“황자 전하.”
“시답잖은 얘기에도 깔깔거리고 잘만 웃던 영애가 네놈의 원숭이 소리를 듣자마자 입을 다물더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 앞이 안 보이는 게 이럴 땐 참 다행이라고 느껴진다.”
“아 전하아~”
어디서 이 원숭이 같은 자식이.
“누가 말하면서 뒤 음절을 그렇게 떨라고 시켰지? 아침부터 역하니 당장 그만하도록.”
“예. 명하시니 그래야지요.”
시종은, 나일이 아침을 먹기 전 간단히 씻고 몸단장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왔다 갔다 제 방을 누비는 시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침대로 와 보거라.”
그 말에 시종이 침대 캐노피를 들췄다.
시종은 침대 앞에 서서 그에게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서 있지 말고 내 앞에 앉아 봐.”
“예.”
시종이 앉은 자리로 침대 한쪽이 기우는 것을 느끼며 나일은 몸을 일으켰다.
그가 다가가 시종을 끌어안았다.
“뭐하시는 겁니까.”
아침부터 제 상관에게 예고도 없이 스킨쉽을 당한 시종의 목소리가 까칠했다.
그것은 나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종을 끌어안자마자 그는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사람을 껴안는다고 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일단 저는 기분이 별로였습니다.”
“네 기분은 내 고려 대상이 아니다.”
내가 품속에 넣어본 사람들.
그 여자, 그리고 어제의 여자. 그리고 저 시종놈.
“원숭이 놈아 말해 보거라.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안아도 넌 기분이 좋더냐?”
“당연히 좋아하는 여자를 안아야 기분이 좋지 않겠습니까? 가끔 전하는 당연한 것을 모르십니다.”
“네놈이 어제 당연히 해냈어야 할 내 명령을 처참히 수행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냐?”
“아 전하아아~”
뒤 음절 끌지 말리니까 저놈이 또.
하여튼 내 수행원들은 한번 말해서 바로 되는 놈들이 없다.
나일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젖혔다.
“어제 그 영애를 말씀하시는 거죠?”